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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닌 1
아사노 이니오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봐요, 그럴 수 없으니까 인생이 괴로운 거 아냐.'
독약을 먹이고 싶으면 약 이름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지. 에헤헤.. 하며 방긋이 웃는 이라부에게 항변하는 어느 환자의 말처럼, 인생이 괴로운 이유는 '그럴 수 없으니까'이다. 때맞춰 '그럴 수 있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도쿄의 한 구석, '낮고 좁고 무거운' 하늘을 이고 회사 옥상에 쭈그리고 앉아 고양이한테나 푸념하던 메이코에게 '인생의 레일 따위에서 벗어나'라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레일을 벗어나면 예전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드넓은 하늘을 볼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인생이 괴롭다.
프리터로 일러스트를 그리며 대학시절 시작한 밴드생활을, 본격적으로 활동하지도 접지도 못하는 다네다. 그럴 수 없으니 그 또한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런 다네다에게 어느날 메이코가 감자같은 얼굴을 들이밀고 회사를 관뒀다고 말한다. 이제 그들에게 '그럴 수 있어서 행복한 인생이' 시작되는 것일까.
설마. 인생이라는 괴물 같은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 없다. 그 정도라면 누구나 이라부병원의 처방전 한 장을 받는 것으로 라 돌체 비타.. 노랠 부르며 살다가 마지막 눈을 감으리라. 둥글넙적하고 평범한 주인공들의 거창할 것 하나 없는 밋밋한 인생 이야기가 시작된다. 애초에 반짝거리기는커녕 스포트라이트조차 비추지 않는 불투명한 청춘, <소라닌>은 여름 한낮 사람 하나 없는 골목처럼 심심할 지경인 청춘 군상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조금만 더 죽어라 노력하면, '90일만 더 살면' 뭔가 좀 좋아질까 싶지만 기실 인생에서 놀라운 일들은 그렇게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다네다 밴드가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자, 마음먹고 만든 앨범이 하룻밤 사이에 히트곡이 될 리 만무하고 다네다의 아버지가 지어준 밥과 명란젓 한 덩어리가 메이코에게 마법의 주문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골방에 박혀 날마다 텔레비전이나 부수며 살 수는 없으니 메이코는 다네다가 남겨둔 기타를 둘러맨다. 다시 한 번 '그럴 수 있어서 행복할'지도 모를 인생이 시작되는 것도 같지만, 엉망진창 연주를 하고 간신히 틀리지 않게 노랠 부르며 메이코는 생각한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야. 하지만... 이 곡이 끝나면 언제나와 똑같은 생활이 시작돼.'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노랠 부르고 나서 무대 위에 코를 박고 엎드린 메이코는 영화 <태풍태양>의 모기처럼 밋밋한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자기만의 의례를 치러낸다. 이 장면이 얼마나 안타깝고 애처로우며 서글픈지는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자고 일어나 새로운 해가 떠올라도 어제와 같은 오늘이 반복되고, 심하면 기시감을 불러올 정도로 10년 전 어느날과 똑같은 나날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하찮은 꼴을 한 게 내 인생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 슬쩍 정류장 한 귀퉁이에 놔두고 떠나고 싶은 쓸모없는 물건처럼, 덩치 큰 배낭 같은 인생의 무게를 내다버리지 못해 누구나 질질 끌고 버티고 있는 거다. 어떤 이는,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죽는날까지가 아니라 사는날까지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인생이란 거 그렇게 누구에게나 헤헤 웃으며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고 손을 놀려야 한다. 아침마다 잠이 덜 깬 얼굴로, 이 끔찍한 인간들은 다들 어딜 향해 가고 있는 걸까. 다 죽어버리든지! 저주를 퍼부으며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야 하고, 이참에 거지같은 면상을 한 상사를 들이받을까, 아니꼽고 더럽지만 이번만 참고 넘어갈까, 매초마다 시덥잖은, 혹은 절체절명의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의 연속인거다. 그런 자질구레함이 모여 한달이, 1년이, 인생이 돼버린다. 때때로 회상인지 착각인지 모를, 내게도 반짝거리던 지난 시절이 있었지..하는 중얼거림을 하며 한번씩 가늘어진 눈을 하고 허공을 보면서 말이다.
어제와 같은 모습의 언제나 똑같은 생활이 시작되더라도, 메이코는 그때 '그럴 수 있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조금은 인생이 괴롭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가출했던 애인이 돌아온다고 전화해 놓고는 그길로 황천길로 가버릴 수도 있는 게 인생이지만, 청춘 앞에 항상 찬란한 미래가 펼쳐져 있는 건 아니지만, 한번쯤 '레일을 벗어나라'는 검은 속삭임의 꾐에 빠져든다고 해도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라고 작가는 말한다. 텔레비전을 던져 버린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 손톱 아래 가시 하나가 세상의 전부가 되기도 하고, 세상의 전부가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하게 하찮은 것으로 느껴지는 그 불합리하고 제멋대로인 게 청춘의 모습이니까.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무척이나 사실적이다. 만화의 본질이랄 수 있는 과장도, 남발하는 우연도, 따뜻함도, 청춘예찬도, 밝은 미래도, 로맨틱함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공명수에 맞춘 작품이 아닌, 작가의 섬세한 감정에 함께 공명했을 때만이 화려하지 않은 작품 속에 숨겨진 작가의 내공을 발견할 수 있다. 툭툭 던지는 듯 하지만 묵직함을 지닌 작가의 생각들과 그것들을 무겁지 않게 받쳐 주는 경쾌한 유머, 그리고 치밀하고 섬세한 데생과 구도, 입체적인 전개, 무엇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80년생 젊은 작가가 앞으로 어떤 작품을 보여줄지 몹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