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노벨 한림원은  고대와 현대문학, 시와 산문, 학문과 창작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업으로 세계 문학계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캐나다 출신 시인·고전학자인 앤 카슨에게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 했다.

1950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앤 카슨은 어린 시절 <사포 시 전집>을 읽고 고대문학에 깊이 매료되어  토론토대학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전공하면서 깊이 있게 고대 문학을 연구 했다.

 1981년 박사학위를 받은  앤 카슨은 캐나다 맥길대, 미국 프린스턴대와 코넬대 등에서 고전문헌학, 역사학, 인류학, 비교문학 등을 연구를 병행 하는 작업을 통해  고대 그리스 서정시를 분석하며 욕망과 결핍의 구조를 탐구하는 독창적인 글쓰기 작업으로 확장 시켜 나갔다.

때로 나는 그리스 문헌을 읽을 때 심지어 안다고 생각하는 단어들도 모두 사전에서 찾아보려고 애쓴다. 그러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떤 단어들은 생각했던 것과는 꽤 다른 뉘앙스를 지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때로 그 단어들의 다른 뉘앙스는 그런 줄 몰랐더라면 던지지 않았을 질문들을 던지게 만든다. 최근에 나는 그리스어 단어 소프로쉬네를 질문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나는 이 자제의 개념을 궁금하게 여기고, 이 개념이 그리스인들이 믿었던 대로 정말 인간의 선량함에 대한 대부분의 의문과 문명의 딜레마에 대한 해답인지를 궁금하게 여긴다. 나는 억압 외에 다른 인간적 질서의 관념, 자제 외에 다른 인간적 덕목의 개념, 내부와 외부의 분리에 기초한 인간적 자아 외에 또다른 인간적 자아는 없을지를 궁금하게 여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아 외에 또다른 인간적 본질은 없을지를. -앤 카슨의 「소리의 성별」 중에서

1986년 박사 논문을 바탕으로 발표한 첫 저서 <에로스, 달콤씁쓸한>은 현대인의 욕망과 결핍의 구조를 고대 그리스 서정시와 엇갈리듯 35개의 장으로 구성한 독특한 작품이다.

앤 카슨의 대표작 <빨강의 자서전>은 헤라클레스가 화살로 쏴 죽인 ‘빨강 괴물’ 게리온의 입장에서 그리스 신화를 다시 쓴 작품으로 운문과 산문, 서사와 서정의 경계를 허물며 고전을 현대적 감수성으로 재구성한 시로 쓴 소설이다.

​결혼과 배신이라는 경험을 풀어낸 <남편의 아름다움>과 죽은 오빠를 추모하는 감정을 그려 낸 <녹스>라는 작품은 문학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확장 시키며  문학 텍스트의 한계를 뛰어 넘은 지적 실험의 창작물로 평가 받고 있다.

​

​형용사란 무엇인가? 명사는 세상을 이름 짓는다. 동사는 이름을 움직이게 한다. 형용사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온다. (…) 형용사는 그저 부가물에 지나지 않는 듯하지만 다시 잘 보라. 이 수입된 작은 메커니즘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특정성 속에서 제자리에 머무르게 한다. 형용사는 존재의 걸쇠다.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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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캐나다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앤 카슨(Anne Ca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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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도 노벨 문학상 발표 직전 영국 베팅사이트 나이서 오즈(Nicer Odds)는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가장 큰 작가로 호주 소설가 제럴드 머네인의 배당률을 6배에 배팅 했고 그 다음으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배당률은 7배에 배팅 했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라는 이름이 스웨덴 한림원에서 호명 되는 순간 그에게 1만 원을 걸었던 사람은 7만 원을 받았을 것이다.

노벨상 수상을 처음 시작한 1901년 이래로 지금까지 총 49명의 여성들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역대 남성 수상자들과 비율로 비교 하면 여성 수장자 비율은 남자의 5.6%에 불과하다.

10월 5일에 발표한 생리의학상은  칼 다이서로스·페터 헤게만·게오르크 나겔 공동수상으로 수상자 모두 남자다.

생리의학상 최초의 여성 수상자는 1947년 글리코겐 대사 경로를  발견한  거티 코리 1983년 전이성 유전자 발견으로  공동 수상이 아닌 유일한 여성 단독 수상을 한 바버라 매클린톡이 있다.

 2023년 (mRNA 백신 개발에  기여한 커털린 커리코가 공동 수상했고 , 2025년  면역 관용 연구 성과로 메리 브렁코가 수상했다.

 

각 수상 대상자는 분야별로 차이가 있는데 경제학 분야에서 3명만 여성 수상자가 나왔을 정도로 수상 비율이 가장 낮은 반면에 노벨 평화상 분야에서 20명의 여성 수상자를 배출 하며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 하고 있다.

문학상의 경우 여성 비율이 12.5%로 상대적으로 높지만 여전히 노벨상 수상 성비 불균형은 심각하게 한쪽 성별에 치우쳐 있다.

따라서 매년 노벨문학상에 여성 작가들이 상을 받는다 해도 앞선 세기에 줄창 남성 작가들이 상을 독식했던 비율을 따라 잡지 못한다.

철저하게 후보작 선정 과정 부터 심사까지 베일에 쌓아 놓고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노벨상 주최국이자 위원회인 스웨덴 한림원은 최종 수상자가 발표 된 지 50년 동안 심사 과정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세기 전에 수상한 작품들을 둘러싼 심사 과정들이 최근에야 공개 될 정도로 철저하게 비밀주의를 고수 하고 있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지금까지 일부 공개 한 바에 의하면 노벨 수상자가 발표된 10월을 지나서 11월 부터 차기 노벨 문학상 후보 추천을 요청하는 공식 서한을 전 세계로 발송한다.

노벨측으로 부터 추천을 요청 받은 이들은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과 각국가의 문학·언어학 교수, 각국 작가협회장 등 수백 명에 달한다.

이들의 추천을 바탕으로 5명의 후보를 추려낸 노벨 문학위원회는 6∼8월 최종 후보자 5명의 작품을 낭독하고 평가하고 나서 9월엔 각 후보자의 문학적 기여와 강점을 두고 토론을 벌인다.

10월 초에 최종 후보 투표를 실시하고, 여기서 과반을 득표한 인물이 수상자로 확정된다.

전재 산을 사회에 기부한 알프레드 노벨은 유언에서 ‘수상자의 국적과 상관없이 가장 가치 있는 인물에게 상을 수여 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문학 분야에서 동시대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에게 주어지는 노벨 문학상은 1901년부터 올해까지 총 118차례 수여 되어 상을 받은 사람은 122명으로, 제 1·2차 세계대전 기간에만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역대 수상자들 중에서 프랑스가 16명으로 가장 많았고 미국 13명, 영국 12명, 스웨덴 8명, 독일 8명이 받았다.

그동안 수상자들 중에서 성취한 업적에 대한 것 부터 자질까지 논란이 되었던 수상자들이 있었다.

노벨 문학상에서는 실제 심사 과정에서 국가적·정치적 요소가 많이 고려 되는데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과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리고 국가가 나서서 수상을 거부 했던 러시아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를 비롯해 미국 팝 가수 밥 딜런까지 문학적 의미에 정치적 의미가 포함된 경우도 종종 있었다.

동시대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이룬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해서 수 많은 여성 작가들도 수상을 하지 못해서 그동안 노벨 문학상은 성취에 대한 ‘보상’ 보다 덜 알려진 작가에 대한 ‘격려’같은 의미로 낯선 이름의 작가들에게 상이 수여 되기도 했다.

2024년 한강 작가가 수상했기에 대륙 안배 차원에서라도 동북아 출신 작가들의 수상은 배제 될 것이라는 예측도 이번에 맞아 떨어졌고 인공지능 보다 영국 베팅사이트 나이서 오즈(Nicer Odds)의 적중률이 더 정확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가 종말론적 공포 속에서도 예술의 힘을 재확인하는 강렬하고 선구적인 작품 세계를 펼쳤다며 그를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1954년 헝가리 줄러에서 태어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마치고 1985년 '사탄탱고'로 데뷔했다.

<사탄탱고>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시월의 아침 끝없이 내릴 가을비의 첫 방울이 마을 서쪽의 갈라지고 소금기 먹은 땅으로 떨어질 즈음(이제 첫서리가 내릴 때까지는 온통 악취 나는 진흙 바다가 펼쳐져 들길로 다니기도, 도시로 가기도 어려울 터이다), 후터키는 종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1980년 부패할 대로 부패해 버린 공산주의가 붕괴되어가던 헝가리의 어느 집단 농장은 이미 해체되어 마을 곳곳마다 가난과 불신의 늪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1년 반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리미아시가 마을로 돌아온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한 때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녔던 그가 가을 장마가 시작 되는 10월에 마을로 귀환한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절망적인 삶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는 달콤한 꿈에 부풀지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와 보이지 않는 거미들이 친 거미줄에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시달린다.

농장이 붕괴 되어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주민들 앞에 나타날 이리미아시는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구세주일까?

지리 멸렬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쳐 대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결국엔 실패로 돌아가 끝내 가난과 굶주림의 쳇바퀴에 다시 포박 되는 과정을 그려낸 <사탄탱고>는 출간 된지 반 세기가 지난 후인 2015년 헝가리 작가 최초로 맨부커상(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받았다.

복잡하면서도 모호한 의식 상태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장에 마침표 대신 쉼표로 찍어 놓는 작가의 독특한 문체는 번역가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다.

두 번째로 출간한 <저항의 멜랑콜리>라는 작품은 첫 페이지 부터 길고 긴 문장으로 시작한다.

티서강 제방에서부터 저 멀리 카르파티아산맥 발치까지 뻗어 있는, 남쪽 저지대의 얼음에 뒤덮인 단지들을 연결하는 여객 열차는 불행하게 제 발부리에 자꾸 걸리는 철도원의 애매한 해명이나 불안스레 기차역에서 가다 서다 허둥거리는 역장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올 생각을 안했기에 (‘그것 참, 연기처럼 다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나….’ 철도원은 떨떠름한 표정을 구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딱 이런 ‘비상’용으로 건사하고 있던, 오로지 두 대로 이뤄진 나무의자 객차를, 한물가고 영 시답잖은, 진짜 마지막 방책으로만 사용되는 424 기관차와 맞걸어 운행에 들어갔다. 하릴없이 동쪽행 기차 편을 기다리던 지역민들은, 지켜지지도 않고 그조차 어림잡은 것인 시간표에 따르면 비록 한 시간 하고도 삼십 분 지연되긴 했으나, 이를 무관심과 속수무책의 체념이 섞인 모습으로 받아들이고서 기다리다, 마침내 지선을 따라 오십 킬로미터쯤 더 간 그들의 종착역에 도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저항의 멜랑콜리 중에서

1987년 독일 동독에서 학업을 이어가던 중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을 목격한 작가 라슬로는 어디에서든 글을 쓰는 순간 그 곳이 고향이 되고 집이 된다며 그동안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그리스, 중국, 몽골, 일본(교토), 미국(뉴욕) 등 세계 여러 나라에 체류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헝가리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작품은 러시아의 고골과 독일의 카프카 그리고 미국의 허먼 멜빌과 비견 되는 작가다.

 

 

노벨상의 달 10월은 아침 저녁으로 부는 차가워진 바람막이를 책 병풍 삼아도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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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단편 작가로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캐나다 태생의 작가 앨리스 먼로라는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음과 같다.

20세기 현대 단편 소설의 대가

20세기 여자 체홉

진정한 이야기꾼

언어의 연금술사

​

1931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시골 마을 윙엄에서 여우 농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앨리스 먼로는 10대 시절부터 단편을 쓰기 시작했던 문학 소녀였다.

웨스턴 온타리오대학 영문과 재학 중 단편 '그림자의 차원'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등단한 앨리스 먼로는 대학 동기와 결혼 후 학교를 그만 두고 남편의 고향에 서점을 경영하며 세 아이를 낳는다.

육아와 서점 경영을 하는 중에도 틈틈이 글을 썼던 앨리스 먼로는 여러 출판사로부터 거절 당한 끝에 1968년에 첫번째 단편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발표 하면서 작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단편보다 장편을 선호 했던 캐나다 문학계에서 앨리스 먼로의 단편들은 길지 않은 분량 속에 도시와 지방, 욕망과 규칙, 현실과 이상, 도덕과 자유 사이에서 번민 하고 갈등하고 갈망하는 지극히 평범한 이들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어서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첫번째 단편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으로 앨리스 먼로는 작품 활동하는 내내 총독 문학상을 모두 세 차례 받으며 캐나다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2009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 하면서 전 세계 단편 소설 작가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고 2012년 13번째 단편집 <디어 라이프> 출간 이후 절필을 선언 한 앨리스 먼로는 2013년 마침내 전 세계 작가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들 중에서 장편이 아닌 단편집으로 수상 한 앨리스 먼로는 작가들이 평생에 걸쳐 이룩하고 성취 할 수 있는 모든 영광과 스포트라이트를 한번에 받은 전무후무한 작가였다.

노벨상 발표 당시 고령의 나이에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앨리스 먼로는 2013년 수상식 자리에 그녀의 딸이 대신 참석해서 메달을 받고 수상 소감을 발표 했다.

앨리스 먼로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치밀할 정도로 균일한 완성도와 작품의 깊이를 갖춘 작가로 오랜 세월 함께했지만 소통이 불가능한 결혼 생활, 우연한 인연이 남기고 간 상처를 뒤돌아보며 흘리는 눈물, 사회와 가정이라는 도덕적 규범과 암묵적 관습과 도저히 벗어나기 힘든 운명적 굴레의 수레 바퀴 아래 깔린 채 현실의 숨 막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여성의 삶을 섬세한 필체로 그렸다.

캐나다의 여성 체홉 또는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불리고 있는 앨리스 먼로는 2024년 5월 92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작가가 타계한 지 두 달 후 2024년 7월 미국 뉴욕 타임스가 21세기 베스트 북 100권 리스트에 올라가면서 앨리스 먼로를 둘러싼 충격적인 사건이 수면에 등장했다.

 

1951년, 대학교 1학년 때 결혼을 한 앨리스 먼로는 첫째 딸 셰일라를 낳고 나서 학교를 그만두고 둘째 딸 캐터린은 신장이 기형으로 태어나서 이틀 만에 사망하고 이 년 후 셋째 딸 제니를 낳는다.

1963년 학업을 마친 남편이 서점 경영을 시작하고 2년 후 막내 딸 안드레아가 태어난다.

막내 딸이 태어났던 시기 부터 서점은 장사가 잘 되어서 대 도시 빅토리아로 옮기고 회사 이름을 먼로 서점이라고 바꾼다.

먼로 서점은 캐나다 내에서 유명한 도서 유통 판매 회사로 규모가 큰 사업체가 되었지만 부부 사이에 균열이 생겨서 1972년에 두 사람은 이혼한다.

이혼 후 앨리스 먼로는 고향 온타리오주로 돌아가서 서부 온타리오 대학에서 운영하는 작가 레지던시에 들어가 창작 활동과 학업을 동시에 이어나갔다.

1976년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앨리스 먼로는 같은 대학의 지리학과 교수 제럴드 프레민과 재혼한다.

이후 작가로 명성을 얻은 앨리스 먼로는 두 번째 남편 프레민이 세상을 떠나기 전인 2013년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 했다.

여기까지가 세상에 알려진 작가 앨리스 먼로의 이력이다.

 

2024년 뉴욕 타임스는 기성 작가들과 평론가들이 추천한 100권 중에서 독자들이 10권 씩 투표 한 결과를 바탕으로 21세기 베스트 북 100권 리스트를 발표 했고 그 리스트에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이 올라갔다.

이 리스트가 발표되는 시점에 캐나다 일간지 토론토 스타에 앨리스 먼로 딸의 충격적인 이야기가 게재되었다.

캐나다 일간지 토론토 스타에 게재된 기사에 따르면 1976년 40대였던 어머니 먼로의 집을 방문했던 9살 짜리 막내 딸 안드레아가 50대였던 의붓 아버지 프렘린의 집을 방문했을 때 프렘린이 자신이 자던 침대로 올라와서 처음 성폭행을 했다는 증언이 실렸다.

막내딸 안드레아는 이후 몇 년 동안 의붓 아버지 프렘린에게 강제로 차에 태워졌고 그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성기를 노출하며 성적으로 괴롭혔다.

어린 여자아이를 상대로 성적 학대와 성폭행을 즐겼던 프렘린은 의붓딸 안드레아에게 엄마 앨리스 먼로의 기이한 성욕에 대해 떠벌렸고 자신이 좋아하는 이웃집 어린 여자아이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악마였다.

의붓아버지 프렘린은 먼로의 딸 안드레아가 10대가 되면서 관심을 잃기 시작했고 안드레아는 성인이 되어서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엄마 먼로는 딸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서 ' 무슨 일이 일어났든 그것은 나와 내 의붓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단호하게 선을 긋고는 자신의 단편에서는 의붓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후 극단적 선택으로 숨진 여성의 이야기를 그렸다.

안드레아가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과 성적 학대 휴우증으로 폭식증, 불면증, 편두통에 시달리는 동안 엄마 먼로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졌다.

결국 딸 안드레아는 2000년대 초반 먼로가 자신의 두 번째 남편 프렘린을 '용감한 인물'이라고 묘사한 잡지 인터뷰를 읽고 경찰에 신고하고 2005년 당시 80세였던 프렘린은 온타리오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

법정에 선 의붓 아버지 프렘린은 오히려 의붓딸 안드레아가 자신을 유혹 하고 침실에 침입했다고 법정에서 주장하며 뻔뻔한 태도를 유지했다.

의붓딸 안드레아를 성폭행 한 과거 범죄 이후 몇 차례 다른 여자 아이에게 저지른 범죄 혐의가 발견되었지만 온타리오 법원은 프렘린이 고령인 나이를 고려해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법정 분쟁과 소송으로 번진 이 모든 사태를 지켜 보았던 작가 앨리스 먼로는 딸 안드레아에게 일말의 사죄나 사과는 커녕 자신의 딸이 마치 두 번째 남편 프렘린과 불륜을 저지른 것처럼 격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기자들 앞에서 그녀는 문학적인 언어로 평생 끔찍한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딸을 향해 태연하게 이런 말을 남겼다.

'너무 늦게 알게 되었구나. 하지만 난 그를 너무 사랑하고 있어.

욕구를 억누르고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부모에게 무언가 보상 받을 것 기대 하지 마라. 무슨 일이 일어났든 의붓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일일 뿐 나와는 상관 없다.'

그녀는 법원 판결 이후 세간의 시선을 의식해서 잠시 프렘린을 떠났다가 다시 프렘린 곁으로 돌아와 2013년 그가 숨질 때까지 곁을 지키며 부부 생활을 이어갔다.

캐나다 국민 작가로 추앙 받고 있는 앨리스 먼로의 전기를 집필한 작가 조차 두 번째 남편이 막내 딸을 지속적으로 성폭행 했던 걸 은폐 했고 작가의 에이전트들도 철저하게 작가의 사생활이라고 함구 해 왔다.

최근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앨리스 먼로는 2013년 절필 선언 무렵부터 2024년 숨질 때까지 10여 년동안 치매를 앓아서 2013년에 노벨상을 수상 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 하지 못했고 가족의 이름이나 얼굴 조차 깡그리 잊어 버렸다.

현대 단편 소설의 대가의 문학적 상상력은 가족의 어둠과 상처 속에서 태어났던 것일까?

2013년 그토록 사랑했던 두 번째 남편이자 변태 성욕자인 악마 프렘린이 세상을 떠난 후에 발표한 <디어 라이프>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 중에서

거의 모든 전세계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앨리스 먼로는 캐나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다른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이 일만큼 끌렸던 것은 없었고, 그러니 내 삶에는 다른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앨리스 먼로가 남긴 작품 속 인물들은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젊은 여자, 루게릭병을 앓는 남편, 알츠하이머병에 접어든 아내 등 제각각 보이지 않는 상처를 안고 있었다.

작가는 이 모든 사람들의 삶을 한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냈지만 정작 자신의 딸이 성적 학대와 성폭행을 당한 것에 대해선 너와 의붓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선을 긋고는 마치 자신의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 여자로 대했다.

문학은 인간의 상처 곁에 가장 가까이 있었다.

​

알 수도 없고, 물어서도 안 된다…….

내 앞에 그리고 너의 앞에 어떤 운명이 가로 놓여 있는 지를

-앨리스 먼로(1931-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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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3일 스웨덴 한림원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의 이름을 호명 했을 때 전 세계인들은 귀를 의심했다.

소설가나 시인과 같은 문인이 아닌 대중음악인이 노벨 문학상을 받는 일은 전 세계 문학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였다.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을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위대한 미국의 노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

종이에 쓰여진 글이 아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가수에게 문학상이 수여 된 것을 놓고 전 세계주요 언론과 평론가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에서 밥 딜런의 수상이 ‘적절하다’,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으로 나눠졌다.

1960~70년대 베트남 전쟁으로 인권운동과 흑인차별 등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이 뜨거울 때 수많은 명곡을 남기면서 청춘의 우상이자 저항의 아이콘이 된 밥 딜런의 노랫말에는 정치와 사회, 문학 등 여러 분야를 망라한 내용이 시적으로 담겨 있어서 미국의 여러 대학 영문과에서는 그의 시를 분석하는 강좌가 개설되기도 했다.

밥 딜런이 음악적 전성기를 보냈던 시절에 세상에 존재 하지 않았던 나는 그의 음악성이나 가사적 의미가 시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미국 포크송을 좋아 하지 않기 때문에 밥 딜런이 수상자로 적임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스웨덴 한림원측에서 문학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 고정적 관념과 역할보다 독자, 대중과의 공감을 중요시한 결정 이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시와 소설 형식을 문학이라 지칭 했던 세상은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에는 가사가 문학의 장르로 편입되었음을 입증했다.

 

1941년 미국 미네소타의 시골 마을에서 로버트 앨런 지머맨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영국 시인 딜런 토마스에게서 영향을 받아 본인의 이름에 ‘딜런’이라는 이름을 붙여 개명했다.

1961년 음악에 대한 열정이 들끓어 올랐던 밥 딜런은 자신의 우상인 우디 거스리를 만나기 위해 통기타를 매고 대 도시 뉴욕으로 올라온다.

대공황기 미국 노동자들의 고난과 고통을 함께 하며 그들의 애환을 부른 가수 우디 거스리는 “이 기계는 파시스트를 죽이기 위한 것(This Machine Kills Fascists)”이라는 문구를 기타에 새기고 다녔을 정도로 그의 모든 음악은 정치적이였다.

하지만 우디 거스리를 우상으로 생각했던 밥 딜런의 관심사는 정치적 구호나 사회운동이 아닌 오로지 음악뿐이였다.

밥 딜런을 저항의 아이콘이자 시민 운동에 뛰어들게 만들었던 인물은 그의 첫 사랑 '수지 로톨로'다.

1961년 교회에서 노래를 불렀던 밥 딜런은 수지를 처음 보는 순간 눈을 떼지 못하고 사랑에 빠진다.

이탈리아계 이민자 부모의 영향으로 공산당원으로 활동 했던 수지는 세상 돌아가는 것에 도통 관심이 없었던 밥 딜런을 나라 안 밖으로 요동치던 정치,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해서 그를 시민 운동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1962년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암살과 베트남 전쟁 등 혼란기에 빠진 미국 사회를 웅얼거리듯 읊조리는 창법으로 무대에 등장한 밥 딜런은 1963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핵 전쟁의 먹구름이 밀려 오던 날, 밥 딜런은 기타를 메고 평화 구호를 외치는 청춘들이 모여 있는 가스라이트에서 전쟁광을 저격하는 반전가요 Masters of War를 열창한다.

1969년 8월 미국 뉴욕 베델공원에서 사흘 내내 밥 딜런은 ‘노킹 온 헤븐스 도어’, ‘라이크 어 롤링 스톤즈’ 노래를 젊은이들과 함께 부르면서 사회저항운동에 있어 상징적인 뮤지션이 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몇 일 동안 제대로 씻거나 빗질 조차 하지 않은 모습의 밥 딜런은 정확하지 않은 발음과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리듬도 박자도 무대에 올라 갈 때 마다 제멋대로 불렀지만 데뷔 이후 그래미상만 11회 수상했으며, 영화 주제곡으로 골든글로브는 물론 아카데미까지 휩쓸었다. 2008년에는 퓰리처상 공로상을 수상했고 마침내 2016년 80세를 바라 보는 나이에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다.

음악적인 명성과 부를 모두 거머쥔 그의 삶은 완벽해 보였지만 실제로 그가 살아 온 인생은 삼류 드라마 막장과 흡사했다.

여성 편력이 심했던 밥 딜런은 1960년대 저항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주었던 수지에게 1963년 임신 중절 수술을 시키고 새로운 음악적 뮤즈인 조안 바에즈와 함께 활동 하다가 또 다른 뮤즈를 만나 자신의 음악 인생을 위해 헤어진다.

이후 사라 라운즈 클레어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 여러 여자들을 사귀다가 엄청난 금액의 위자료와 소송비용 등으로 재산을 탕진한 밥 딜런은 자신의 곡 600곡 판권을 유니버셜 음반사에 3억을 받고 팔어 버리고 순회공연에 나서서 생활고를 만회하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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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에게 마약을 가르쳐준 장본인이라는 걸 자랑스러워 했던 밥 딜런은 스스로를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이라 지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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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이 스무살이였던 1961년부터 1965년까지 4년의 시간을 담은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 하던 연인 수지와 미국 대중음악사에 흔적을 남긴 음악인들 틈에서 음악에 열정을 쏟아 붓는 팝의 전설의 청춘 시절의 모습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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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로 이 영화의 중심 스토리는 브라운관 시대가 도래 하고 화려한 영상과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음악가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의 시대에서 기타 한 대를 메고 무대에서 라이브 실력을 보여 주었던 진정한 음악 장인들이 활동했던 시절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까지 밥 딜런과 청춘을 함께 했던 세대들은 그가 무대에서 어떤 모습이나 상태로 노래를 불러도 박수를 쳐 주지만 그는 무대에서 가장 성의 없고 재미없는 공연을 하는 가수로도 유명하다.

선약이 있다며 노벨문학상 시상식에도 가지 않았던 밥 딜런은 자신을 지칭하는 저항의 아이콘, 팝의 역사, 노벨 문학상 수상 같은 타이틀이나 이력 조차 무색 할 정도로 그는 원곡의 멜로디를 몹시 변형하거나 발음을 흘려서 부르는 등, '원곡의 감동'을 재현하는 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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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자신을 찾는 게 아니에요.

어떤 것도 찾는 게 아니죠.

인생이란 자신을 창조하는 일입니다."

- 밥 딜런(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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