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13일 스웨덴 한림원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의 이름을 호명 했을 때 전 세계인들은 귀를 의심했다.

소설가나 시인과 같은 문인이 아닌 대중음악인이 노벨 문학상을 받는 일은 전 세계 문학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였다.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을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위대한 미국의 노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

종이에 쓰여진 글이 아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가수에게 문학상이 수여 된 것을 놓고 전 세계주요 언론과 평론가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에서 밥 딜런의 수상이 ‘적절하다’,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으로 나눠졌다.

1960~70년대 베트남 전쟁으로 인권운동과 흑인차별 등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이 뜨거울 때 수많은 명곡을 남기면서 청춘의 우상이자 저항의 아이콘이 된 밥 딜런의 노랫말에는 정치와 사회, 문학 등 여러 분야를 망라한 내용이 시적으로 담겨 있어서 미국의 여러 대학 영문과에서는 그의 시를 분석하는 강좌가 개설되기도 했다.

밥 딜런이 음악적 전성기를 보냈던 시절에 세상에 존재 하지 않았던 나는 그의 음악성이나 가사적 의미가 시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미국 포크송을 좋아 하지 않기 때문에 밥 딜런이 수상자로 적임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스웨덴 한림원측에서 문학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 고정적 관념과 역할보다 독자, 대중과의 공감을 중요시한 결정 이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시와 소설 형식을 문학이라 지칭 했던 세상은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에는 가사가 문학의 장르로 편입되었음을 입증했다.

 

1941년 미국 미네소타의 시골 마을에서 로버트 앨런 지머맨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영국 시인 딜런 토마스에게서 영향을 받아 본인의 이름에 ‘딜런’이라는 이름을 붙여 개명했다.

1961년 음악에 대한 열정이 들끓어 올랐던 밥 딜런은 자신의 우상인 우디 거스리를 만나기 위해 통기타를 매고 대 도시 뉴욕으로 올라온다.

대공황기 미국 노동자들의 고난과 고통을 함께 하며 그들의 애환을 부른 가수 우디 거스리는 “이 기계는 파시스트를 죽이기 위한 것(This Machine Kills Fascists)”이라는 문구를 기타에 새기고 다녔을 정도로 그의 모든 음악은 정치적이였다.

하지만 우디 거스리를 우상으로 생각했던 밥 딜런의 관심사는 정치적 구호나 사회운동이 아닌 오로지 음악뿐이였다.

밥 딜런을 저항의 아이콘이자 시민 운동에 뛰어들게 만들었던 인물은 그의 첫 사랑 '수지 로톨로'다.

1961년 교회에서 노래를 불렀던 밥 딜런은 수지를 처음 보는 순간 눈을 떼지 못하고 사랑에 빠진다.

이탈리아계 이민자 부모의 영향으로 공산당원으로 활동 했던 수지는 세상 돌아가는 것에 도통 관심이 없었던 밥 딜런을 나라 안 밖으로 요동치던 정치,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해서 그를 시민 운동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1962년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암살과 베트남 전쟁 등 혼란기에 빠진 미국 사회를 웅얼거리듯 읊조리는 창법으로 무대에 등장한 밥 딜런은 1963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핵 전쟁의 먹구름이 밀려 오던 날, 밥 딜런은 기타를 메고 평화 구호를 외치는 청춘들이 모여 있는 가스라이트에서 전쟁광을 저격하는 반전가요 Masters of War를 열창한다.

1969년 8월 미국 뉴욕 베델공원에서 사흘 내내 밥 딜런은 ‘노킹 온 헤븐스 도어’, ‘라이크 어 롤링 스톤즈’ 노래를 젊은이들과 함께 부르면서 사회저항운동에 있어 상징적인 뮤지션이 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몇 일 동안 제대로 씻거나 빗질 조차 하지 않은 모습의 밥 딜런은 정확하지 않은 발음과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리듬도 박자도 무대에 올라 갈 때 마다 제멋대로 불렀지만 데뷔 이후 그래미상만 11회 수상했으며, 영화 주제곡으로 골든글로브는 물론 아카데미까지 휩쓸었다. 2008년에는 퓰리처상 공로상을 수상했고 마침내 2016년 80세를 바라 보는 나이에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다.

음악적인 명성과 부를 모두 거머쥔 그의 삶은 완벽해 보였지만 실제로 그가 살아 온 인생은 삼류 드라마 막장과 흡사했다.

여성 편력이 심했던 밥 딜런은 1960년대 저항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주었던 수지에게 1963년 임신 중절 수술을 시키고 새로운 음악적 뮤즈인 조안 바에즈와 함께 활동 하다가 또 다른 뮤즈를 만나 자신의 음악 인생을 위해 헤어진다.

이후 사라 라운즈 클레어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 여러 여자들을 사귀다가 엄청난 금액의 위자료와 소송비용 등으로 재산을 탕진한 밥 딜런은 자신의 곡 600곡 판권을 유니버셜 음반사에 3억을 받고 팔어 버리고 순회공연에 나서서 생활고를 만회하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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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에게 마약을 가르쳐준 장본인이라는 걸 자랑스러워 했던 밥 딜런은 스스로를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이라 지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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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이 스무살이였던 1961년부터 1965년까지 4년의 시간을 담은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 하던 연인 수지와 미국 대중음악사에 흔적을 남긴 음악인들 틈에서 음악에 열정을 쏟아 붓는 팝의 전설의 청춘 시절의 모습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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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로 이 영화의 중심 스토리는 브라운관 시대가 도래 하고 화려한 영상과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음악가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의 시대에서 기타 한 대를 메고 무대에서 라이브 실력을 보여 주었던 진정한 음악 장인들이 활동했던 시절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까지 밥 딜런과 청춘을 함께 했던 세대들은 그가 무대에서 어떤 모습이나 상태로 노래를 불러도 박수를 쳐 주지만 그는 무대에서 가장 성의 없고 재미없는 공연을 하는 가수로도 유명하다.

선약이 있다며 노벨문학상 시상식에도 가지 않았던 밥 딜런은 자신을 지칭하는 저항의 아이콘, 팝의 역사, 노벨 문학상 수상 같은 타이틀이나 이력 조차 무색 할 정도로 그는 원곡의 멜로디를 몹시 변형하거나 발음을 흘려서 부르는 등, '원곡의 감동'을 재현하는 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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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자신을 찾는 게 아니에요.

어떤 것도 찾는 게 아니죠.

인생이란 자신을 창조하는 일입니다."

- 밥 딜런(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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