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미국 미네소타의 시골 마을에서 로버트 앨런 지머맨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영국 시인 딜런 토마스에게서 영향을 받아 본인의 이름에 ‘딜런’이라는 이름을 붙여 개명했다.
1961년 음악에 대한 열정이 들끓어 올랐던 밥 딜런은 자신의 우상인 우디 거스리를 만나기 위해 통기타를 매고 대 도시 뉴욕으로 올라온다.
대공황기 미국 노동자들의 고난과 고통을 함께 하며 그들의 애환을 부른 가수 우디 거스리는 “이 기계는 파시스트를 죽이기 위한 것(This Machine Kills Fascists)”이라는 문구를 기타에 새기고 다녔을 정도로 그의 모든 음악은 정치적이였다.
하지만 우디 거스리를 우상으로 생각했던 밥 딜런의 관심사는 정치적 구호나 사회운동이 아닌 오로지 음악뿐이였다.
밥 딜런을 저항의 아이콘이자 시민 운동에 뛰어들게 만들었던 인물은 그의 첫 사랑 '수지 로톨로'다.
1961년 교회에서 노래를 불렀던 밥 딜런은 수지를 처음 보는 순간 눈을 떼지 못하고 사랑에 빠진다.
이탈리아계 이민자 부모의 영향으로 공산당원으로 활동 했던 수지는 세상 돌아가는 것에 도통 관심이 없었던 밥 딜런을 나라 안 밖으로 요동치던 정치,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해서 그를 시민 운동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1962년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암살과 베트남 전쟁 등 혼란기에 빠진 미국 사회를 웅얼거리듯 읊조리는 창법으로 무대에 등장한 밥 딜런은 1963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핵 전쟁의 먹구름이 밀려 오던 날, 밥 딜런은 기타를 메고 평화 구호를 외치는 청춘들이 모여 있는 가스라이트에서 전쟁광을 저격하는 반전가요 Masters of War를 열창한다.
1969년 8월 미국 뉴욕 베델공원에서 사흘 내내 밥 딜런은 ‘노킹 온 헤븐스 도어’, ‘라이크 어 롤링 스톤즈’ 노래를 젊은이들과 함께 부르면서 사회저항운동에 있어 상징적인 뮤지션이 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몇 일 동안 제대로 씻거나 빗질 조차 하지 않은 모습의 밥 딜런은 정확하지 않은 발음과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리듬도 박자도 무대에 올라 갈 때 마다 제멋대로 불렀지만 데뷔 이후 그래미상만 11회 수상했으며, 영화 주제곡으로 골든글로브는 물론 아카데미까지 휩쓸었다. 2008년에는 퓰리처상 공로상을 수상했고 마침내 2016년 80세를 바라 보는 나이에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다.
음악적인 명성과 부를 모두 거머쥔 그의 삶은 완벽해 보였지만 실제로 그가 살아 온 인생은 삼류 드라마 막장과 흡사했다.
여성 편력이 심했던 밥 딜런은 1960년대 저항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주었던 수지에게 1963년 임신 중절 수술을 시키고 새로운 음악적 뮤즈인 조안 바에즈와 함께 활동 하다가 또 다른 뮤즈를 만나 자신의 음악 인생을 위해 헤어진다.
이후 사라 라운즈 클레어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 여러 여자들을 사귀다가 엄청난 금액의 위자료와 소송비용 등으로 재산을 탕진한 밥 딜런은 자신의 곡 600곡 판권을 유니버셜 음반사에 3억을 받고 팔어 버리고 순회공연에 나서서 생활고를 만회하기를 반복했다.
비틀스에게 마약을 가르쳐준 장본인이라는 걸 자랑스러워 했던 밥 딜런은 스스로를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이라 지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