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 2024 스웨덴 올해의 도서상 수상작
리사 리드센 지음, 손화수 옮김 / 북파머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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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금요일이라고 적혀 있는 책의 첫 장을 열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13시 10분

보는 점심으로 생선 그라탱과 설탕을 많이 넣은 커피를 원했음.

가래를 제거하기 위해 천식약을 흡입하고 식스텐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음.

그는 식스텐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한다는 가족 일원의 말에 자신이 상당히 화를 냈다는 것을 꼭 일지에 적어 놓으라고 내게 부탁했음. 벽난로 상태는 양호함.

-잉리드

몇 시 몇 분이라는 정확한 시간과 '보'라는 환자의 식사 여부와 건강 상태 일지를 적은 '잉리드'는 요양 보호사다.

그녀는 6개월 전부터 89세 남자 '보'라는 환자의 집에 드나들면서 간호 하고 '보'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에게 일지를 적어 보여 주며 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알려주고 있다.

환자를 돌보는 요양 보호사와 아내의 일기 그리고 아들의 시선이 번갈아 교차 하면서 진행 되는 이야기의 중심 인물인 '보'는 자신이 눈을 감기 전 반려견 식스텐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는 아들에게 분노한다.

치매를 앓던 아내가 요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은 '보'는 살아 생전에 아내가 썼던 스카프를 병 속에 넣어두지만 병뚜껑을 열기도 힘들어서 요양보호사에게 부탁해야 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곧 임박했음을 감지 하고 지난 시절 한 때 가족과 행복하게 보냈던 기억을 하나 하나 떠올리기 시작한다.

'나는 스카프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면서 타들어 가듯 아픈 마음을 감은 눈꺼풀 뒤에 숨겼다. 나이가 들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기억 속에는 눈물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

-리사 리드센의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아버지 보는 아들 한스의 꼬마 시절 함께 낚시를 다니며 친구 투레의 오두막에서 셋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지만 아들 한스는 어릴 때부터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다.

남편과 아들 사이에 냉랭한 기류가 흐를 때 마다 아내는 엄마로 아들을 따스하게 품어 주었고 단 한번도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남편을 이해 했다.

아들 한스가 대학에 진학하고 부터 아버지 보는 아들이 말하는 정치, 사회 문제에 관한 어려운 용어를 이해 하지 못했고 세상에 모든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아들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분노의 여파였는지 최근 나를 괴롭히던 감정이 다시 밀려들었다. 가슴 속에서 고개를 든 것은 이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였다.'

보는 천식과 심장약을 복용하고 있어도 친구 투레와 달리 움직이고 외출 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자부 하며 반려견 식스텐을 매일 산책 시키고 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피곤해지고 잠이 쏟아졌고 방금 전 했던 일을 잊어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나날이 기력이 쇠약해진 '보'는 한 여름에도 스웨터를 껴 입거나 반려견 식스텐이 목줄을 채울 때 도망치는 것을 따라 잡기 힘들게 되자 정밀 진찰을 받으러 병원에 간다.

병원에서 보는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의사로 부터 심장 마비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말에 화가 치밀어서 병원을 박차고 나가고 아들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의 불안한 시선을 애써 외면 한다.

보는 수면 중에 소변을 보기에 이르지만 요양원에 가지 않기 위해 부엌 소파에서 자기 시작하고 부지런히 반려견을 산책 시키고 친구를 찾아 가며 일상적인 생활을 이어간다.

결국 '보'는 산책 중에 참지 못하고 옷에 오줌을 싸고 급기야 집으로 돌아와서는 바지 조차 벗기 힘겨운 상태에 이르자 자신에게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실감한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갑자기 오른쪽 허벅지가 묵직해졌다. 안개 낀 듯 흐릿한 시야 속에서 내 다리에 얹은 한스의 손이 보였다. 우리가 얇은 옷차림으로 낚시를 하기 위해 오랫동안 호숫가에 앉아 있을 때면 나도 그의 어깨에 그렇게 손을 올려놓곤 했다. 문득, 우리의 손이 너무나 닮아서 깜짝 놀랐다.

-리사 리드센의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은 작가 리사 리드센이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가 남긴 메모에서 시작 되었다.

손녀인 작가는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 하던 중 요양보호사가 남긴 메모에서 할아버지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의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작가는 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기록과 메모를 정리 하면서 죽음에 이른 한 남자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뼈저리게 느끼며 한 생을 살다 간 남자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던 소년이 제재소에서 일하며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들을 낳고 키우며 생의 한 시절을 보내다 치매를 앓던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홀로 남겨진다.

가족처럼 반려견에게 의지하며 생의 끝을 향해 가고 있는 보는 새 가정을 꾸린 아들에게 태어날 손녀를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89세 보의 일생에서 조금씩, 부분 부분 잃어버리고 놓쳐 버리는 시간의 길이가 행복했던 시간보다 훨씬 더 길었다.

론 뮤익 <피노키오 Pinocchio>(1996), 혼합재료, 84 x 20 x 18cm, The John and Amy Phelan Collection / 사진. ©Anthony d'Offay


장난감 가게 아들로 태어난 소년은 어린 시절부터 손에 잡히는 재료로 인형을 만들었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즐겨 보는 어린이 TV프로그램의 캐릭터 인형을 만들다가 직접 방송국에 자신이 만든 인형을 가져 간다.

그의 재능을 알아 본 제작진은 청년에게 일자리를 제안하고 대학에 진학 하지 않고 일찌감치 영화와 TV 분야에서 마네킹과 소품을 제작하다 영국의 광고 재벌이자 컬렉터 찰스 사치의 눈에 띄어 그가 1997년에 기획한 ‘센세이션’전에 직접 만든 마네킹을 끌고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한다.


론 뮤익 <쇼핑하는 여인 Woman with Shopping>(2013), 혼합재료, 113 × 46 × 30 cm / 사진. © Patrick Gries, 출처.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홈페이지

양 손 가득 묵직한 비닐 봉지를 들은 여자의 커다란 외투 속에 이제 막 목을 가눌 수 있는 아기가 엄마의 얼굴을 쳐다 보고 있지만 피로에 찌든 엄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가와 눈을 마주치 않은 채 다른 곳을 응시 하고 있다.

호주 멜버른 태생의 극사실주의 조각가 론 뮤익(Ron Mueck, 1958~)의 작품은 가까이 다가가면 조작상이 말을 걸거나 불쑥 손을 내밀 것 같이 실제 사람 크기와 너무나도 흡사하게 만들었다.

론 뮤익 <죽은 아버지 Dead Dad>(1996~1997), 혼합재료, 20 x 38 x 102 cm / 사진. © Eva Herzog,

출처. 타데우스 로팍 홈페이지

호주 멜버른에서 장난감 제조업체를 경영했던 론 뮤익의 아버지는 아들의 손에 의해 1996년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 마지막 숨을 거둔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들 론 뮤익은 아버지의 얼굴에 새겨긴 주름과 검버섯을 만들고 한올 한올 흩어진 머리카락과 땀구멍까지 정밀하게 표현해서 자식에게 모든 걸 주고 떠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자신의 <죽은 아버지>를 세상에 공개 했다.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복잡 다단한 삶을 살다 숨결이 다하는 그 마지막 날은 모든 걸 소진해 버린 육신만 남겨진다.

출처: 바티칸 교황청,목관에 안치된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목관에 안치된 모습이 세상에 공개 되었다.

교황의 마지막 유언에 대로 바티칸 내 거처인 산타 마르타의 집 예배당에 있는 목관에 붉은 예복을 입고 머리에는 미트라를 썼고, 손에는 묵주가 들려 있다.

화려한 치장을 한 관이 아닌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목관에 조문객 눈높이보다 아래에 몸을 누인 교황이 선종 뒤 남긴 재산은 100달러 뿐이다.

평생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며 청빈한 삶을 살다 간 교황은 마지막 까지 그의 교황명인 13세기 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빈자의 성인’으로 살다 갔다.

인간의 생이 다한 육신을 마주 할 때면 마지막 내 것으로 가져 갈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죽음 또한 살아보지 못한 삶의 시작이기에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죽음을 인생의 마무리로 받아들인다면 매 순간 삶을 더 소중하고 충실하게 살아 갈 수 있으리라..

희망은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가장 거룩한 선물입니다.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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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5-04-25 1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재작년에 욘 포세의 작품들을 몇 권 읽었었는데, 거기서도 삶과 죽음이 이어져있다는 메시지 같은 걸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scott 님의 글을 통해 그러한 메시지가 한 번 더 각인 된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25-04-25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4-25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친애하는 개자식에게
비르지니 데팡트 지음, 김미정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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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라일리가 13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겪게 되는 혼란과 자기 발견의 이야기가 중심인 '인사이드 아웃2'의 감정 컨트롤 센터에 새로운 감정들이 등장한다.

새롭게 감정컨트롤 센터에 들어 온 불안 , 당황 , 따분 , 부끄러운이 감정들이 센터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던 기쁨이 , 슬픔이 , 버럭이 , 까칠이 , 소심이들과 감정의 충돌이 일어나면서 더 이상 단순한 감정만으로 조절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인간은 하루에도 여러 번 기쁘기도 하다가, 슬픔을 느끼다가 , 당황 하기도 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 어느 순간 불안감에 사로 잡히기도 한다.

시종일관 단 하나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복잡 미묘한 인간의 여러 감정 중에서 픽사의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2는 불안을 정면으로 내세우며 애초에 인간은 단순히 기쁘거나 슬픈 것이 아니라, 여러 감정이 뒤섞여서 궁극적으로 감정의 변화가 행동을 만들어 내면서 성장하고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터넷 익명 게시판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마음껏 감정을 표현 할 수 있는 요즘은 그야말로 '감정'의 시대다.

인터넷 통신망이 없었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나 사적인 모임에서 표출된 감정이 사람들의 입을 통하지 않고는 익명의 사람들이 알지 못했고 정치적 탄압이나 억압적인 권력층에 의해 감정을 억누르고 표출을 자제해야 했던 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광활한 통신망 시대에는 누구나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개인 블로그나 인스타를 통해 경험과 취미, 일상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 하거나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개인적인 생각을 밝히기도 하고 혐오하거나 싫어하며 불편한 것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한 명의 사람이 여러 개의 계정을 만들어서 다양한 자아로 다중적인 일들을 벌일 수 있다.

그러다 어느 날 무심코 올린 사진 한 장에 단 한번도 연락하거나 만난 적이 없는 이들에게 충격적인 메시지를 받게 되는 일이 발생 하기도 한다.

친애하는 개자식에게.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 봤습니다. 어깨에 똥을 싸지르는 비둘기보다 당신이 나은 게 하나라도 있을까요? 역겹고 불쾌하기 짝이 없군요. “왈왈왈, 나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허접한 머저리입니다. 사람들 주목을 받고 싶어 칭얼거리는 개새끼입니다.” SNS에 영광을 돌려야겠네요, 아주 잠시나마 유명세를 누렸을 테니.

-비르지니 데팡트의 <친애하는 개자식에게> 중에서

프랑스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사십대 인기 소설가 오스카 제이야크는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선망해왔던 여배우의 외모를 폄하하는 발언을 별 생각 없이 개인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 여배우에 대한 글을 올려는 지 조차 잊고 살았던 어느 날 오스카는 그 여배우로 부터 <친애하는 개자식에게>라는 답장을 받게 된다.

오스카는 책 출판 홍보를 담당했던 직원에게 미투로 고발 당하고 책 출간이 무산 되어 하루 아침에 그는 SNS에서 '개자식'으로 불리면서 언론의 먹잇감이 되어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물어 뜯기게 된다.

소설가 오스카가 도대체 그 여배우에 대해 어떤 글을 썼길래 <친애하는 개자식에게>라는 답장을 받게 되었을까?

오스카가 한 때 자신의 여신이였던 여배우 레베카를 직접 보고 나서 술잔을 기울이며 개인 SNS에 이런 글을 썼다.

참담함의 기록

파리에서 우연히 레베카 라테를 봤다. 그 배우가 그간 맡아온 캐릭터가 머릿속에 차례차례 소환되어 다시 상영되었다. 위험하고, 치명적이며, 연약하고, 애처롭다가도, 때론 영웅적이기까지 한 여자. 얼마나 숱한 나날을 레베카와 사랑에 빠졌던가. 무수히 많은 사진이. 허다한 집을 거치며, 얼마나 많은 침대 머리맡을 장식했던가. 얼마나 많은 나날을 그 사진을 보며 꿈꾸었던가. 그런데 끝으로 치달은 한 시대의 비극적 은유를 목도한 것이다.

한 때 프랑스 남성들의 이상형이였던 배우 레베카는 전성기 시절에 잡지 표지와 광고계를 평정 했던 스타였지만 오십 줄에 들어 서자 배역이 들어 오지 않아서 커리어에 큰 위기가 불어 닥친다.

레베카는 배우로 한창 잘나갔던 시절에 몰랐던 성차별이나 여성 혐오에 대한 남성들의 시선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고 페미니즘 블로그를 운영하는 도서 홍보 담당자 조에 카타나의 글을 읽으면서 여성들에게 공격적인 백인 남성 블로거들을 물어 뜯기 시작한다.

한 때 동경 했던 미모의 여배우 레베카로 부터 온갖 저주의 말을 주고 받던 오스카는 자신의 도서 홍보 담당자였던 이십대 여성 조에 카타나에게 미투 고발까지 당하자 무결함을 호소하면서 부르주아 계급 여성들이 노동 계급 출신인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익명으로 페미니즘 블로그를 운영 해 왔던 조에는 실명을 밝히고 자신이 운영하는 페미니즘 블로그를 통해 계속해서 여성을 쾌락과 혐오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백인 남성들의 폭로를 이어나간다.

여성과 남성, 청년 세대와 기득권 세대, 노동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 미투 고발자와 미투 가해자 등 전혀 다른 상황과 처지에 놓인 이들의 목소리를 1인칭 시점의 SNS의 서간체 형식으로 가감 없이 담아낸 《친애하는 개자식에게》의 배경은 현 시대 프랑스이지만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층과 세대간의 대립과 갈등의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미디어의 환상적인 카메라와 편집 기술로 인한 비현실적 미의 기준, 부의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 계층간의 갈등과 차별, 노인 혐오와 폄하, 젊은이들에 대한 불신 온라인에서 자행되고 있는 사이버불링, 청년 세대가 겪는 우울과 불안, 마약과 알코올 중독 문제까지 현 시대의 모든 문제들이 용광로 처럼 펄펄 끓어 오른다.

현실감 넘치는 현대 사회 이슈를 폭넓게 담아낸 <친애하는 개자식에게>를 쓴 작가 비르지니 데팡트는 젊은 시절 학대와 성폭력을 당했던 피해자였지만 가족과 지인 그리고 사회로 부터 보호나 치료를 받지 못했다.


1969년 프랑스 낭시에서 태어난 비르지니 데팡트는 사춘기 시절 '여자 아이가 과격한 행동을 보인다'는 이유로 부모에 의해 강제로 정신병원에 감금 당한다.

15살 나이에 정신병원 담당의사로 부터 성적 수치심과 모욕을 당했던 비르지니는 병원을 탈출한다.

그녀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자신이 학교에서 퇴학 당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탈출에 성공했지만 의지 할 곳을 찾지 못하게 되자 무작정 리옹에 가서 닥치는 데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학력도 없고 정신병 이력을 달고 있었던 10대 소녀 비르지니는 어느 가정집 상주 가정부로 일을 하다 그 집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신고하게 되면 다시 병원에 감금 될 것이 두려웠던 비르지니는 식당 과 음반 가게를 전전하다 성 노동자가 된다.

비르지니는 성매매 하는 남성들의 민낯을 경험하고 나서 포르노 영화계 실상을 파헤치기 위해 위장 취업을 해서 익명으로 매체에 기고를 하다 사회 곳곳에서 성폭력을 당하는 저임금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취재를 하며 기자로 활동한다.

1993년 비르지니는 그동안 철저하게 남성들이 감독하고 연출하고 제작 해왔던 포르노그래피 물에 정면으로 대항하기 위해 포르노그래피와 성폭력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장편 소설 <베즈무아>를 발표 하면서 프랑스 문학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장편 소설 <베즈무아>는 영화로 제작 되었지만 프랑스 측에서 과도한 선정성과 폭력성을 이유로 최고 행정 법원에서 배급 중단 행정 명령이 내려지지만 비르지니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검열 반대 운동을 펼쳐서 개봉 시키는데 성공한다.

비르지니는 자신이 당했던 성폭력의 경험을 과감하게 공개 하면서 SNS시대에 나날이 교묘해지고 악랄해진 젠더 간의 차별과 갈등으로 인해 왜곡된 성의식을 갖고 있는 남성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수 많은 여성들에게 성폭력과 차별을 가하고 있는지 사회 전역에 걸쳐 공론화 시키는데 앞장 서고 있다.

개인 데이터를 통째로 뽑아내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셀프 브랜딩(self-branding)’ 해서 사회가 좋아하고 원하고 있는 '나’의 이미지로 설계 할 수 있게 만든 서비스다.

인스타그램, 틱톡, 트위터, 블로그 등 수많은 SNS에 가입한 사람들은 이 세계 속에서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의도적으로 전시해서 스스로를 브랜드처럼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은 각 플랫폼과 그곳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나’의 모습에 맞춰 페르소나를 취사 선택한다.

그렇게 타인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나’의 모습에 맞춘 페로소나를 선택한 개인들은 각자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자신과 특정 성질을 공유하는 집단의 정체성과 자신을 동일시 하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집단의 주류에 편승한다.

극단적인 성향의 커뮤니티들은 계층도, 연령도 모두 제각각인 세대의 집단이지만 자신의 집단에 몰입하고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서 여성이나 성 소수자를 공격하며 그저 무분별한 ‘혐오’로 똘똘 뭉친다.

문제는 이렇게 똘똘 뭉친 커뮤니티들 회원들 중에서 무시와 혐오를 당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이나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 상대적인 박탈감이 원한으로 심화될 경우 이는 곧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표출되어 사회 양극화의 갈등을 조장하고 여론 몰이와 마녀 사냥으로 이어진다.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이 겪고 있는 세대별 차별과 불안, 청년층의 불안과 노년층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전 세계 사람들이 겪고 있을 정도로 현 시대 사람들의 감정에서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불안감이다.

특히 한국은 태어나자 마자 살고 있는 거주지부터 계층이 나눠져서 극성스러운 양육과 교육열로 5살 부터 학원에 다니고 7살 때 부터 대학 입시를 향해 공부 하는 한국인들은 경쟁에서 도태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다.

학교에서는 결석을 하지 않고 성실하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중에서 부모를 따라 해외 여행을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리켜서 '개근 거지'라 부르고 유행 하고 있는 아이템이나 옷으로 패딩 가격과 색깔로 또래집단 내 위계가 형성되어 학교 폭력으로 번지는 사태가 발생 하고 있다.

안정적인 일자리 부족과 불안정한 경제 상황, 소득 양극화, 높은 주택비용, 극심한 사교육 열풍 속에 갈수록 심해지는 경쟁 속에서 입고 있는 '옷과 가방 그리고 자동차'가 신분증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는 '헬 조선'으로 불리고 있다.

장기 침체로 인해 노동 시장은 불안정해 졌고 소비는 위축되어서 불안의 심리가 사람들을 잠식했고, 이 불안감은 SNS전체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사는 것이 고달 퍼지니 사회 형평성과 분배 문제를 둘러싼 계급 갈등과 젠더, 세대, 취향 등을 둘러싼 인정 욕구가 현실에서는 감정 표현을 자제하더라도, 인터넷 익명 게시판과 커뮤니티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마음껏 감정을 분출하고 있다.

프랑스 작가 비르지니 데팡트의 《친애하는 개자식에게》의 시대 배경은 2020년 프랑스다.

다른 국가에 비해 자유와 관용이 넘쳐 날 것 같았던 프랑스는 SNS 서비스가 없던 시절에 자행 되어 왔던 성차별과 성폭력이 2010년 부터 폭발적이게 늘어 나자 가해자 집단이 된 프랑스 남성들의 극우 커뮤니티에서 ‘여성혐오’를 조장하고 계층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여성들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미투 고발자이면서 미투 가해자 그리고 관찰자이기도 했던 비르지니 데팡트는 ‘여성혐오’를 논의의 장 한복판으로 끌고 온 《친애하는 개자식에게》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상처와 차별로 인해 함부로 꺼내 보일 수 없는 불안감을 안고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구조적으로 적대성을 띠는 가혹한 곳이다.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은 백인 남성들이 24시간 상주 하며 먹잇감을 찾아 다니며 공격할 대상을 찾으면 그 사람들의 행동보다 그들의 존재 자체에 낙인을 찍고 성희롱과 조롱, 인종 비하와 사이버 불링을 지나가다 툭 내뱉는 농담처럼 하고 있는 공간이다.

흑인, 아랍인, 아시아인, 극빈층 그리고 성소수자들이 이들의 사이버 불링 대상으로 혐오와 차별을 조장해서 궁극적으로 폭력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자행 하고 있다.

인간이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감정에 따라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며, 사고도 치고,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에도 사로잡히고 한 순간의 감정으로 인해 이전과 전혀 다른 선택을 하거나 감정 때문에 여러 관계나 일을 포기하고 바꾸는 경우도 무척 흔하다.

온갖 계층과 국적의 사람들의 감정의 배출구 역할을 하고 있는 인터넷 익명 게시판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한 인간의 인생을 망가뜨려 버리거나 사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막강해져서 어느 날 누군가가 가해자가 되거나 피해자가 되는 세상이다.

특히 한국은 남성에 의해 자행 되는 여성 혐오적 살해가 전국적으로 분당 13건씩 발생하고 있다.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2022년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2024년 이별 통보한 동갑 여성 살해 사건, 수능 만점자 출신 의대생의 여자 친구 살인 사건까지 데이트폭력, 스토킹, 강력범죄 피해자의 80% 이상이 여성이다.

문제는 이별 후 보복 범죄, 불법 촬영, 온라인 스토킹이 폭력이나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경우가 폭발적이게 증가하고 있어도 강력 범죄 사건이 발생 할 때 마다 초기 대응도 미흡한 것 뿐만 아니라 .스토킹 처벌법, 가정폭력방지법 등의 법적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해도 법적 실효성이 느슨해서 피해자를 국가가 충분히 보호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SNS의 등장으로 가속화된 계층 간 세대간의 갈등이 취업과 결혼, 출산 등 부모 세대가 경험하고 이루어 놓은 것들 보다 더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들어서 현재 대한민국은 불안정과 무기력의 깊은 수렁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다.

'우리가 공유하는 유일한 것이 바로 공통의 적입니다. 그외에 대해서는 우리는 너무 많은 개체를 보유한 인간종이기에 동질적인 집단을 형성 하기 힘듭니다. 적들은 우리를 관찰합니다. 우리를 파악합니다.

뿌리가 같은 우리 저격수 그들이 서로 총질할 때 그들은 즐거워 합니다."

-비르지니 데팡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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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시작은 우주와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연구하는 도구에서 유래 했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의 황하유역에는 해마다 홍수가 범람하여 고대 중국인들은 하늘의 별자리를 관찰 하며 별의 움직임에 따라 한 해 농사를 지었다.

이렇게 고대 중국인들이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하던 돌들은 기원전 2300년 경 중국의 요왕이 아둔하고 게으른 아들의 인격 수양을 위해 흑과 백이 겨루어 집을 많이 짓는 편이 이기는 게임인 바둑을 시작했다.

한반도에 바둑이 전해진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삼국사기'에 고구려 승려 도림이 백제의 개로왕과 바둑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는 도구에서 하나의 놀이 문화 였던 바둑은 17세기 일본에서 막부 정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게임의 룰이 생겼고 오로지 바둑만 두고 사는 직업군인 기사제도와 본인방 같은 가문 대대로 바둑 기사의 계보를 이어가는 바둑 가문이 탄생했다.

일본에서 지역별 종파별 바둑 가문 대결이 시작되면서 전 열도의 대전으로 게임의 룰이 정비 되었다.

바둑의 룰은 간단하다. 반상 위에 찍힌 361개의 점 안에 돌을 놓고 흑과 백이 겨루어 집을 많이 짓는 편이 이기는 게임이다.

한국은 20세기 초까지 흑과 백의 돌을 미리 바둑 판에 배치 하고 시작하는 순장 바둑을 두었지만 해방 후 일본에서 바둑 공부를 하고 돌아 온 조남철 9단이 일본 바둑 룰을 한국에 보급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바둑은 단 한 번에 게임으로 승부가 나지 않는다.

흑의 수로 중단 되는 것이 오래 전부터 지속된 게임의 룰이지만 일본 바둑은 여기에 상수(上手)에 대한 예외를 두고 일단 상대의 수를 봐 두고 다음 수를 다시 바둑이 재계 되는 시기까지 천천히 고심해서 대국이 중단될 때까지 마지막 수를 봉할 수 있는 규칙으로 변형 되어 왔다.

이렇게 자잘한 규칙과 예외, 만일에 대비한 비책까지 바둑의 현대 룰을 확립한 바둑 기사는 일본의 명인이라 불리는 혼인보 슈사이다.

일본의 메이지와 다이쇼, 쇼와 시대에 걸쳐 50년 동안 불패의 기록을 세운 바둑 명인 혼인보 슈사이는 상대 바둑 기사를 선발 하는 데만 일 년 반이 걸릴 정도로 만만치 않은 상대와의 게임에서 궁극의 승자가 되는 바둑을 즐겼다.

대국 조건도 각자 제한 시간 40시간에 각 대국 간격이 나흘 일정에 대국 중에는 줄곧 숙소에 머무르면서 승부가 날 때까지 바둑을 지속했던 명인은 결국 마지막 바둑 경기를 앞두고 숨을 거둔다.


제 21대 혼인보 슈사이(本因坊 秀哉 )명인은 1940년 1월 18일 아침, 아타미에 있는 우로코야 여관에서 죽었다. 세는 나이로 예순 일곱살이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인> 중에서


1938년 6월26일부터 12월4일까지 장장 6개월에 걸쳐 세기의 바둑 대전이 벌어졌다.

14회나 계속된 이 경기는 65세의 바둑의 명인 혼인보 슈사이의 대국 경기로 그는 경기 중반에 병으로 쓰러져서 11월 중순까지 석 달 동안 경기가 중단 되었다가 그가 병원에서 퇴원하자 마자 겨우 제개 되었다.

하지만 50년 간 이어온 '불패의 명인'이라는 기록이 30세의 젊은 신성에게 깨지고 결국 대국이 끝나고 나서 1년 후 1940년 명인은 원래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소설을 쓰지 않는 날이면 항상 바둑판을 펼쳐 놓고 바둑알을 만지작 거리며 바둑판에 흑색과 흰색 기보를 두고 읽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38년 6월부터 12월까지 약 반년 동안 치러진 바둑의 명인 혼인보 슈사이의 마지막 대국을 직접 참관하는 동안 신문에 총 64회의 관전기를 연재하며 일본 열도를 바둑의 열풍으로 몰고 갔을 정도로 바둑 애호가 였다.

일본의 바둑 역사는 약 300여년으로 [명인 名人]이라는 호칭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엔 모든 걸 다 차지할 수 있는 직위일 정도로 바둑 판에서 승자의 자리에 올라가면 막강한 세력을 과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나서 부터 바둑계의 승자인 명인들이 누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명예뿐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명인>에 실존 명인 혼인보 슈사인는 1914년 마지막으로 명인 名人 칭호를 받았던 인물이다.

'명인의 하얀 부채가 얼음물을 얹은 검은색 칠(漆) 쟁반에 비치어 움직이는 고즈넉함. 관전은 나 혼자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인' 중에서

50년 동안 바둑의 명인이였던 혼인보 슈사이는 삼십 년 동안 흑을 쥔 적이 없었다.

그는 이인자가 없는 일인자였고 살아 생전 후진 가운데 8단도 없었다.

동시대 활동 했던 바둑 기사들 중에서 그의 지위에 견줄 자가 없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십 년 동안은 일본 바둑계에서 명인 혼인보 슈사이의 승부를 넘어선 기사도 나타나지 않았고 계승자도 없었다.

흑과 돌의 집짓는 게임을 '도道'의 예술로 끌어 올려 기와 예절을 갈고 닦는 명인 바둑 기사를 탄생 시킨 곳은 일본이였지만 일본의 바둑의 기예를 누른 상대는 한국의 바둑 기사들이였다.

승부의 세계가 원래 그렇다. 아니, 승부를 떠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원래 그렇다.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길 수 있다면 이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반전의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내가 버텼던 이유는 이겨야 한다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아직 이길 기회가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조훈현의 <고수의 생각법> 중에서

한국 바둑의 명인 계보는 한국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9단이 터를 닦기 시작해서 김인 9단- 조훈현 9단 -이창호 9단 그리고 인공지능 알파고를 상대로 1승을 거둔 이세돌에서 현재 2000년생 신진서 9단으로 이어진다.

2019년 1월부터 7년째 세계 1위인 그는 14억 중국의 최고 기사(棋士)들을 줄줄이 무너뜨린 무서운 20대 신진서 9단은 엄청난 인해 전술 전략을 펼치며 만리 장성 같은 바둑 게임 판을 키우고 있는 중국 바둑 기사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상대다.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바둑 기사 다섯 명이 신진서 9단에게 달려 들어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다.

한 해 동안 82국을 소화하는 신진서 9단은 상대가 강할 수록 묘수가 떠오르고 더 강한 상대가 나타날 수록 정신이 집중 되어 강자들을 꺾을 때 마다 자신감이 붙어 마지막 승자 자리에 올라가는 바둑 인간 알파고다.

5일 동안 이어지는 결승 대국이 시작될 때는 신진서 9단은 혼자 다섯 명의 중국 바둑 대표들을 상대 할 때는 게임이 시작되는 오전 10시 40분 부터 저녁 6시간 까지 경기에 임하고 중간 휴식 시간에 식사와 주변 산책을 하며 마지막까지 온전히 바둑판과 혼연 일체가 된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복기를 하고 복기가 끝나면 새로운 상대인 인공지능 바둑을 연구 하고 있다.

2000년 생이 혼자 중국과 일본의 바둑 기사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었던 건 지속적이면서 일률적인 습관 덕분이였다.

신진서 9단의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다.

-오전 9시 기상

-식사 전 기보, 두 개

-오전 11시 전 까지 아침 겸 점심 식사

-인터넷 바둑 공부

-오후 시간 동안 기보/기보/기보

- 오후 3시 쯤 간식과 휴식

-인터넷 바둑(이길 때 까지 게임을 지속한다.)

-저녁 6시 까지 기보/휴식/기보

-늦은 밤 이기면 산책을 나가고 지면 이길 때 까지 기보/기보/기보


이겼다고 믿을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잡념은 교활하다. 이겼다고 생각해 방심하는 순간이 자신이 파고들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임을 알고 있다. 목표가 눈앞이라면 그때야말로 조심해야 한다. 그때가 가장 큰 위기일 수 있다.

-신진서 9단의 <대국> 중에서


박진감 넘치고 실감 나는 3D게임이 넘쳐 나는 시대에 흑과 돌을 만지작 거리며 몇 시간에 걸쳐 반상 위에 찍힌 361개의 점 안에 돌을 올려 놓은 게임은 과거 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진다.

평생 동안 바둑판만 응시한 채 1년 365일 손에서 바둑 알을 쥐고 사는 명인은 바둑판을 벗어난 세상의 온갖 협작과 질투,교묘한 술책이나 속임수, 눈속임에 크게 개의치 않아야 하고 그런 시선과 모함에 휘둘릴 시간도 없을 것이다.

명인의 하루 일과는 바둑 알을 쥐고 바둑판을 바라보며 시작되고 하루의 마지막도 바둑 알을 손에서 내려 놓아야 끝이 나고 한 번 승부가 펼쳐 지면 끝장 날 때까지 승부를 보는 근성으로 인생의 모든 걸 바둑에 건다.

바둑의 세계를 모르는 이들에게 명인의 삶은 이해 불가다.

기껏해야 바둑이고 이기고 지는 승부의 게임이지만 바둑 판 위에 찍힌 361개의 점 안에 돌을 놓고 서로 집을 지으려 다 보면 경계선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이렇게 흑과 백이 맞붙는 과정에서 흑과 돌의 대결은 마치 온갖 처세술이 난무 하는 세상의 축소판 처럼 인간의 모든 희노애락이 바둑 판 위에서 펼쳐지는 오묘한 게임이다.

인생 전체를 바둑판에 온전히 바쳐 버린 명인처럼 읽고 쓰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매진 하는 사람이 있다.

단 두 편의 소설로 일본을 대표하는 주요 문학상을 잇달아 수상한 마쓰나가 K 산조는 1년 365일 설계도를 그리며 집을 지어 올렸던 건축가였다.

주중엔 설계도면과 씨름을 하고 주말이면 배낭을 짊어지고 산행을 했던 마쓰나가 K 산조는 산을 오르고 내리는 동안 일상의 자잘한 것들이 떠올랐고 산에서 내려 와서 등산 하는 동안 느꼈던 여러 상념과 공상들을 종이에 쓰기 시작한다.

주말 마다 손에 쥐고 다녔던 산행 루트가 그려진 지도는 종이 위에서 정교한 플롯으로 짜여 졌다.

작가 마쓰나가 K 산조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주인공 하타의 산행을 통해 무탈하게 별탈 없이 직장 생활을 성실히 하던 3년차 직장인이 어느 날 등산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기 시작하면서 전에는 단 한 번도 시도 한 적 없는 산행을 시작한다.

그는 산을 올라가는 동안 유툽 채널 운영자가 알려주는 길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며 산을 오르게 되고 산행 중에 여러 인물들을 만나며 챗바퀴 같은 인생에도 나름대로의 보람과 행복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베리에이션 루트(variation route). 베리 루트라는 표현도 쓴다고 한다. 평범한 등산로가 아닌 길, 요컨대 파선(破線) 루트라 불리는 고난도의 숙련자용 루트나 폐지된 길을 나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명확한 정의는 없지 않으려나. 좀 진귀한 루트를 두고 베리에이션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또는 정해진 루트가 아니라서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없는 계곡이나 능선을 따라가거나, 지형도를 보고 올라갈 수 있을 법한 곳 또는 오히려 못 올라갈 법한 곳을 나아가는 등 루트를 완전히 무시하고 산행 하는―”

-마쓰나가 K 산조의 <베리에이션 루트> 중에서

산을 오르고 내리는 과정도 바둑 판에 흑과 돌을 쌓는 과정도 정해진 '길' 법칙이 없다.

두 발을 땅에 딛고 두 손을 바둑 판에 내밀며 한 발 한 발 , 한 수 한 수 앞으로 나아가면서 포기 하지 않는 노력과 근성으로 버텨 내고 감내 하고 이겨내면서 자신 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작가 마쓰나가 K 산조는 산행을 하면서 자신만의 루트를 개척 했고 산에서 내려와 자신만의 스토리로 종이 위에 활자를 채워서 한 권의 책으로 완성 했다.

산을 오르는 것도 바둑 게임에서 이기는 것도 쉽지 않고 한 권의 이야기를 완성 하는 것도 쉽지 않다.

2024년 2월 1일 부터 쓰기 시작한 장편 역사 소설 <굿바이, 부다페스트>는 매회 1만자를 넘나들며 2025년 1부 50회를 지나서 3월 27일 61회의 고지를 찍었다.

<굿바이, 부다페스트>

https://tobe.aladin.co.kr/s/9373

1회부터 60회까지를 발걸음 수로 계산을 해보면 일반 성인 한국인의 보폭은 60~80cm 정도로, 1,000걸음은 약 1km 정도다.

큰 걸음으로 만보를 걸으면 약 6~8km를 걷게 되고 만보 걸음을 채우려면 2시간 정도 소요 된다.

1년을 넘겨서 61회를 썼으니 61 만보를 두 발로 걸은 것과 비교 할 수 있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AI 시대와 디지털 혁명이 가속화되는 오늘날, 목표 또한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목표를 정하면 마치 만점짜리 과녁처럼 그것에만 집중하지만, 기술과 사회는 끊임없이 변한다. 오늘의 기준으로 설정한 목표가 내일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장기적인 목표라면 빠르게 발전하는 AI 기술, 데이터 경제, 디지털 트렌드의 변화에 맞춰 유연하게 조정해야 한다.

-이라야의 AI 시대, 불안한 오늘을 살아가는 너에게 중에서



인공지능이 바둑도 두고 소설도 쓰고 그리고 뚜벅 뚜벅 만리 장성도 지치지 않고 걸어 갈 수 있는 시대에 창작법을 어디에서도 배운 적 없는 나는 홀로 고군분투 하며 100회를 예정하고 장편 역사 소설 <굿바이, 부다페스트>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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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 넉 장 반 타임머신 블루스 다다미 넉 장 반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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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대학원 재학 당시에 쓴 <태양의 탑>으로 일본 판타지 노벨대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 데뷔한 모리미 도미 히코는 3년 만에 발표한 작품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로 나오키상 후보와 서점 대상 2위에 오르며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수상하며 장르 소설계에 돌풍을 일으킨다.

독자들은 교토 태생의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의 예스러운 단어와 독특한 대화체에 열광했고 교토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현실과 환상의 세계가 오묘하게 조합된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그의 작품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며 소설을 넘어 작가 특유의 '의고체' 화법의 열풍을 몰고 왔다.

주요 문학상과 독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한 몸에 받은 작가 모리미 도미 히코가 2011년에 발표한 <다다미 넉장 반 신화 대계>는 동아리 활동도 연애도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한 채 자책만 하는 대학교 3학년생인 주인공 '나'가 다다미 넉장 반 짜리 방구석에서 . 만약…이라는 가정하에 입학 때로 돌아가 여러 가정을 하기 시작한다.

작품의 전개는 주인공이 '만약'이라는 망상의 시간을 과거와 현재. 미래 시간대를 차례대로 보여주다가 주인공의 삶에 불쑥 불쑥 끼어드는 현실 속의 주변 인물들 때문에 '만약'이였던 망상이 현실이 되어 버리면서 전개되는 모험담을 펼쳐 보인다.

'현실에 꿈만 같은 일이 벌어지는' 환상적 리얼리즘의 세계관을 보여준 <다다미 넉장 반 신화 대계>은 출간 즉시 일본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되었다.

작가는 <다다미 넉장 반 신화 대계>가 애니메이션이나 영상물로 제작되는 것을 전혀 염두해 두지 않고 썼지만 이 작품이 다양한 콘텐츠로 제작되며 흥행에 성공하자 16년 만에 성공으로 극작가 우에다 마코토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속편 《다다미 넉 장 반 타임머신 블루스》를 완성했다.

출간 즉시 순식간에 10만 부가 판매되었고 속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디즈니 플러스에서 방영되었다.

외전이자 속편 격인 작품《다다미 넉 장 반 타임머신 블루스》는 전작에 등장했던 교토 대학 3학년에 재학중인 주인공이 다시 등장한다.

불지옥과 같은 교토의 여름을 겨우 견디게 해준 교토대학 기숙사의 유일한 에어컨을 켤 수 없게 되면서 부터 주인공에게 황당한 일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대학 생활을 엉망 징찬으로 만든 친구 ‘오즈’가 에어컨의 리모콘을 고장 냈다는 걸 알아차린 주인공이 리모콘을 수리 하려던 중 25년 후의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찾아왔다는 한 남자가 나타난다.

주인공은 이 타임머신을 이용해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고장 나기 전의 리모콘을 가져올 수 있다는 엉뚱한 계획을 세운다.

드디어 주인공은 시간여행에 나서지만 뜻밖에도 예상을 벗어나는 변수의 연속으로 그의 계획은 꼬여 버리게 되고 급기야 세상의 궤멸을 눈앞에 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전작 <다다미 넉장 반 신화 대계>에서 작가는 “만약 신입생 동아리 모집에서 주인공이 다른 동아리에 들어갔다면, 대학 생활은 어떻게 달라졌겠는가”라는 설정을 속편으로 연장 시켜서 시간의 루프(반복)와 멀티버스(평행세계)의 요소를 적용시켜 작가 특유의 독특한 판타지 세계관을 펼쳐 보였다.

교토의 허름한 하숙집의 다다미 넉 장 반크기의 방에서 시작된 망상이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간을 오고 가는 공상과학과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이 작품은 천편일률적인 이(異)세계물 스토리가 쏟아지는 웹툰과 웹소설계와의 경쟁에서도 압도적 우위를 차지 할 정도로 입체적인 스토리를 탄탄하게 갖춘 작품이다.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만의 고유 대명사 같은 스토리가 된 <다다미 넉장 반>은 한 작품 안에서 피어오르는 청춘 남녀들의 로맨스, 공상과학과 판타지적 요소 그리고 작품의 후반부에 주인공들이 던지는 철학적 메시지가 매우 자연스럽게 구현되어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제한 없는 상상력’으로 독자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채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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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 다다미 넉 장 반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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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일반 가정 주택이나 료칸 바닥에 깔려 있는 다다미는 일본 전통 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닥재이면서 다다미 개수로 방의 크기를 재는 척도로 사용 된다.


볏짚을 압축해서 단단히 묶은 코어로 구성된 다다미는 각 지역에 자생하는 볏짚의 색과 크기도 다르고 기후에 따라 지어지는 건축 양식도 다르기 때문에 지역 별 다다미 치수도 제각각이다.

다다미 1장(조)의 크기는 약 180cm×90cm,로 대략 1.62제곱미터에 달하는데 지역에 따라 다다미의 치수가 달라서 평수를 재는 척도도 달라진다.

수도 도쿄가 있는 관동 지방의 표준 다다미 크기는 전 열도에서 가장 작은 176cm x 88cm 치수가 기준이다.

794년부터 1869년까지 일본 수도였던 관서 지방의 최대 도시 교토는 땅값이 비싸고 협소한 주택인 많은 도쿄에 비해 거주지 용 가옥 규모가 커서 다다미 한 장 크기는 191cm x 95.5cm다.

관서 지역의 가옥을 세울 때 기둥은 다다미 크기에 따라 배치 하고 관동 지방은 기둥 사이의 거리를 기준으로 다다미를 배치 한다.

일반적으로 관동지역의 일반 성인 1명 기준의 방 크기는 다다미 넉 장 반이고 번화가나 중심부로 갈수록 이 다다미 장수는 줄어 들고 방의 크기도 협소해진다.

반면에 관서 지역의 평균 방 크기는 다다미 8장이여서 관서 지역의 평균 크기인 다다미 넉 장 반은 이 지역에서 가난의 상징이다.

가난의 상징인 다다미 넉 장 반에서 온갖 기상 천외한 망상을 하는 구제 불능의 청춘이 있다.

대학 3학년 봄 까지 이 년간, 실익 있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노라고 단언해두련다. 이성과의 건전한 교제, 학업 정진, 육체 단련등 사회에 유익한 인재가 되기 위한 포석은 쏙쏙 빼버리고 이성으로부터의 고립, 학업 방기, 육체의 쇠약화 등 깔지 않아도 되는 포석만 족족 골라 깔아댄 것인 어인 까닭인가.

책임자를 추궁할 필요가 있다.

책임자는 어디 있나.

-모리미 도미히코의 '다다미 넉장 반 신화 대계 '중에서

다다미 넉 장 반 크기의 자취방에 틀어박힌 채 의미 있는 대학 생활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대학 3학년생인 '나'는 이 모든 것을 친구 오즈의 탓으로 돌려 버린다.

대학에 갓 입학 했을 때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 오즈는 야채를 먹지 않고 오로지 즉석 식품만 먹어 대는 괴짜로 주인공은 만일 1학년 때 다른 동아리를 가입해서 오즈를 만나지 않았다면 꿈 같은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를 구가할 수 있었다는 망상을 하기 시작한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 없이 대학 내 영화 동아리 "계"에서 괴짜 친구와 그에 못지 않는 기이한 선배들과 교류 하면서 찬란할 것만 같았던 청춘의 빛은 오묘한 색을 띄게 되고 탄탄 대로 같았던 인생은 우연곡절 같은 사건을 겪게 되면서 기상천외한 경험을 두루 겪게 된다.

대학 내에서 역사가 그리 길지 않는 영화 동아리 "계'의 멤버는 30명 정도로 이 동아리에서 처음 제작한 영화는 2차 세계 대전 이전 부터 계속 되어온 유서 깊은 장난 대결을 계승한 두 남자가 지력과 체력을 다할 때까지 자존심 대결을 펼치다는 황당 무계한 스토리의 영화였다.

상영회에서 웃는 사람은 단 한 명, 그 사람은 바로 이 황당무계한 영화를 제작한 동아리 멤버였다.

두 번째로 제작한 영화는 <리어 왕>으로 남자 배역에 너무 많은 공을 들여서 여성 관객에게 야유 소리와 항의를 들었던 망작이였다.

세 번째 작품은 대학 생활 내내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고 자조 하는 주인공 '나'와 그의 엉뚱한 친구 오즈와 함께 제작하는 다다미 넉장 반이라는 영화다.

다다미 넉 장 반에서 살던 남자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미로 안에 갇혀서 그곳을 탈출하는 여정을 담겠다는 시놉시스를 만들자 동기들과 선배들로 부터 황당무계하다며 무시 당한다.

대놓고 면전에서 거절과 무시를 당한 주인공은 파 소스를 얻은 소 혀를 맛있게 굽는 가게가 있다는 친구 오즈의 손에 이끌려 교토 대학가 밤 거리를 쏘다닌다.

온갖 냄새와 사람들로 들끓는 밤 거리를 쏘다니던 나는 고양이로 국물을 낸다는 고양이 라면가게에 들어가 어딘지 신비로우면서도 수상쩍은 가모타게 쓰누미노카미라는 사람을 만난다.

기이한 사람과 기이한 대화를 나누다 술에 취한 나는 온갖 망상을 풍선처럼 불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친구 오즈가 사라진다.

오즈를 찾아 거리로 나온 주인공은 술 기운이 남은 채 새벽녘에 학교에 가서 새로 가입한 동아리 신입들의 면접 보는 자리에 나간다.

4월부터 5월까지 열리는 봄 꽃 축제에 상영할 영화를 제작하느라 동아리 방과 캠퍼스 곳곳에서 노숙을 하며 지내던 주인공은 이따금씩 방으로 돌아 올 때마다 동아리 '계'를 선택 했다는 후회감에 몸부림친다.

자전거를 타고 강둑을 따라 숲 길을 달리다가 마주치는 괴짜들은 신묘한 기운이 가득한 신사에서 튀어나온 기인 같은 인물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동아리 '계'에서 오랫동안 독재자로 군림한 선배,동기들도 선배들도 두려워 하는 동아리 회원, 본인 스스로 언제 대학에 입학 했는지 정확한 년를 기억하지 못하고 학내 교수들 보다 연식이 높은 동아리계에 사부, 알콜 도수가 미약한 술과 벽돌 크기의 카스테라를 들고 다다미 넉장 반 크기의 방에 불쑥 나타나는 괴짜 이웃들이 총 충돌하는 모리미 도미히코의 <다다미 넉 장 반>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지만 현실의 고통과 빈궁함도 망상으로 연결 시키는 괴짜들이다.

주인공 '나'가 망상을 펼치는 협소한 크기의 다다미 넉 장 반에 찾아 오는 괴짜들은 마치 해가 지고 나면 활동을 시작하는 신사의 신령들과 혼령들처럼 각자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암담한 현실에서 고군분투하는 청춘들 앞 길을 열어 준다.

수수께끼 같은 게임에 뛰어들어 결투 끝에 후계자 자리에 올라간 주인공은 어쩌다 보니 이 세계가 아닌 저 세계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며 자칭 '자학적 대리 전쟁'에 휘말리게 되자 동아리 '계'에 가입 하게 만든 친구 오즈를 원망한다.

엉뚱하면서 천하태평한 친구 오즈는 스승이 실종 되고 얼떨결에 스승의 대리인이 된 주인공이 '자학적 대리 전쟁터'에서 친구의 헛발질을 천진난만한 얼굴로 지켜 보다 다리에서 추락해서 병원에 실려간다.

다다미 넉 장 반짜리 방안에서 피어 오른 원망과 망상은 바로 옆 방에 미녀가 새로 이사 오면서 일 순간 꺼져 버리고 착실하게 편지를 쓰며 빨래방에서 도난 당한 속옷을 찾아 주는 의인이 된다.

대학 시절의 끝자락에 선 주인공은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 놓지 못한 채 취직에 대비해서 영어 학원에 등록하고 어딘지 모르게 대단해 보이는 인물이나 화려했던 과거를 갖고 있는 이들을 스승 삼아 사회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한다.

기이한 스승을 만나 기이한 싸움에 휘말리고 괴짜 친구들과 선배들 때문에 탄탄한 성공 대로가 아닌 신들의 무덤이 있는 신사나 축제가 열리는 강가를 배회 하며 청춘의 시간을 허비 하면서도 다다미 넉장 반짜리 방으로 돌아 오면 마음껏 책을 읽고 카스테라를 베어 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 버린다.

늘 최선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던 주인공 '나'는 그 선택의 결과가 실패 하거나 최악으로 치닫게 되자 자신의 선택을 한탄하며 다다미 넉 장 반을 나와 교토 시내 곳곳을 돌아 다니며 '만약에..'라는 말을 시종일관 내뱉고 다닌다.

청춘의 판타지물, 망상계의 신의 손인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는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청춘들이 기기묘묘한 행동을 일삼으면서도 고상한 교토 화법을 구사하며 현실을 벗어난 망상의 세상에서 허우적 거리는 모습을 유쾌하게 그려내어 일본 독자들에게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다.

1979년 생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가 생각하는 대학 캠퍼스를 누비는 청춘의 모습은 몸 하나 누울 수 있는 다다미 넉 장 반 크기의 방에 살며 이성과의 건전한 교제, 학업 정진, 육체 단련과 같은 사회에 유익한 인재가 되기 위해 거듭 노력하며 전력 질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이런 청춘들의 모습은 망상을 너머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시대 청춘들은 대학 진학 후 학점 관리는 기본이고 학회, 대외 활동 등에 참여하며 입사 지원칸에 채워 넣을 스펙을 치열하게 준비해야 한다.

동아리도 취직에 유리한 동아리로 가입하고 인턴십도 능력을 키우고 스펙을 쌓을 수 있는 곳을 열심히 찾고 재학 중에 여러 개의 자격증을 따고 해외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1학기 또는 1년 동안 해외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에 매진한다.

이렇게 고군 분투 하며 청춘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도 입사 지원서를 내는 기업으로부터 정확한 사유도 듣지 못한 채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아빠와 엄마 찬스, 조부모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청춘들이 불안한 계약직에서 최저 임금을 받거나 졸업을 미루고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동안 정치인이나 고위층 자녀들은 1명 모집하는 꿀 보직에 지원해서 눈 깜짝 할 사이에 부모로 부터 직업 세습을 받는다.

컴퓨터나 제품 사양(specification)의 줄임말인 스펙은 취직을 해도 끝이 나지 않는다.

승진에 도움이 되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퇴근하고도, 주말에도 시험을 준비하거나 더 나은 직장으로 이직 하기 위해 대학원 시험을 준비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연애와 결혼을 위해서도 스펙이 필요할 정도로 스펙 쌓기는 죽을 때까지 끝이 나지 않는다.

기회 조차 잡지 못한 청춘들이 취업을 포기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 사회는 노후 걱정 없는 급여를 제공하는 일자리 수 조차 많지 않아 중 장년들도 암담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다.

청년을 위한 나라! 노후 걱정 없는 중장년층을 위해 연금을 개혁 한다고 외치는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사는 기생충들에게 스펙 대신 짱돌을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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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5-03-28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다미 사이즈가 지방마다 다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