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섬은 보자마자 방금 그녀가 드러낸 유약함은 금세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다시 몸을 바로 세웠고 황막함 속에서도 꿋꿋했다. 그녀 얼굴의 표정은 영원히 그와 함께 남을 터였다.'
-헨리 제임스의 '보스턴 사람들' 중에서
미시시피 출신의 변호사로 남북전쟁에 참전한 보수주의자인 베이질 랜섬은 자신의 먼 친척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 올리브 챈슬러의 초대를 받아 보스턴에 온다.
그는 이곳에서 여성의 고난에 대해 연설 하는 보스턴 시 캠브리지의 돌팔이 의사의 연약하면서 매혹적인 노예 폐지론을 주장하는 딸 버리나 타란트에게 한눈에 반한다.
버리나에게 반한 것은 랜섬만이 아니었다.
올리브 챈슬러 역시 '새로운 사상'과 비전을 보여주는 버리나의 말과 행동에 홀려버린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중심축은 여성 참정권 운동이 벌어졌던 19세기 보스턴을 배경으로 세 남녀의 삼각관계 속에서 야기되는 충돌과 갈등에 관한 이야기 이지만 서사 전체를 움직이는 건 남북전쟁 승리로 기세 등등한 북부인들과 굴욕적으로 패배한 남부인들 사이에 극한의 대립 속에서 여성과 남성의 가치관과 사상의 충돌,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며 사회 개혁을 주장하는 진보주의자들과 변혁의 조류와 가치관의 변화 속에서 굳건하게 자신들이 살아 왔던 방식을 고집하는 보수주의자들의 끝도 없이 밀고 당기는 긴장감이다.
1843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헨리 제임스의 가문 사람들은 끊임없이 전 세계를 유랑하며 새로운 시대의 사상과 조류를 쫓았던 사람들로 그의 아버지 헨리 1세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시대의 변혁을 위한 사회 개혁과 새로운 사상을 불어 넣어 주었다.
헨리 1세는 보스턴의 보수주의자들 틈에서 가장 먼저 노예 해방을 주장하며 노예들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모금 운동을 시작했고 흑인들이 학교를 다닐 수 있는 학교 설립과 당시에는 존재 하지 않았던 남녀 공학 학제를 추진했다.
헨리 제임스의 형들 모두 남북 전쟁 당시 군에 입대해서 최초의 흑인 연대를 지휘한 로버트 굴드 쇼 연대장 부관으로 군복무를 했지만 심각한 중상으로 겨우 목숨을 구하고 살아 돌아 와 아버지의 지원으로 플로리다 주의 농장을 구입했다.
큰 아들은 백인 주인의 악랄한 폭력으로 도망간 노예들을 농장에 고용해서 미국 남부에서 처음으로 품삯을 지급했지만 경영능력이 미숙해서 사업에 실패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쟁에 패배한 남부인들은 여전히 노예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불법으로 노예들을 감금하고 노동을 시켰던 시대에 헨리 제임스 가문은 온갖 협박에 굴하지 않고 용감 하게도 노예들이 미국 사회에 정착 해서 인간 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행동으로 실천했다.
시대 변혁의 중심에 있었던 제임스 가문 사람들은 심리와 철학 사상 뿐만 아니라 연금술과 심령술에도 심취해서 평생 동안 강신술을 신봉하며 채식 식단을 죽기 전까지 고집했을 정도로 양면성을 보였다.
제임스 가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냉철한 지성과 현실주의적 비관론자인 막내 헨리 제임스는 자신의 가문 사람들을 가장 뻔뻔하고 공허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1913년 일흔 살 생일을 2주 앞둔 헨리 제임스는 자신의 형수이자 일기 작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앨리스 제임스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사실, 앉아서 잘 생각해 보면 케임브리지의 이상함은 그 메마른 황량함으로 요약되는 것 같군.'
헨리 제임스가 살았던 시대의 미국 땅은 지적으로 메말라 있었고 마음은 공허 할 정도로 황량해서 온갖 새로운 사상의 조류에 휩쓸리며 세련된 외모와 좌중을 휘어 잡는 연설가들의 연설장을 따라다니며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열광하며 이들의 세력에 합류해서 여론 몰이로 정치적 선동에 앞장섰던 언론들이 쓰레기 같은 말들을 쏟아 냈던 시대였다.
헨리 제임스는 <보스턴 사람들> 이라는 작품에서 수도 워싱턴이 세워지기 이전에 미국 땅에 가장 먼저 둥지를 튼 보수주의자들의 정착지였던 뉴잉글랜드의 <보스턴> 지역을 중심으로 시대의 변화를 몰고 오는 사상이 어떻게 출판과 연설로 수익을 벌어 들여 그럴듯하게 보이는 이미지와 상품으로 맞바꿔서 오로지 신문에 실리는 것이 행복한 삶, 안정된 미래를 보장 할 수 있는지 자신이 창조한 인물인 진보 사상가 올리브의 입과 버리나의 행동 그리고 이들의 사상을 글로 써서 이윤을 챙기는 랜섬의 모습을 주도 면밀하게 탐구 했다.
헨리 제임스는 여성의 참정권이나 자유가 없었던 시대에 페미니즘 사상과 신분 해방, 물질 만능주의를 추구 하는 자본주의 사상을 <보스턴 사람들>을 통해 왜곡된 말과 사상이 인간의 현실을 어떻게 어지럽히고 착취하는지 이 연설자에게서 저 연설자로 떠다니며 구름 같이 모여든 대중의 시선에서 터져 나오는 죽은 구호 같은 메아리가 어떻게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뒤흔들어서 사회가 진보 했는지 당대 넘쳐 났던 거짓 사상가들과 선동가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펼쳐 보인다.
'랜섬은 북적거리는 찰나에도 환각을 보았다. 가시처럼 수많은 칼에 찔리거나 섬뜩한 불길에 휩싸여 그때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면, 그녀 답게 , 여주인공 답게, 일말의 전율도 없이 달려나가 죽음을 맞았을 거라고.'
헨리 제임스의 <보스턴 사람들>은 출판 당시에도 인기가 없었고 세기를 훌쩍 넘기고도 판매량이 치솟았던 적은 없었다.
출간 당시 이 작품에 대한 여러 혹평이 쏟아졌지만 헨리 제임스는 기성의 관습과 고루한 사상을 고집하며 현란한 혀와 펜을 움직이는 평론가들의 비판에 어떤 상처도 받지 않고 꾸준히 자신이 추구하는 사상과 철학을 담은 소설과 평론을 썼다.
그의 희곡 작품 출간을 줄기차게 거절했던 어느 예술 협회 위원회는 말년에 접어든 헨리 제임스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사람들은 귀하가 쓴 예술 작품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책을 통해 실질적인 조언과 도움을 얻기를 바랄 뿐이지 귀하의 작품을 읽고 종교적, 정치적, 철학적 신념까지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니 귀하께서는 피상적이고 오도 할 가능성이 높은 글은 더 이상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편지를 받은 헨리 제임스는 답장에 이렇게 썼다.
'나는 삶과 문학에 대한 관점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우리 문학의 형태가 훌륭해지는 건, 바로 그 범위와 다양성, 가소성과 거침없음, 개인적 행위자의 진지하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경험을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믿을 뿐입니다. 삶을 만들고 흥미를 만들고 중요성을 만들어서 우리가 고려하고 적용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술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힘과 아름다움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고 인간의 삶과 사상을 확장 시킬 수 있는 건 소설이 유일합니다.'
-헨리 제임스
1분 안팎의 짧게 편집 된 '숏폼' 영상의 미끼성 전략에 현혹되어 다양한 콘텐츠를 더 보고 싶은 욕망을 건드리는 자극적인 영상이 대세인 시대에 700페이지 분량의 책을 몇 날 몇 일 씩 읽는 이들이 드물다.
국내 한 조사에 따르면, 1인당 숏폼 평균 시청 시간이 월평균 46시간 29분으로 조사 결과 4명 가운데 3명이 숏폼을 보고 있고, 시청 시간이 늘고 있다고 답한 경우도 응답자의 30%에 달했다.
이 조사 결과가 사실이라면 사람들은 무료한 시간을 보낼 때도 우울해지고 힘들 때도 잠들기 전에도 출 퇴근 길에도 수시로 숏폼 영상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TV 채널을 1분마다 계속 돌리는 것처럼 자극적인 영상 콘텐츠가 무궁 무진한 숏폼에 중독되면 말과 행동에도 깊은 영향을 끼쳐서 영상을 보지 않으면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은 상태가 될 수 있다.
'신문에 실리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며 까다로운 사람들이나 그 특권에 따라붙는 단서를 따진다는 믿음이었다. 이 천진 난만한 시대의 아들들에게 인간과 예술가 사이의 모든 구분은 이미 존재 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작가는 사적이었고 인간은 신문팔이 소년을 위한 먹이였고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참견할 문제 였다.'
-헨리 제임스의 <보스턴 사람들> 중에서
2024년 누군가 <서울 사람들> 이라는 소설을 쓴다면 어떤 인물들이 등장하게 될까?
4월 총선거를 앞둔 현재 드라마,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한 현실이 우리 눈 앞에서 실시간 벌어지고 있다.
모호하고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정치적 구호와 선전, 선동 그리고 국민의 삶을 볼모로 파업과 투쟁을 일삼는 단체들
시대가 바뀌고 기술이 진보하고 살고 있는 인종도 사람도 바뀌어도 결코 바뀌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는 대비되는 인간의 운명을 생각하며 이를 약간 갈았다. 이 폭신한 여성적 둥지에 앉아 있자니 자기는 집도 없고 잘 먹지도 못한 느낌이 들었다.'
암담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태어난 이상 희망을 져버릴 수 없기에 몇 세기 전의 지식인들이 쓴 책들을 읽으며 말의 홍수, 영상의 시대에 새로운 통찰력을 가져다 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