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카프카가 넘사벽이었다. 어렵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다 몇 년 전에 카프카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성>, <실종>, <소송> 등 장편들을 읽으면서 왜 이제야 읽었는지 후회했다. 대학원 조교를 2년 했는데 카프카 덕분에 버텼다. 교수 연구실과 대학 본부를 누비면서 <성>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건물과 건물, 인물과 인물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고, 그들 사이의 갈등과 알력은 더더욱 논리적이지 않았기에 카프카 주인공의 당혹스러움이 훅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하마터면 카프카를 신으로 섬길 뻔했다. 조르주 아감벤, 발터 벤야민 등 전공서적을 읽을 때도 카프카는 계속 소환되었다. 특히 단편과 손바닥소설이 많이 소환되었는데 큰맘 먹고 단편 전집을 질렀다. 그리고 나서 읽지 않았다. 1일1카프카는 아니더라도 카프카의 단편을 읽고 글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작품이 <국도의 아이들>이다. 

카프카 장편(손바닥소설) <국도의 아이들>을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된다. 카프카의 텍스트는 알 수 없는 엄청난 힘에 짓눌린 자를 주인공 또는 화자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두운 세계의 소년 백석"을 떠올린다.백석 시인의 유년 세계는 빛으로 짜인 옷이라면, 카프카의 유년 세계는 어둠으로 짜인 옷이다. 카프카의 인물들은 항상 무언가의 통제 안에 있다는 점에서 어린이의 확장에 불과하다.


국도의 아이들은 어떻게 놀까? 나는 그림책 <지름길>이 생각났다. 지름길의 아이들은 집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기차길을 지름길로 택한 아이들이 굉음을 내고 달려오는 기차의 실체를 보고 깜짝 놀라서 그 비밀을 영원히 간직한다는 이야기다. 


국도의 아이들을 보면서 지름길의 아이들이 생각났던 까닭은 철저히 타자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와 사람을 다루기 때문이다. <국도의 아이들>은 국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무관하게 살아가고 논다. 그들은 결코 주인공이 되는 일이 없다. 완벽하게 위계적인 사회에서 어린이들은 곤충이나 애완동물과 비슷한 위치의 피라미드 층에 사는 존재일 뿐이다. 어린이들의 삶은 어쨌거나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환경 안에서 둘레를 치지만, 지금까지 어린이를 보는 시선은 달라진 게 거의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린이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고 서로 긴밀히 공유한다는 점이다. 어느새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은 대부분 파악이 되었다. 


우리가 아이들을 어떤 방식으로 가르치든 우리는 그 아이들을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때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표정이다. 화가 난 표정으로 모든 것을 부서버리는 아이들의 표정을 만날 확률은 최소 90%는 된다고 생각한다. 이 확률을 49%로 줄이는 것이 나의 "불가능한 목표"다.


바보들은 피곤해지지도 않는다고?

- 바보들이 어떻게 피곤해질 수 있겠니?

카프카, <국도의 아이들> 서로간의 대화


'아이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카프카의 공간'이다. '국도'라는 공간이 명시적으로 표현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소설적 공간은 '무대'와 같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설가에게 공간이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카프카에게는 공간이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푸코의 '헤테로토피아'개념으로 <국도의 아이들>을 해석한 논문도 있던데, '다른, 낯선, 다양한, 혼종된'이라는 의미를 가진 hetero와 장소라는 의미의 topos/topia의 합성어인 헤테로토피아 개념을 가지고 푸코는 시간과는 달리 여전히 신성화에 묶여 있는 근대적 장소의 폐쇄성을 비판한다. 공간에 대한 민감성을 가지고 카프카 소설을 읽는다면 하나의 재미를 추가할 수 있다. 예컨대 <성>의 경우 '성'이라는 공간에 접근하기 위해서 주인공이 끊임없이 이동하는데 성과 주인공의 거리는 결코 가까워지지 않는다. 공간은 권력이 반영된 장소이므로 위계질서가 완성된 카프카의 소설 사회에서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물들은 끊임없이 공간을 넘보고, 거기서 수많은 좌절과 몰락이 만들어진다. 위에 언급한 마지막 대화는 두 아이가 국도를 타면 갈 수 있는 남쪽의 도시에 대한 소문을 비평한 것이다. "생각 좀 해봐!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잠을 자지 않는다!"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를 '잠을 자지 않는다'고 상징한 것이다. 국도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것이다. 


<국도의 아이들>이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길'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추가했다는 것이다. 왜 지방도가 아니라 국도인가? 먼저 국가권력을 생각할 수 있다. 공간과 공간은 길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길은 공간에게 명령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길은 명령권자가 아니다. 어떤 공간에 거주하는 '갑'이 최종 명령권자라고 할 수 있지만, 그건 큰 의미가 없다. 명령을 받은 공간에서 그 내용물을 길 앞에 내놓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통이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수단에서 종국에는 공간의 지배자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길은 문고리 권력이지만, 문고리 권력이야말로 절대 권력이다. 카프카 소설의 절대 권력자는 '문고리 권력'이자 '문지기'인데, 감춰진 권력은 주인공들과 인물들이 볼 수 없고 그들의 '하인'만이 권력을 대표한다. <성>에서 하인은 목수에게 딸과 잠자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목수는 하인의 명령을 어긴 죄로 그 사회에서 매도당해 생계의 극한에 내몰린다. 농부의 딸은 스스로 하인에게 가서 자신의 몸을 허락하는데, 하인들은 비로소 농부에게 내려진 사회적 형벌을 취하한다. 내가 1일1카프카를 하고 싶은 까닭은 카프카가 권력과 위계질서를 거의 공기처럼 잘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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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차 논어 강의 목록을 만들었다.

소인론, 반역의 시대, 필생의 라이벌(양호 또는 양화. 논어 17편이 양화편이다)이라는 내용은 이번에 새롭게 업데이트가 되었다. "반체제적 복고주의자"라는 형용 모순의 특성이 "반체제적 권모술수가"인 양호(양화)와 평생 긴장하면서 어떻게 단련되었는지 드라마틱하다. 요즘 공자 연구서들은 양호에 주목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공자는 복고주의자이자 혁명가이다. 《공자전》(펄북스)을 집필한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은 "혁명자"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했다. 나도 혁명가보다는 혁명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혁명으로 일가를 나눈 것이 아니라, 모든 혁명가들의 혁명 태도를 기초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교육이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보수적인 역할을 하지만, 예외적으로 병든 사회를 정화하는 기능을 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좋은 스승이 태어난 경우다. 뒤르켐은 선생의 사회학적 기원을 "비주류 평민"이라고 설명했다. 공자는 사 계급으로 평민과 귀족 사이에 위태롭게 서 있는 비주류에서부터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반역의 시대에 태어나 활약한 공자에게 반역자의 특성이 없을 수 없다. 다만 양호와 당대 권모술수가들의 반역은 권력투쟁에 머물렀지만, 공자의 반역은 변혁 사상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공자 강의 요청이 계속 있으면 공부를 더 할 수 있으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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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에 대한 강의 의뢰를 받았다. 한 달에 한 번씩 10강을 해야 하기 때문에 찬찬히 읽어본 책들과 논어에 관한 자료를 분석하며 강의안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최근 공자 연구서를 보면서 완전히 새롭게 보게 된 부분이 많았다. 특히 군자에 반대되는 의미의 "소인"에 대해서 다시 보였다. 공자와 논어가 줄곧 비판하던 소인은 현대인에 무척 가깝기 때문이다.


내가 소인을 진지하게 분석 대상으로 삼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소인은 현대인의 모습이 많이 담겨 있는데, 이를테면 아래 구절은 현대인의 모습과 참 흡사하다.


(소인, 또는 비열한 자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얻을 때까지 근심하고, 설령 원하는 것을 얻더라도 잃어버리지 않을까 근심한다. 근심이 커지면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까지 서슴지 않는다

논어 양화 편

영원히 근심의 감옥에 갇힌 현대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르네 지라르 식으로 표현하지면 "형이상학적 욕망"에 영원히 갇힌 현대인의 모습이다. 근심을 해결하기 위해 취직을 했더니 형이상학적 욕망이 해결되지 않았고, 퇴사를 하고 이직을 했더니 새로운 근심걱정, 새로운 형이상학적 욕망이라는 감옥으로 이감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씁쓸히 확인한다. 그래서 구조주의자가 되나 보다.


공자는 "소인 지식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소시민이 소인으로 욕망하고 살고 행동하는 것은 위허할 것까지는 없지만, 지식인이 소인으로 욕망하고 살고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너(자하)는 군자다운 유가 될 것이지, 소인 같은 유가 되지는 말아라

(子謂子夏曰 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

논어 옹야 편


공자의 소인론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보려 한다. 군자에 가려진 조연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소인에 대한 이야기를. 동양철학의 근본 원리 중에서 '달이 차면 기운다'는 것이 있다. 군자는 그 동안 조명이 되었기 때문에 그 빛이 이제 시들해졌지만, 소인은 천대받다가 반대로 조명이 되고 있다. 마치 원의 운동처럼 원점으로 돌아오되 밤은 낮이 되고 낮은 밤이 되듯, 군자는 소인의 위치로, 소인은 군자의 위치로 되돌아간다는 게 참 신비롭고도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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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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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미 작품이 대세가 된 시대의 천연기념물


나는 수많은 선생님들로부터 두괄식으로 쓰라고 배웠고 나 또한 두괄식으로 쓰도록 가르쳤다. 수많은 정보와 생산 속도에 익숙한 요즘에는 첫 페이지, 아니 처음 몇 문장에서 승부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첫눈에 독자를 사로잡는 작품을 권장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용두사미 식의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처음 몇 장면에 모든 힘을 쓴 것 같은 작품은 당연히 오버 페이스에 걸려들어 부실한 결말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나는 두괄식 작품 대신 미괄식 작품을 신뢰하게 되었다. 세대에 걸쳐서 살아남은 문학 고전은 미괄식이 많다. 빌드업 과정은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뿌려진 떡밥들은 가지런하게 결론을 향해 있다.(이 경우는 '떡밥 회수'가 아니라 '떡밥 수렴'이라고 보아야 한다. 떡밥들이 나름대로의 비중과 의미를 가지고 결론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첫 50쪽(또는 첫 100쪽)에 대한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두괄식(또는 용두사미 식) 작품은 첫 50쪽이 흥미롭지만, 미괄식 작품은 첫 50쪽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인사하는 공간 또는 빌드업하는 공간이라고 감안한다. 요즘 대세인 드라마 <카지노>가 바로 빌드업에 충실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시나리오 공부하는 사람들은 <카지노>를 보면서 많이 배운다고 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첫 50쪽이 힘든 작품이다. 사회주의자, 빨치산이라는 현실과 불화하는(또는 현실에 부적응하는) 낯선 존재와 독자가 공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플롯은 단순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상가집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들과 아버지가 어우러진 이야기가 끌고 가는 구조이다. 어떻게 보면 『돈키호테』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돈키호테이고 어머니는 산초 판사와 비슷하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뮈해 목심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아버지의 해방일지』


벼룩을 잔뜩 몰고 온 방물장수 여자에게 방 하나를 통 크게 내주고 푸념하는 아내에게 아버지가 사회주의자, 혁명 운운하는 모습이 작가가 보기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그게 통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꼬리를 내리다 못해 죄의식에 얼굴을 붉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사상을 가지고 살고 있을까?


우리나라처럼 극우 반공주의가 오랫 동안 주류였던 사회에서는 사회주의자의 '사회' 자만 나와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사회적 기업', '사회적 협동조합'조차도 빨갱이 바라보듯 했했기에 이명박 정부가 되어서야 사회적 협동조합에 관한 조례가 통과되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한 사람의 평생에 걸친 사회주의 실천과 책 한 권이라는 시간 동안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자에 대해서 경험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고정관념과 사회주의 알레르기를 씻어내는 시간이면서 사회주의에 대해서, 나아가 '사상'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이념과 사상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경험했고, 연좌제가 엄존했던 수십 년의 시간 동안 '사상'은 마치 고어(古語) 또는 사어(死語) 같은 취급을 당해 왔다. 하지만 사상 없는 사람은 없으며, 사상 없이는 행동이 나올 수 없다. 누구 것을 베끼든 영향을 받든 행동은 사상을 근거로 한다.


내가 볼 때 사상은 '좋은 삶'을 상상하는 것이다. 생존하는 것과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충돌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좋은 삶에 대한 욕구는 생존에 대한 욕구를 이길 수가 없다. 전략차가 너무나 압도적이다. 생존에 대한 압박이 커질수록 좋은 삶에 대한 욕구는 박멸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아버지는 좋은 삶을 사수하기 위해서 생존의 압박을 힘겹게 이겨냈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좋은 삶 실천 과정에서 아버지의 온기를 받았던 사람들이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장례식'이라는 장치다. 장례는 가족이 주최하는 행사다. 가족 전통에서 필수적인 체계이지만 '사회주의자의 장례식'은 가족 제도와 장례 제도, 온갖 전통적인 관계의 모순이 폭발하는 뇌관처럼 작동한다.


느그 아배는 살아서도 혈육 등지고 동무들 찾아가등만 죽어서도 동무들이 먼첨이라냐!

『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가 빨치산이 됨으로써 집안은 몰락하고 모든 가족들의 앞길은 올스톱이 될 수밖에 없었던 비통한 사연의 최대 피해자였던 작은 아버지의 외침은 그 시간의 무게감이 있기에 울림이 더 크다. 전도유망했던 작은 아버지의 팔자가 아버지로 인해서 나락으로 떨어졌고 평생을 술에 의존해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야기는 애처롭다. 하지만 애처로운 만큼 아버지의 평생 실천이 더욱 돋보인다. 물론 가족을 사회주의 제단에 제물로 바친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매일 고민하는 것은 생존 기계가 되지 않기 위한 방법을 구하는 것이고, 나아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을 구하는 일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좋은 삶을 완성한 사람으로서 조그만 영광과 자랑스러움, 그리고 거대한 원망을 남겼다. 좋은 삶을 추구하는 사례의 극단으로서 손색이 없다. 양극단에 점을 찍으면 나의 위치가 보이기 때문에 좋다. 좋지 않은 사회에서 좋은 삶은 언제나 손해를 보지만, 바위에 계란을 던지듯 좋은 삶의 도전을 이어가지 않으면 사회는 더욱 나빠지기만 할 뿐이다. 좋은 사회는 좋은 삶의 실천이 쌓일 때 가능하다면 선택권은 나에게 있는 셈이다. 좋지 않은 사회에 편승한 삶을 살 것인지, 가시밭길을 가더라도 좋은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인지. 참 어려운 선택임은 분명하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 나서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 P27

작은아버지는 평생 형이라는 고삐에 묶인 소였다. 그 고삐가 풀렸다. 이제 작은 아버지는 어떻게 살까? - P41

바위는 서늘하고 살구나무 늙은 입사귀는 바람에 살랑이고 그 틈으로 잔햇살이 너울거리고, 소설이나 읽다가 단잠에 빠져들기 좋았다. - P204

미국과 싸워 지고 반역자가 된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미국과 싸워 이긴 베트남 여인이 찾아왔다. - P234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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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3-02-19 1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삶에 대한 욕구는 생존에 대한 욕구를 이길 수가 없다.] 이 말씀이 지금의 사회를 관통한다고 생각됩니다.
마음은 언제나 인간다움을 추구하지만, 생계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참 고통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승주나무 2023-02-19 19:23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요즘 저를 괴롭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좋은 삶의 욕구와 생존의 욕구를 조화시키는 것은 양자택일을 피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 같습니다. 저는 능력부족으로 항상 양자택일로 빠지곤 합니다. 좋은 책은 좋은 친구를 부른다고 하는데,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이렇게 생각을 남긴 덕분에 좋은 친구를 알게 되었네요. 이 맛에 알라딘을 하는 것 같아요.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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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드라마 <직장의 신> 짤을 볼 때마다 소설 <필경사 바틀비>가 생각나고,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읽을 때마다 이 드라마가 생각난다. 


바틀비는 '거절의 신'이기 때문에 거절의 이미지로 다가갔을 때 공감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거절 잘해?"


참석한 중학생들은 모두 거절을 잘 못 한다. 거절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했다. 


"거절 당해본 적 있어?"


의외로 거절은 많이 안 당해봤던 것 같다. 거절의 범위를 넓힌다면 이력서를 수십 통 썼는데 번번이 낙방하거나 수십 군데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는데 거절당하거나 일상의 세세한 상황과 거절들의 사례를 들자 이제야 뭔가 떠오른 표정들이다. 덕분에 거절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 근육을 좀 키워야한다는 말도 잘 녹아들었다. 


중학생들과 쟁점을 모았더니 이렇게 나왔다. 


(1) 바틀비가 구치소로 가는 것을 내버려둔 변호사는 옳지 않다 (A) 

(2) 바틀비가 사무실에 기거한다는 사실을 숨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A) 

(3) 바틀비가 자신이 꼭 해야 하는 일을 거절했을 때 주인공은 양보를 해줬는데 좀 더 단호한 조치를 취했어야 하지 않았나? (C) 

(4) 바틀비가 필경 업무만 전담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다 VS 부당하다 ★★ (B)

(5) 사장이 바틀비를 너무 오냐오냐했다 VS 바틀비를 인간적으로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 (B)

(6) 바틀비도 이제는 과거를 잊고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D)


4번과 5번이 호응을 많이 받아서 그 주제 가지고 토론을 했다. 질문도 함께 모았는데, 아이들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 바틀비가 왜 사람들의 말을 거절했을까? (왜 고립됐을까?)

(2) 바틀비는 왜 주인공의 부탁을 거절했을까? 

(3) 바틀비는 주인공이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자고 한 제안을 왜 거절했을까?

(4) 바틀비가 그렇게 행동한 것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쳤는지 아닌지?

(5) 바틀비가 중간에 자신이 필경사 하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시력 말고도 뭔가 있지 않을까? 

(6) 바틀비는 왜 거절왕이 되었을까? 


토론을 하면서 사장에 대한 비판이 많았고, 바틀비의 행동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하지만 <필경사 바틀비>의 경우는 독특성을 감안해야 하는데, 그 독특성이라는 것은 비판과 토론이 제한된다는 점이다. 바틀비는 역대급 캐릭터인 만큼 배달 불능 우편물(Dead Letter) 담당으로 일하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해고당했다는 것밖에 알려진 것이 없고, 그마저도 소문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니까 바틀비는 이해의 대상이지 비판이나 토론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바틀비가 다른 행동으 할 여지가 있다면 그로 인해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바틀비의 행동을 이해하기 바쁘다. 사장에 대한 비판도 이런 이유 때문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 사장은 단지 사람 좋은 변호사로서 불편한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는 전형적인 생활인이다. 바틀비가 사장에게 한 행동을 생각한다면 사장은 거의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소설에서나 가능한 대응이지 현실에서는 곧바로 112행이 아니겠는가?

고민 끝에 우리는 소설 속에서 다시 소설을 써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배달 불능 우편물을 취급할 당시 바틀비는 전쟁으로 인해서 수신이 불가능해진 사례를 주로 접수했을 것이고, 그 중에서는 바틀비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었던 사례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을 것이고, 이 모든 불행한 죽음과 반드시 전해져야 하는 사랑의 메시지가 이렇게나 많이 소멸된 것은 우리가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한 번의 인생인데 군 징집이라든지, 무리한 공격 명령이라든지, 여러 가지 사정들 떄문에 거절할 수 없이 죽음의 종창역으로 끌려가버린 인생들을 보면서 바틀비는 거절하는 방법을 필사적으로 연마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결과를 불쌍한 우리 변호사 사장님한테 시전한 것은 아닐까?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또 다시 '이해'와 관련되는데, 독자가 바틀비를 이해하는 폭의 차이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바틀비를 이해하는 폭 역시 천차만별이다. 등장인물들에게도 바틀비는 무척 혼란스러운 인물인 것이다. 

예순살 먹은 영국인 터키는 상식과 상례에 의거한 요구가 정당했다고 사장을 옹호했고, 니퍼트는 바틀비를 당장 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너트는 바틀비 씨가 살쪽 돌았다고 보았다. 바틀비의 거절이 더 심해지자 터키는 바틀비의 눈탱이를 밤탱이로 만들어놓아야겠다며 달려들 기세였고, 니퍼트는 바틀비의 행동이 확실히 비정상적이긴 하지만 지나가는 변덕일지 모르겠다고 관대하게 태도를 바꾼다. 왜냐하면 니퍼트가 맥주에 살짝 취했기 떄문이다. 나는 바틀비가 법률사무소로 온 것은 불행했던 삶 중에서 약간의 쉼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변호사가 바틀비를 완전히 이해했다면 소설은 전혀 다른 결말로 갔을 수도 있었는지도 모른다. 변호사는 바틀비를 반만 이해함으로써, 그러니까 상식의 눈으로 바틀비를 바라봄으로서 불행한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본다면 바틀비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데는 변호사의 책임도 약간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수업을 위해서 인물행동분석표를 만들어 봤다. 단편이니까 이 정도지 장편이라면 여러 장 나왔을 듯. 장편이면 이런 표를 안 만들지. 중학생들과 토론 수업 한 번 하겠다고 이런 노가다를... 내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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