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첨삭(첨삭이란 논술 작성한 부분을 뜯고 고치고 하는 일련의 퇴고 작업인데, 학생의 관점에서는 '퇴고'이며 선생의 관점에서는 '첨삭'이다. 근데 학생들이 드럽게 퇴고를 안 한다. 그래서 '첨삭'이 되었다)을 하다가 한 녀석이 멍~ 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거다.

'어이~ 왜 기래?'

블랙아웃현상이니 마법의 탄환 이론이니 하는 권력의 여론 조작 행태와 대중의 무비판적 자세가 논술의 핵심 주제였다.

대개 고딩들은 논술에서 '양심에의 호소'(정부가 대중들을 위해서 배려해야 한다.)나 '구호적 서술'(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도록 모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로 흐르기 십상이다.

이런 글들을 접할 때마다 속이 쓰리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위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으므로, 논술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속쓰린' 작업이다.

그들에게 '논증'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지난한 작업이다. 하지만

"나는 선생이고, 너는 학생이야."(하느리 버전)

국가가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봐줘야 한다는 서술은 이미 그 안에 '종속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어. 그것이 아니라 '대등적 관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럼 한 번 가볼까?

- 네, 쌤

대등적 관계는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이를테면 '힘의 균형 상태'이지. 주로 대중이 얻어터지고, 권력은 쉽게 잇속을 얻는 것이 정치의 구조라고 할 때 좀 더 분발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지?

- 대중이요, 쌤

정확히 말하면 대중이라기보담은 니놈들이야, 알간?

- 푸, 씨, 쳇, 헐(각종 원성접속사 난발)

그러면 노사관계를 생각해보자. 노는 힘없는 노동자이므로 국민에 가깝고, 사는 돈줄을 가진 기업이므로 국가에 가깝지. 하지만 노사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에 앞서 '노노갈등'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어.

- 그게 국가-국민의 대등한 관계와 무슨 상관 있어염?

그러니까 국민들 중에서 국가를 견제할 만한 소규모 집단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거야. 맹자에 선각각후각(先覺覺後覺, 먼저 깨달은 사람이 나중에 깨달은 사람을 깨우쳐 주는 것이라는 말로 '선각자'라는 말은 맹자에 출전을 두고 있다)이라고 했는데, 지식인은 국민들 중에도 있고 국가에도 있으니 FA라고 할 수 있지. 이들이 전문적인 식견을 대중에게 쏟으면 대중들은 거기에 지지를 보냄으로써 하나의 '견제 여론'이 형성되는 것이지. 경실련이라든지 시민연대 등의 단체가 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지.

- 그러니까 국가가 국민을 함부로 까는 것은 국민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결속이 약했던 것이네여?

음.. 고놈 참 똑똑하네. 이제 국민들의 결속을 다졌으니까 국민-국민의 관계에서 국가-국민의 관계, 즉 '국가-국민의 대등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겠지. 이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당~ 결국 민주주의는 '역사'가 아니라 철저하게도 '투쟁사'라 할 수 있지. 그러니까 니가 썼던 추상어, 구호, 감정적인 서술, '나'를 까발린 점 같은 것들을 모두 이와 같이 구체적이고 명확한 논증으로 갈아입히도록 해라.

- 이걸 다 어떻게 갈아입혀요?

그래서~ 내가 왔짠나!! 여기저기 수정한 것들 백 번씩 쳐다보고 퇴고할 때마다 보고 또보고 하렴... 너와 나의 '대등한 관계'는 너의 '투쟁'에 달려 있으니, 나는 당분간은 네 위에 군림하마. 그래도 되겠지?

- 우씨~

이것이 '멍~ 사건'의 전모이자 지금 연재를 막 시작한 따끈따끈한 '마법같은 논증'의 마수거리 연재이다. 다음 연재는 반응 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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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8-04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므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