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적인 영화, 반미적인 영화, 문제적인 영화, 봉합적인 영화
영화 크래쉬가 받는 평가들이다.
도대체 뮌헨이 끝내 노미네이트에 머문 이유가 무엇이고,
크래쉬가 작품상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가 자꾸 궁금해서 결국 영화를 함께 보게 되었다.
일단 유태인적이면서도 반유태인적이라는 모호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화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주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 크래쉬는 '언제나 지구의 악당들을 물리치는 영광스러운 미국적'인 요소보다는
'잘난 척하지만 쥐뿔도 없으면서 약자들이나 괴롭히는 수치스러운 미국적'인 요소가 눈에 들어왔다.
이 영화는 미국인들을 향해 '이것은 당신들의 이야기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두 인물은 바로
이 놈과
이 놈이다.
이 영화에서 이 두 사람은 '시험'에 오른다.
한 사람은 권력 남용의 미 제국주의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한 사람은 약자의 호소에 귀기울이는 것 같으면서도,
한 사람은 '진심'으로서, 한 사람은 '위선'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미국이 이런 '내적'인 영화를 만든다면 나는 돈을 내고 볼 용의가 얼마든지 있다.
LA타임즈는 이 영화를 오스카를 탄 최악의 영화로 꼽았다. 뭐 라타임즈가 딴지를 걸지 않은 영화는
아카데미 사상 10여 편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 내용을 들어보면 일리가 있기도 하다.
'뮌헨'은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작'이었다. 문제를 제기하고 용감하게 셔터를 닫아버린다.
그러나 크래쉬는 '미국적인 봉합'을 택한다. 대충 화해하고 해피엔딩으로 영화를 마감한다.
문제를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최고조까지 끌어내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남았다.
이 영화를 보니 얼핏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 생각났다. 나랑 같이 영화를 본 친구도 동의한 것인데, '일주일'의 포멧에 미국적인 이야기를 덧붙인 것 같았다.
그리고 '위선자'는 '실미도'의 막내 간부(중사)를 보는 것 같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불신'이 드러난 것이다.
이 점이 이 영화의 백미였다고 생각한다. 나도 이 때는 나의 위선을 드러내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나도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현대인처럼 심약하디 심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욕을 얻어먹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을 괜찮게 본다.
바로 얘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