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소피 카사뉴-브루케 지음, 최애리 옮김 / 마티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은 우리에게 참으로 친근하다.
친근하다는 것은 가까이서 오래 있었다는 점도 있지만, 구석구석 사람의 손길이 미친다는 점에서 친근하다.

인쇄기가 없었을 때도 책은 있었다. 책의 발달은 인류 의지의 표현이다. 앎에 대한 전일한 의지가 인쇄기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은 어떤 이에게는 굴레이기도 했다. 나도 책을 베껴봐서 안다. 예전에 에티카를 읽을 때 감명깊은 구절을 노트에 정서로 베꼈는데, 덕분에 한 달이 가도록 다 읽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워드 속도가 엄청 빨라진지도 모르겠다. 
베끼는 사람, 채색하는 사람들은 일정한 틀 밖을 벗어날 수 없었다. 대개 책의 지면을 이루는 그림과 장식, 쪽표시공간, 글자 장식 등이 일관된 흐름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성스러운 성서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하지만 이 안에서 장인들은 예술적 혼을 불살랐다. 그리고 책장을 돋보이게 하는 삽화와 이니셜, 장식 등은 중세만의 독특한 정취가 있다. 개구리가 뱀을 삼킨 그림을 누가 'R'로 생각하겠는가.

책이 귀한 만큼 애착도 집착도 심했다. 오죽하면 책주인이 젊은 독자에게 이와 같은 독설을 퍼부었을까.

손톱은 시꺼멓고 향수는커녕 쉬어터진 구린내를 풍기는 손으로 맘에 드는 대목에는 자국까지 내기 일쑤이다! 게다가 자기 기억을 붙들 수 없는 것을 표시한답시고, 여기저기 수북이 지푸라기를 꽂아놓는다. 책으로서는 소화시킬 도리가 없는 이 지푸라기들을 아무도 다시 뽑아버리는 이가 없으니, 그렇게 잔뜩 꽂힌ㅁ 짚북데기가 책의 아귀를 어긋나게 하고 결국에는 썩히기 시작한다.  - 67쪽

정말 경험에서 우러난 '불평'이다.
이 책은 인쇄를 할 수 없었던 시절에 사람들이 책을 읽기 위해, 책을 만들기 위해, 책을 꾸미기 위해 공들였던 시간이 기록돼 있다. 이 시절의 책은 그래도 행복했을 것 같다. 쌓여서 버려지는 책은 없었을 테니까. 
 전문 필경사가 온종일 책에 매달려 베껴도 하루에 두세 페이지밖에 쓸 수 없었다는 이야기, 대주교가 부임한 교회 도서관에 책이 달랑 5권밖에 없어서 필사실을 따로 만들고 평생 책을 베꼈지만, 20년이 흘러 퇴임하기까지 66권밖에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오늘날과의 간극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 오랜 옛날 지식이 독점되지 않을 수 없었겠다는 푸념만 책장 언저리를 오갔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텍스트와 그림이 따로 논다는 느낌을 준 점과 극적 서술이나 유머가 없어서 대체로 재미가 없었다는 점이다. 정말 책을 사랑하고 책의 체취를 구석구석 느껴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걸어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중에 혹시 책을 쓰게 될 책을 위한 교훈을 얻었다.

책은 보고서가 아니다. 어떤 목적을 공유하는 사람이 아닌 누군가에게 읽힐 책이라면 보고서보다는 에세이와 같은 성격이어야 할 것 같다. 책의 제작 과정, 독자들, 필경사들, 채색사 들에 대한 일관된 해설은 백과사전을 보아도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볼 때는 백과사전에서 찾을 수 없는 내용이 이 책에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자료뿐만 아니라 상상력까지 동원해서 그 당시의 이야기들을 복원할 수 있었다면, 나는 나의 시대와 그 시대를 즐겁게 비교하며 책을 읽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텍스트가 아니라, 그림에 의미를 둔다면 충분히 권장할 만한 책이다. 이 책에는 우리가 평생 보지 못할 책이 있다. 지금도 채색가의 혼이 살아숨쉬는 책의 한 페이지는 몇 권의 책보다 가치가 있다. 책을 베끼고 꾸미는 것은 단순노동이 아니다. 그들의 인생은 비록 몇 권의 책으로 압축되지만, 그들은 진정 '세상'이라는 책에 글을 채워넣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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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3-27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예리하시네요. 처음에 별 셋이라 너무 짜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이 책에 너무 많이 흥분을 했었나 봅니다. 하나 깍을까요? 흐흐.

승주나무 2006-03-29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세개와 네 개 사이에서 고민했답니다. 끝내 감흥을 얻을 수 없어서.. 네 개는 줄 수 없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