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전집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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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 연구
-<희미함>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서론


기형도는 암울하고 부정적인 시세계를 갖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의 바탕을 이루며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상징적인 시는 「나쁘게 말하다」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몇 개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렸다
어떤 그림자는 캄캄한 벽에 붙어 있었다
눈치챈 차량들이 서둘러 불을 껐다
건물들마다 순식간에 문이 잠겼다
멈칫했다, 석유 냄새가 터졌다
가늘고 길쭉한 금속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잎들이 흘끔거리며 굴러갔다
손과 발이 빠르게 이동했다
담뱃불이 반짝했다, 골목으로 들어오던 행인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저들은 왜 밤마다 어둠 속에 모여 있는가
저 청년들의 욕망은 어디로 가는가
사람들의 쾌락은 왜 같은 종류인가
「나쁘게 말하다」 전문


필자는 기형도를 관찰하면서 굉장한 답답함을 느꼈다. 그 느낌이 어디서 오는지 고심하던 중 기형도에게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특징을 보게 되었다. 동양의 시인이면서도 철저히 배제된 동양적 성향이다. 마치 메모나 수기를 적듯이 써 내려가는 문체와 사상은 서구적 허무주의·비관주의와 닮아 있고, 뿐만 그 극단인 죽음에 밀착되어 있다. 그래서 김현은 '누가 기형도를 따라 다시 그 길을 갈까봐 겁이 난'다고 우려하고 있으며, 안정효는 '이제 그의 몸은 냉각된 얼음으로 꽉 차버린 죽음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고 말하며 '죽음이 살다 간 자리'라고 덧붙이고 있으며, 그의 죽음을 시의 마침표가 되는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시인의 슬픈 운명이 시의 운명까지도 좌우하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옳지 않다. 문관규는 「植木祭」를 분석하면서 유년 시대의 회상을 통하여 하강의 이미지를 드러내 보이다가, 그것과 결별하고 수직 상승의 이미지로 바뀌고 있다고 論究하고 있으며 이 때의 수직 상승의 이미지는 '통과제의를 겪는 시적 화자의 강한 의지를 표상하고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때 유년 시절의 회상, 혹은 결별의 이미지는 기형도가 가지고 있는 <여행, 방랑>의 이미지와 한 축을 이루고 있다.
上記한 몇몇 논자가 보여주듯이 기형도는 비관주의의 극단을 추구하다가 생을 마감한 시인이었던가 하는 의문이 필자가 기형도를 이야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의문 속에서 <희미함>의 이미지를 목도할 수 있었다. 그것은 물론 희망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대체로 절망적인 세계에 대한 작가의 觀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에 필자는 <희미함>의 이미지를 <떠남과 기다림>과 <유년·회상>이라는 이미지와 연관지어서 서술하고자 한다.


본론


1. 대체적인 세계의 색깔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기형도는 세계를 음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가 주도하고 있다고 보고, 그 안에서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빛의 분위기가 항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항쟁은 실로 아슬아슬한 형상이다. 기형도의 생각처럼 우리의 생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오래된 書籍」)이다. 그런데 기형도가 생각하는 생은 어두운 페이지가 전부일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배후에 드러나는 희미한 빛을 위해서 기형도는 성실하게 어둡고 음울한 세계를 그렸다.



노래는 침묵이 없으면 날 수 없는 가냘픈 새이다
-탈레스


이렇듯 시인은 <가냘픈 새>를 보기 위해서 침묵을 끈질기게 추구했던 것이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소리의 뼈」 중에서


침묵의 형태는 죽음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 죽음은 `생명적인 것까지도 함축한다. 때문에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안개」)이 걸려 있기도 하고, '낮은 지붕들 사이에 끼인/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처럼'(「백야」)아무런 웅장함도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나 `생명체는 `생명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기억을 회상하며 그리움과 기다림을 가지고 있는데, 그 때 `생명체는 생명을 얻게 되며 죽음과 생명의 색깔이 중첩하게 된다. 때문에 기형도에게 죽음이란 '가면'을 벗은 삶인 것'(「겨울·눈·나무·숲」)이다.



어두운 차창밖에는 공중에 뜬 생선 가시처럼
놀란 듯 새하얗게 서 있는 겨울 나무들.
한때 새들을 날려보냈던 기억의 가지들을 위하여
어느 계절까지 힘겹게 손을 들고 있는가.
「鳥致院」 중에서

그러나 생명에 대한 그리움은 위태롭다. 죽음과 침묵과 무너짐은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한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
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오후 4시의 희망」 중에서


대개는 이 <무너짐>의 포로가 되어 승복하지 않을 수 없다. <비탄, 불안, 증오>의 감정을 드러내면서.

-<비탄>의 정서-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여행자」 중에서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오래된 書籍」 중에서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진눈깨비」 중에서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 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중에서
내 苦痛의 비는 어느 날 그칠 것인가.
「孤獨의 깊이」 중에서


-<증오>의 정서-


분노 없이 살 수 없는 이 세상
「비가」 중에서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장밋빛 인생」 중에서
그대도 알 거야
노을이나 눈[雪] 욕설
바람 부는 것
「어느 날」 중에서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노인들 중에서」


-<불안>의 정서-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대학 시절」 중에서
내가 죽으면
내 이름을 위하여 빈 가지가 흔들리면
네 울음 섞이어 긴 밤을 잠들 수 있을까
「가을에」 중에서
쉽게 잠이 오지 않는 축축한 의식 속으로
실내등의 어두운 불빛들은 잠깐씩 꺼지곤 하였다.
「鳥致院」 중에서

이러한 감정들과 어둠, 죽음이 서로 격렬히 엉키면서 기형도의 시는 차라리 처절한 고통의 현장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시인이 말하는 기형도의 전모가 아니라 전초전일 뿐이다.

2. <희미함>의 이미지

기형도의 시에서 익숙하게 만나게 되는 이미지는 <弱視>, <간유리> 등의 시어로 대표되는 <희미함>이다. 그것은 上記한 것처럼, 세계가 희망의 가능성을 워낙 조금밖에 보여 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눈과 귀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약시>의 눈이나, <간유리>라는 매개를 통해서 볼 수밖에 없다.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어느 푸른 저녁」 중에서


그렇기 때문에 항상 불안이 따라다니고, <예언, 환상, 동화, 선문답>의 분위기들이 기형도의 시들을 장식한다.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며, 자연과는 달리 세상을 살아가고 바라보는 인간의 天稟인 것이다. 즉,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길 위에서 중얼거리다」)할 수밖에 없는 숙명인 까닭에 <그리움>은 耳目口鼻나 四肢처럼 나를 대변하는 특성인 것이다.
그렇기에 세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가는 비 온다」)며, 보들레르式으로 표현한다면 '떠나기 위해서 떠나는 사람만이 진정한 여행자'(『꿈꾸는 알바트로스』)이다. 그러한 희미한 인간 조건 속에서 희미한 희망과 생명은 조금씩 움트기 시작한다.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短篇의 잠 속에서 끼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바람은 그대 쪽으로」 중에서


정채봉의 동화에서는, 인생이 고통 속의 강행군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한 딸이 아버지에게 '왜 삶에는 비오는 날이 이토록 많은가요?' 하고 묻는다. 아버지는 '인생에 햇빛만 비추면 사막이 된다'고 대답을 한다. 반대로 인생에 비만 내린다면 햇빛을 잊어버리는 죽은 시간을 살게 될 것이다. 그 안에 버티고 있는 中庸이란 빛과 어둠이 반반씩 섞여 있는 어둠침침한 황혼이 아니라, 몸 속에 새벽을 품고도 쉽사리 여명을 내주지 않으려는 칠흑 같은 밤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어둠 안에 무한한 빛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잠시 후에 내릴 여명이 있더라도, 영원한 어둠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빛이 내리기 전에 이미 삶의 거의 전부를 포기하고 마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믿음>의 문제가 생긴다. 그 <믿음> 역시 인간의 아슬아슬하고 불안한 天稟을 타고났기 때문에 불확실하고 희미하지만, 그 자체로 생명을 갖고 있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를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10월」 중에서


그 믿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모진 대가가 필요하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의 강렬한 확신, 죽음도 비웃을 정도의 담력과 치열한 성찰이 필요하다.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아느냐, 내 일찍이 나를 떠나보냈던 꿈의 짐들로 하여 모든 응시들을 힘겨워하고 높고 험한 언덕들을 피해 삶을 지나다녔더니, 놀라워라.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 기쁨을 숨긴 공포여, 단단한 확신의 즙액이여.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가 되어 있는가. 곧이어 몹쓸 어둠이 갇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 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전문


시의 초반부의 달의 모습은 전에 언급했던 非생명체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뒤에 보이는 달의 모습은 <귀>로 형용된다. 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생한 생명의 한 근간을 이루며 인간과 세계를 연결시킨다. 이렇게 非생명체에서 생명의 즙액으로 化하기 위해서는 고드름 같은 <사나운 영혼>이 필요하다. 이 때의 사나운 영혼은 모순을 몸으로 극복하여 <확신의 즙액>을 가슴속에 고이 담고 있어야 하며, <밤의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기꺼이 매달려 있을 정도로 세상을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나운 모습을 기형도는 순간을 향유하다 사라지는 <고드름>에서 발견한다. 그나마 <고드름>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그것을 신성과 신비가 깃든 환상의 세계로 표현하기도 한다.


저녁노을이 지면
神들의 商店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城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城

어느 골동품 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城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숲으로 된 성벽」 전문


<神들의 商店엔 하나 둘 불이 켜지고>는 노을진 어두운 밤하늘에 별들이 하나둘 솟아나고 있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램프가 지향하는 것은 기다림이다.

창문에 있는 램프는 집의 눈이다. 램프가 창문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램프 때문에 또 집 전체가 기다리고 있다. 램프는 기다림의 커다란 표지이다.

이 <평화로운 城> 안에서는 당나귀, 구름, 공기, 농부가 서로 대화하고 한 식구가 되고 있다. 이것은 <非생명체-생명체-극대화한 생명>의 공동체 과정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은 안타깝게도 <현실-이상-극단적 이상 혹은 환상>의 과정과 같은 궤를 지닌다. 그만큼 희소하고 희박한 비전이 기형도 시가 보여주는 세계관이며 그 희박한 가능성 안에서 시인은 진솔하게 웃고 또 울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희박한 가능성에 온몸을 걸고 사는 존재들을 기꺼이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밤눈」 중에서


그리고 그런 존재들 또는 존재들의 사랑으로 인해 기형도는 <죽음, 고통, 겨울>을 절망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램프와 빵-겨울 版畵6」 전문


그리고 생명에 대한 강인한 확신에 도달한다. 나와 사나운 영혼인 <고드름>과 <밤눈>은 遊離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일부이므로 고드름의 영혼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의연히


나는 살아 있다. 解氷의 江과 얼음山 속을 오가며 살아 있다.
「잎·눈[雪]·바람 속에서」 중에서

하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의 희미한 희망은 이미 시인에게 深淵한 실체를 보여준다.


가라, 구름이여,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이제는 어둠 속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
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 뜨면
아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우리는
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더미 속에 있다.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중에서


그리고 이 재구성된 세계 안에서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비가2-붉은 달」)임과 동시에 현실세계로 투영된 모습으로 보면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기는 '누구나 아득한 혼자'(「노을」)이다.

3. <떠남과 기다림>의 이미지

<희미함>의 이미지의 다른 모습은 <떠남과 기다림>의 이미지이며 <유년·회상>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과거의 이미지이므로 희미하고, 갈망의 대상이므로 역시 희미하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떠남>은 <無目的>의 성질을 근본으로 하거나 해야 한다. <그리움(기다림)>은 이별을 전제하며 다시 재회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의 요소를 담지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의 관계가 기형도가 추구하는 리얼리티이다.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노을」 중에서


이렇게 화자는 자신 속에 있는 넘치는 생명력을 확인하며 떠나려 하지만 뚜렷한 목적 의식이나 목적지가 없는 <떠남>이다. <無目的의 떠남>은 <무책임한 떠남?과는 다르다. <無目的의 떠남>은 <떠남>을 수단으로 하여 어디로 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떠남>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문학이 점점 사회나 정신을 訓育시키는 效用論的인 관점에서 문학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순수주의적 관점으로 옮겨지고 있는 현상과 같다. 일단 추후에 다가올 시간은 잊어버리고,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고 거기서 떠나야 할 필요가 있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그 집 앞」 중에서


화자는 눈을 감고 억지로 떠나려 하고 있다. 태연히 떠나지 못하고 도망치고 있다. 쉽게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훌훌 털고 가볍게 떠나는 자연을 동경한다.


아,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植木祭」 중에서


그런 자연을 닮으려 화자는 자신을 붙잡는 기억 하나 하나를 호명하며 화해를 하고 이별을 하려 한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빈집」 중에서


그런 이별이 여의치 않지만 화자는 자신의 더욱 깊은 기억과 내면을 믿고 있다.


턱턱, 짧은 숨 쉬며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비가 2 - 붉은 달」 중에서


그렇게 하여 떠나지만 슬프도록 그리워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떠나버렸던 기억의 공간이다. 즉, 자신의 삶을 재구성해서 진정한 기억을 되찾기 위해 거짓되거나 퇴색돼버린 기억들과 결별하는 것이다.


예술은 완성되기 위하여 자기의 유년기로 돌아온다.

지혜는 우리를 유년 시절로 돌아가게 한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이때의 돌아감은 떠났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기형도에게 있어서 그리움의 대상은 인물이다. 어릴 적 죽은 누이와, 여자 골목 대장이었던 <도로시, 잠시 머물다 간 집시>, 그리고 <詩人> 등이다. 非생명체로는 <밤눈>과 <고드름>을 들 수 있겠으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들은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경이로운 대상>일 뿐이다. 기형도에게 있어서 그리움은 언제나 인간적인 속성을 갖는다. 기형도는 그리운 사람들을 자신의 生 안에 부활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화자 자신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의 방편이다. 사실은 화자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다.
때문에 어쩌면 있지도 않았을 인물을 추억 속으로 꾸며서 만들어 내기도 하고, 그리워하던 인물과 실제 재회를 해도 어떤 감흥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완전히 그를 잊었다. 그는 그 해 가을 우리 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난 떠돌이 사내였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꾸며낸 이야기였을지도 몰랐다.
「집시의 詩集」 중에서

너는 그 머나먼 대륙으로 떠나기 전에 딱 한번 우리 마을에 들렀었다. 가엾은 도로시. 너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벌써 네가 필요 없었다. 너는 주근깨투성이, 붉은 머리의 말라깽이 소녀에 불과했다.
「도로시를 위하여 - 幼年에게 쓴 편지」 중에서


이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서 다시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원 운동을 기형도는 그의 시 속에서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좀 더 큰 원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모든 기억들과 인물들을 불러모은다.
<詩人>은 기형도가 그리워하는 대상 중 가장 미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는 「詩人 1」을 통해서 자신이 꿈꾸고 있는 詩人像을 그리고 있다.


나의 魂은 主人없는 바다에서 一萬 갈래
물살로 흘렀다. 一千 갈래는 고기떼로 표류
하였다. 그 중 너덧 마리는 그물에 걸리었다.
한 마리는 물에 오르자 곧 물새가 되어 날아갔다.
부리가 흰 물새는 한번도 울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하늘에 올라가 구름이 되었다. 물새의 魂은
九萬里 공중을 날다가 비가 되었다. 내릴 데
없는 물 같은 비가 되었다.
「詩人 1」 전문


4. 유년·회상의 이미지


기형도의 유년은 그가 표출하는 <기다림>의 원형이다. 그 때부터 그는 숙명적으로 기다림을 업으로 삼을 존재가 될 것임을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의 詩 속에는 그런 원형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 전문


여기서도 그리움의 대상은 엄마이지만 엄마로 표출된 화자 자신을 더욱 그리워하고 있다. 이것은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을 통해 더욱 극명히 드러난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 중에서


결론


지금까지 기형도 시에 내재해 있는 <희미함>이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기형도가 파악하는 세계에 대한 觀을 고찰해 보았으며, 그것이 <여행, 방랑, 이별, 그리움, 기다림> 등의 불확실성을 갖고 있는 이미지들로 顯現하면서 풍성한 <희미함>의 이미지를 발현하고 있다. 이 때 이별은 자기 자신과 이별함을 뜻하며 여행은 무목적의 여행이지만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기 위한 여행이었음이 밝혀졌다. 즉, 재창조된 자신으로의 회귀를 말함이다. 기다림 또한 여러 인물들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철저히 자신을 기다리기 위한 장치가 마련되어 있음도 확인하였다. 그것이 유년의 회상일 때는 더욱 여실히 나타난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형도를 바라본 모습은 시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세계를 같이 바라보자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시인이 남겨 놓은 것들을 해부하는 선에서 그쳤으니 그것이 아쉬운 점이다. 시는 독자에게서 언제나 시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시를 논하는 사람은 시로써 시를 논해야 한다. 이것이 시 연구가 다른 연구와 차별되는 점이라 생각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광활한 미지의 세계에서 우리가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은 아주 협소하리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죽은 시인과 남겨진 시인 혹은 시 독자들이 지향하는 바는 근본적인 입장에서는 같아야 하며 최소한 시인의 이 고백을 들어줄 정도의 정직성은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맹장을 달고도
草食할 줄 모르는
부끄러운 動物이다
긴 설움을
잠으로 흐르는 구름 속을 서성이며
팔뚝 위로 靜脈 드러내고
흔들리는 靈魂으로 살았다.

빈 몸을 데리고 네 앞에 서면
네가 흔드는 손짓은
서러우리만치 푸른 信號
아아 밤을 지키며 토해낸 사랑이여
그것은 어둠을 떠받치고 날을 세운
네 아름다운 魂인 것이냐

이제는 뿌리를 내리리라
차라리 웃음을 울어야 하는 풀이 되어
부대끼며 살아보자
발을 얽고 흐느껴보자

맑은 날 바람이 불어
멍든 배를 쓸고 지나면
가슴을 올쿼 솟구친
네가 된 나의 노래는 떼지어 서걱이며
이리저리 떠돌 것이다.
「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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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5-11-23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문같아요... ^^;;;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승주나무 2005-11-23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쓰면서 전집이 찢어져라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옛글을 뒤척이다가 발견했어요. '옛' 해봐야 그리 오래 되진 않았지만.. 암튼 감사합니다.^^

로드무비 2005-11-23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저하게 배제된 동양적 성향, 맞아요.
그의 시를 좋아하면서도 그런 점은 부인하기 어렵지요.
잘 읽고 갑니다.
라주미힌님 따라 왔습니다.^^

승주나무 2005-12-01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반갑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한때 좋아하다 지금은 헤어진 시인이며, 기형도는 지금 서먹서먹한 시인입니다. 제가 백석과 바람을 피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