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바드 기타 한길그레이트북스 18
함석헌 옮김 / 한길사 / 200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가바드기타(Bhagavad Gita)
―나는 오늘 궁극(窮極)에 다녀왔다



궁극(窮極)을 향한 노래

『바가바드기타』는 궁극을 향한 노래이다. 이는 신에 대한 종교에 대한 옳은 행위에 대한 논증을 설파하는 것도 아니다. 『바가바드기타』가 가지는 유일한 논증이라면 그것은 아름다운 비유이다. 궁극으로 가기 위해서는 놀라운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 '사지가 주저앉고, 입은 바싹 타며, 전율이 내 몸을 휩싸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고뇌를 견뎌내야 하며, 전장에서 내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혈육이며, 지고의 순례길 중에는 온 형제 가족이 낙오되거나 죽은 끝에 결국 혼자 남은 외로운 수행길을 감당해야 한다. 이 때 귀를 맑게 하는 아름다운 깨달음의 노래는 나를 더 이상 슬픔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지고자가 나를 위해 배려한 과정이며, 그러한 지고지순한 진리가 쉽게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궁극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자유를 의미하며, 자아를 초월한 초자아란 하나님이 완전히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이다. 스피노자는 그 상태를 꿈꾸어 '신을 향한 지적 사랑'을 갈구했으며, 파스칼은 '가장 위대하며 가장 비참한 상태'를 체험했다.
궁극에도 시간은 있지만, 이 때의 시간은 '영원을 헤아리는 사고방식'이다. 연대순으로 이루어진 역사는 별 의미가 없다. 영원이라는 관념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창조의 상대적 분야에서 가장 오랜 수명을 가졌던 어떤 물건의 생애를 생각해 보는 일인데, 인도인들은 창조의 분야에서 가장 오랜 수명을 가진 존재를 거룩한 어머니 혹은 우주적 어머니라고 불렀다. 우주적 어머니로부터 인간의 생애에 이르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단위가 놓여 있는데, 어머니의 시간 개념으로 가장 말단의 단위인 칼리 유가(kali yuga) 하나만 해도 사람의 생애 43만 2천년이다. 그래서 영원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머니와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벽이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연인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사고하는 방식이 인도인의 시간관이었다.
'궁극'을 경험한 자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힘겹게 찾아 올라갔던 정신의 여정은 간단한 한마디 말로 녹아야 하며, 그 말 한마디가 인생 이해의 전부를 뒤집어엎어서 사람은 단번에, 아주 완전히, 모든 얽매임을 다 벗은 영원한 해탈의 지경에 올라가게 한다.
'궁극'의 의식에 도달한 사람은 개인 생명의 수준에서 행하던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우주적 생명의 수준으로 올라간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단맛을 본 사람은 모든 단맛을 다 이기듯이 우주적인 의식을 체험했던 사람은 그 축복의 맛을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한다. '궁극'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미 인정세태의 괴로움은 사소한 추억에 불과하리라.

이 궁극의 노래는 노래의 언어로, 노래의 귀를 통해 받아들여야 한다. 사변적인 언어로 받아들이면 아름다운 향연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영혼의 가락과 정열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당신의 내면 속에서 따라부르는 그 노랫소리가 바로 이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된다.


대략적인 줄거리와 서술 방식


『바가바드기타』는 쿠루크셰트라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무대로 한다. 하스티나푸라에 자리잡은 쿠루족의 두 형제 가문, 즉 카우라바 형제들과 판다바 형제들이 쿠루크셰트라 들판 양편에 군대를 대치시키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살육전을 벌이려는 극적인 상황에서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바라타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였던 아르주나의 맏형이 두료다나의 술책에 빠져 도박으로 나라와 형제들을 다 잃고 13년 간 고행을 하게 된다. 시일이 지났을 때 두료다나는 반환을 거절했고, 생활을 꾸려 나갈 약간의 땅조차 수용하지 않아 결국 형제끼리 창을 겨누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이야기는 비화되었다. 아르주나는 이 전쟁에 대한 확실한 대의 명분을 가지고 전쟁터로 나가지만 상대편 군대에서 자기 사촌들, 아저씨, 할아버지 등 혈족들을 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혈족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혈족을 죽이고 왕국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숲으로 은거하여 궁극자에 대한 명상에 몰두하는 고행자의 삶을 택하려 한다. 그때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싸우라'(ii. 8)고 말하면서 둘의 토론이 시작된다.
이야기의 서두에 전쟁이 나온 것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모순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전쟁이 주는 극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두료다나와 아르주나는 같은 전장에 서 있지만 그들의 싸움은 이미 같은 종류가 아니다. 두료다나는 다만 권력과 부를 유지하려는 자기욕망의 표현인 반면, 아르주나는 자신의 고뇌와 만인의 사명을 안고 싸우는 입장이다. 이 둘은 모두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말끔히 요약되며 크리슈나가 '싸우라'고 주장한 요점도 여기서 비롯된다.

오래된 인도의 경전인 이 책은 어느 경전과 같이 주석가들의 적절한 비유가 돋보인다. 라다크리슈난, 간디, 함석헌 등의 저술가들은 경전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세계의 고전들과 인물들을 끌어다 이 책의 '보편화'에 기여했다. 궁극의 초월정신은 어디든 통하며 지고의 경지에서 마주앉아 세상을 논한다.
『바가바드기타』는 인도의 경전 중 가장 궁극에 가까운 저술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엄격한 카스트 제도 역시 궁극의 입장에서는 한낱 사소한 제도에 불과하다.


"어떠한 신자가 신앙을 가지고 어떤 형태의 신을 예배하기를 원하더라도 나는 그의 신앙을 튼튼하게 해준다"
……
프리다의 아들아, 내게 돌아오는 자는 비록 죄의 탯집에서 났더라도, 여자로, 바이샤로, 수드라로 났더라도 다 최고의 경지에 이를 것이니,



사실 『바가바드기타』 안에는 어떤 경지나 단계 같은 것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다만 깊이 이해하고, 깨끗이 비우고, 참되게 행동하는 것을 통해 신에게 보다 깊이 다가가고자 하는 간절함이 가득할 뿐이다.


궁극의 가르침


너는 슬퍼할 수 없는 자를 위하여 슬퍼하고 있다.



아르주나는 관계에 현혹되어 있다. 즉 그는 아직도 제자나 스승, 친척은 그들 자체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니고 자아 때문에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난 자는 반드시 죽게 되고, 죽는 자는 반드시 나는데,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자신이 어찌할 수 있다는 듯이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르주나가 옅은 감정에 정신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아르주나는 자아를 우주적 입장에서 사려하기 힘들다. 적과의 갈등과 대립이 2중, 3중고로 다가오는 이유도 물질과 환경에 영향을 받고 홀가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압박자와 고통과 죽음에 직면한다.
인간의 생에서 모든 행동은 필연적으로 반동을 받는 법이고, 우리의 영혼을 끝까지 얽어매 지고자와의 대면을 어렵게 한다.
이 때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들려주는 첫 번째 궁극은 '평정한 마음'이다. 꼭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어떤 일도 없으며, 아직도 얻지 못해서 꼭 얻어야 한다는 어떤 물건도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다. 이 때 나의 행동은 행동 자체에 있는 것이지 결과에 이끌리지 않는다.


행동의 결과를 네 동기가 되게 하지 마라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자유는 우리의 모든 의식을 지고자에게 기울여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것은 자유처럼 보이지만 사실 감각의 지배를 받는 것일 뿐이다. '무엇을 조금 알면 독단적이 되고, 조금 더 알면 묻게 되고, 또 조금 더 알면 기도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존재해 나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덕분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겸손해진다. 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사상가는 모두 종교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진정한 자유를 얻은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우주적 영(靈)의 기계로서, 모든 운명을 지고자에게 맡기고 또 우주적 질서의 유지를 위해 살아간다. 자신의 운명을 모두 맡길 수 있으려면 믿음도 두터워야 하겠지만, 세계에 대한 절대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이로서 신과 나는 하나가 된다. 신과 하나가 될 때 나의 마음은 평정을 되찾으며 나의 행동과 말들은 생기가 돋는다. 나는 더 이상 누구의 지배도 아니며 신을 위해 일할 뿐이며, 모든 것은 신에 의해 안배되어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차가 아무리 빠르게 달린다 해도 차부는 움직이지 않듯이, 굴곡이 많은 생을 살아가는 우리 안에는 신이 타고 있다.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의 차부였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는 무장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졌을 때면 언제나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가 실망에 떨어졌을 때 위로해 주시기를 지체하지 않지만, 우리를 위해 우리 갈 곳을 대신 기어 올라가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로 돌아갈 때까지 길이 참고 견디시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궁극의 평정을 얻고 난 후 두 번째 궁극의 가르침은 '행위'이다.


너는 네 명함을 받은 일을 행하여라. 행(行)은 비행(非行)보다 나으니라. 행함 없이는 네 육신의 부지조차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바가바드기타』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실천'의 덕목이다. 평정을 갖춘 행위는 십만 대군보다 의연하며 강력하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탄생하였다.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일 일하기를 그친다면 이 세계는 망해 버릴 것이다. 나는 혼란을 일으킨 자가 될 것이요,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지식은 그 완전한 지경에서는 이해와 체험의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완전한 지경에 이르려면 세계에 대한 이해와 체험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행위'라 함은 노자가 주장하는 '무위(無爲)'를 포함한다. 무위는 자신의 행위하되 따로 행위한다고 말할 것이 없는 상태다. 항상 일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일하는 자라는 주장을 아니하는 사람의 '행위'는 무행위요, 외양으로는 행동을 피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천만 칸 기와집을 짓고 있는 사람의 무행위는 행위다. 이러한 행위의 이치를 깨우친 사람은 자신이 하는 행위는 없고, 지고자의 '명'을 받고 행할 뿐이다. 마치 차부가 이끌 듯이 움직이는 말과 같다.


행위 속에 무행위를 보며 무행위 속에 행위를 보는 자는 사람 중에서 깨달음을 얻는 자니라. 그러한 사람이 요가를 닦는 사람이요 모든 행위를 완성하였느니라.



그의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고 행동자는 하나님이지 그 자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행위를 이겨낼 때까지 언제고 기다려 줄 수는 있지만, 직접 전장에 나가거나 산을 기어오르지는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이다. 나는 자신를 무(無)에까지 낮춘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보는 것이 『기타』의 사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자연을 닮았다. 하나님이 부리는 대로 꽃을 피우고 바람을 일으키는 대자연과 나는 하나가 되며 천지인(天地人)의 관계를 완성한다. 이 때 나의 행위는 지속적이어야 한다. 오래된 동양의 정신에서 '불성무물不誠無物', 즉 성실하지 않으면 만물이 생장할 수 없다고 한다. 어머니의 사랑이 없이 아이는 어린이도 될 수 없으며, 설사 어른이 되었다 할지라도 사랑을 나누어줄 수 없다. 세상에 사랑을 나누얼 줄 수 없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세상을 위태롭게 만드는 사람이다. 세상은 지고자의 지속적인 사랑과 인내로운 기다림으로 인해 유지되고 있다.


 활을 양껏 당기지 않고는 살이 힘있게 나갈 수 없고, 마음을 속으로 당기어 그 밑바닥에까지 이르게 하지 않고는 힘이 날 수 없다. 그리고 마음이 활발하며 강하지 않고는 세상에서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크리슈나는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성공하려면 정화, 즉 희생을 계속함이 필요한 것을 말해 준다.



무위는 곧 내버림이다. 아르주나가 고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버리지 못하고 구질구질하게 안고 갔기 때문이다.


장자 - 안회(顔回)가 "감히 묻잡니다. 마음 씻기[心齋]란 무엇입니까" 한다. 중니(仲尼)가 "네 뜻을 하나로 하여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운으로 들어라. 들음은 귀에 그치는 것이고, 마음은 가져다 맞추는 쪽[符]에 그치느니라. 기운이란 비어 가지고 물건을 대하는 것이다. 도는 오직 빔에 모인다. 비게 함이 마음 씻음이니라"고 답한다. 안회가 "제가 처음에 그렇게 시켜주심을 얻지 못했을 때 정말 스스로 회(回)이옵더니, 시켜주심을 얻고 나니 비로소 회란 것이 있지 않습니다. 이러면 빔이라 할 만하옵니까." 스승이 "됐다" 하였다.



내버림이란 것은 수십년 동안 자신이 갖고 있었던 성향이나 습관, 이성 등을 모두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자아의 저항도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내버림은 행위를 통해 높은 수준(영적인 수준)에 있는 신령한 의식 안에 존재하는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람이 무지하면 수십 년 동안 틀린 지식을 신봉할 수 있다. 하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진리의 빛을 쬔 사람이라면 승복할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체험을 통해 신 의식으로 들어간다. 거기가 바로 집 중의 편안한 집이며, 완성된 자아의 모습이다.


진정한 신


『기타』의 특징은 앞에서 말한 대로 유연한 신앙에 있다. 궁극의 종교로 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바로 유연성이다. 아직도 중동에서는 민족간 분쟁과 종교간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윌 듀런트는 종교 등의 미묘한 문제로 생기는 대립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만행의 역사를 보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이 없고 반드시 지정된 신만을 섬겨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오지에 가서 똑같은 신을 섬기지 않는다고 해서 불경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신앙의 강요는 가장 잔인한 폭력이다. 왜냐하면 다른 신을 믿는 사람과 그의 신 둘을 모두 죽이기 때문이다.


맑은 물을 얻기 전에는 더러운 물을 버리지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인도의 만신당(萬神堂) 안에는 군중들이 섬기던 가지가지의 신들이 다 모시어져 있다. 하늘의 신, 바다의 신, 시내와 숲의 신, 먼 옛날의 전설의 신, 부락 호수의 남신 여신. 시대가 지나가는 동안 어떤 것도 잃어서는 아니 된다는 두려움에, 모든 진실된 확신을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말고 조화시켜 보자는 생각에, 그것은 자신 속에 형형색색의 요소와 동기를 다 포함하는 하나의 엄청난 종합에 도달하게 됐다. 종교 안에서 깜깜하고 원시적인 미신이 시글거리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신은 욕망에 의해 그려진 신이기 때문에 『기타』가 추구하는 초월적 신과는 다르다. 이들은 자신이 욕구하는 것만을 취할 뿐이다.

거룩한 바탈은 해탈을 위한 것이고 귀신 바탈은 얽어매임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판두족의 아들아, 슬퍼하지 마라, 너는 거룩한 바탈로 났느니라.



정통종교의 이름으로 자유와 독립, 인간의 존엄을 거짓으로 해석한 종교가 세상을 병들게 하고 있다. 처음의 말씀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해석이 나오는 현상은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스승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거나 그 안에 자신의 사리사욕을 살짝 집어넣은 경우다. 가르침이 천년이고 만년이고 전달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온몸을 비우고 맑은 정신으로 그저 지고자의 명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임의의 판단은 불성실과 죄악의 결정적인 증거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안다는 것과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저 주는 복만을 바라는 것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니다.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은 죄 속에 있으면서도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는 그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지 결코 덮어놓고 무조건 그러시는 것은 아니다. 연잎이 물에 젖지 않는 것은 젖지 않는 성질을 제 속에 길러내어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누가 거기 무슨 칠을 해주어서는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뺑끼칠장이가 아니다. 그런 따위 그릇된 신앙이야말로 이 세상의 권세자와 야합하여 역사를 언제까지라도 구정물 속에 썩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일을 가리켜 예수는 "거룩한 것을 돼지에게 주는 것"이라 했다.

우리가 이러한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이유는 우리 마음 속에 악한 마음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참된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이든 행위든 성(誠)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변태되기 십상이다. 궁극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무기는 '성실함' 밖에 없다. 그것도 임의에 따라 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이미 나의 결정을 초월한 행위이다. 나의 최고의 판단에 의한 행위는 신이 시키는 행위다. 우리가 인(仁)을 생각하고 있으면 인을 행할 수 있지만, 인한 행위가 수천 년에 걸쳐 나오지 않는 이유는 인이 틀려서가 아니라 행위의 지속성을 담보할 바탕이 허약하기 때문이다. 나의 판단이란 것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우리가 자유라 부르기는 거북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생 동안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자유가 내가 생각했던 자유보다 더 자유로워 보이기도 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돌바람 2006-09-13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가를 하려는데 궁금해서 책도 보려고 합니다. 땡스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