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낳고 나서 좀 더 과묵해지고, 현실 처세에 따라야 하건만..
불온한 승주나무는 그렇게 하질 못하겠습니다.

자식에게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주는 것만으로는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겠지요.

물질적인 보호자, 육체적인 보호자는 내가 보호를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니 별다른 의미를 붙일 게 없겠지요.
내가 받지 못했던 것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버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그것을 물려주어야 나는 아버지로서 부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기를 낳으면 돈 벌 궁리, 분유값 벌 궁리를 하면서 사람이 현실 친화적으로 변한다는데, 저는 오히려 더 불온해지고 사회 비판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고 봐주십시오. 제가 아기와 가정을 다 포기하고 사는 파렴치한 놈은 아닙니다.

김수영의 말마따나 "생활은 견디는 것"이라는 진리를 무척이나 존중합니다.

저는 아기의 시대에 여전히 "공포의 언어"가 활개를 치는 모습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경찰이 쌍용차 노조원에게 실탄을 제외한 모든 공격수단을 쓴 것은 국민에 대한 전쟁선포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공포의 언어"가 본격적으로 대한민국을 접수했다고 생각합니다.


엘 고어 씨의 <이성의 위기>는 "이성의 언어"와 "공포의 언어"를 구분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공포는 이성의 가장 강력한 적이다. 공포와 이성은 둘 다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이지만 둘의 관계는 무척 불안정하다. 때로는 이성이 공포를 해소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공포가 이성을 마비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 미국 독립혁명이 일어나기 20년 전 에드먼드 버크가 영국에서 썼듯이 "어떠한 열정도 공포만큼이나 사람의 마음에서 행동과 이성의 힘을 그토록 효과적으로 빼앗지 못한다"
- 이성의 위기, 43쪽



저는 개인적으로 "공포의 언어"를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여기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습니다.

대치동에서 월급 많이 받는 논술강사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입시 컨설팅을 하는 회사였죠. 전교 1등 하는 친구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부모님과 사장의 방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방에서 나오는 친구는 사색이 다 됩니다. 그리고 좀비처럼 이 강좌 저 강좌를 등록하는 데 수표를 남발합니다. 어머니는 옆에서 돈을 세고 있습니다.

전교 1등하는 친구가 사색의 좀비가 된 것은 간단합니다. 사장이 "공포의 언어"를 구사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간단한 매뉴얼이죠. 그 친구에게 <전국 석차>를 들이대면 됩니다. 학교가 1500여 개가 되는데, 그 중에서 1명씩만 추려도 그 학생은 전국에서 1500등이 됩니다. 서울대 입학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전국에서 잘 하는 친구의 내신성적과 이런 저런 실적표를 보여줍니다. 일종의 <모범답안지>인데, 이런 모범답안지를 소유하고 있는 친구들이 널렸다고 말하면 학생은 사색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팔 다리 다 잘리는 신세가 됩니다. 아주 순식간에 학생의 자긍심은 산산히 무너집니다. 이 학생에게는 약간의 오만함만 눌러주는 것이 좋습니다. 사색의 좀비가 되고 나면 값비싼 강좌(강의의 질을 보장할 수 없는)에 다급하게 등록을 합니다.

이런 행태를 1년 넘게 지켜보면서 나는 영혼이 개먹어들어가는 느낌을 받아서 어떻게든 도망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회사 저 회사 전전하다가 영혼을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공포의 언어"입니다. 나는 내 자식에게 "공포의 언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조차도 알려주기 싫습니다. 역사책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그 언어가 사실은 아버지의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도록 세상을 "이성의 언어"로 바꿔놓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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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8-07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어만일까요? 이런 세상을 내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데 왜 세상은 이다지도 가혹한 것일까 생각되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아이를 보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다시 생각하게도 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