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되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버려야 한다면 차라리 대통령 안 하겠다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말하던 당신,무뚝뚝하기만 하던 당신의 속 깊은 사랑에 저는 말없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 2002년 11월 19일 권양숙 여사가 남편에게 쓴 편지 일부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친구들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한다.
민주주의, 인권, 가치, 지도자 등 여러 가지 수사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내가 고개를 끄덕인 평가는 '남자'였다.
노무현을 보면서 "남자답게 사는 법"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평가는 어찌 보면 편협하고 감정적이고 마초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내가 100%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노무현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맹자>의 유명한 구절 중에서 후세의 선비들이 '대장부 편'이라고 이름붙인 대목이 있다.

"천하라는 넓은 거처에 살고, 천하의 올바른 자리에 서고, 천하의 큰 도리를 행하고,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해나가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리를 행하며, 부귀도 그의 마음을 음탕하게 할 수 없고, 빈천도 그의 마음을 이동할 수 없으며, 위세나 무력도 그 마음을 굽히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대장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與民由之, 不得志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맹자, 등문공 하>


외형으로만 보면 토이남, 초식남( 자기애가 강하고 온순하며 ‘여자인 친구’가 많은 유형의 남자)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남자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결정적으로 용기 있게 결단하고 책임지는 모습으로서의 남자도 많이 사라졌다. 한동안 남자를 구경하기가 정말 어려웠는데, 어쩌면 대한민국의 유일한 남자였던 노무현이 떠남으로써 남자에 대한 유형을 잊지 않도록 남기고 싶다.
글을 쓰다 보면 노무현 찬양글이 될 위험이 있지만, 미안하지만 찬양이라도 좀 해야겠다. 대한민국의 남자로서 노무현의 인생과 일상을 살펴보면 좀 부끄러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이 글은 그런 나를 위로하고 자책하는 의미로 쓴다. 


낮은 곳에 임할 줄 아는 남자









 

독설닷컴 고재열 기자가 쓴 포스팅에 첨부된 사진을 파노라마식으로 올려 본다.
요양원 어르신들과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당연히 뒷자리 말석으로 가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 (첫 번째 사진)
하지만 어르신들은 앞자리 상석에 노무현 대통령의 자리를 마련했다고 안내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그 자리를 재차 물은 다음에야 상석에 앉았다. (두 번째 사진)
사진을 찍을 때도 어르신들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세 번째 사진)
사진을 다 찍고 나서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네 번째 사진) 




 

노무현 대통령이 다리를 쫙 벌리고 약간은 우스운 포즈를 취하는 이유는
여성들에 비해 자신의 키가 크기 때문에 키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노무현 대통령 뒤에 선 여성의 표정이 나올 수 있었다.
평소에 따뜻한 인간성과 세심한 배려가 없다면 나올 수 없는 장면이다.



전경들이 경례를 하자 노무현 대통령이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하고 있다.

다른 정치인 같으면 손을 살짝 드는 정도로 했을 텐데,
정치인으로서 누구를 높여야 하는지를 뼛속까지 깊이 아는 것이다.
전경 역시 한 사람의 귀중한 국민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노무현 대통령의 가르침을 전경들은 이해하고 있을까?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이 끝나자마자 시민들이 마련한 분향소를 파괴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영정을 찢고 짓밟아 버리는 전경들을 보면서 이 사진이 떠올랐다.




▲ 전경에 의해 찢겨진 노무현 대통령의 영정과 경찰이 노무현 대통령의 분향소를 부수는 장면. (사진 : 문순c)

예로부터 '불치하문(不恥下問 :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을 잘한 정치가와 그 나라는 오랫동안 융성했다. 춘추시대 제나라에서는 수도에 학당을 만들어 놓고 천하의 인재들을 정성껏 모셨다. 그것을 직하학당이라고 한다. 현인 순자 등이 좨주로 있으면서 나라의 일에 참여했고, 왕은 어떻게 하면 인재들을 불러모으고 가르침을 들을 수 있을지 밤낮 고민했다. 대통령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엄청나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된 사람일수록 낮은 곳을 생각하고 낮은 곳에 머무르려고 하면 권력은 그에게 모이는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도리어 높은 곳을 생각하면 점점 권력으로부터 도태될 뿐이다. 이것이 노무현과 MB의 차이이다.


위세나 무력도 그 마음을 굽히게 할 수 없다



3당야합은 당시 정치현실에서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처음에 내세웠던 명분이야 어쨌든 대의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팽개쳐도 된다는 논리가 강했다. 여기서의 대의란 '선거 승리'였다. 승리를 위해서는 영혼까지 팔고 싶다는 생각이 여기서부터 싹텄고, 정치인의 말과 생각은 가벼운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화된 것도 이때쯤이 아닌가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정치인의 부류와 같이 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이때부터 방랑의 길, 바보 노무현의 길로 들어선다.





인신구속이란 누구에게든 두려운 것이다. 구속과 죽음을 초월한 사람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부림사건(전두환 신군부 정권 초기인 1981년 9월 부산지역 민주인사들이 이적 표현물을 학습했다는 이유로 정부 전복집단으로 매도돼 총 22명이 구속된 5공화국 최대의 용공조작 사건)을 맡고 고문당한 학생을 보았을 때, 노무현 당시 변호사는 자신의 아이도 이제 곧 대학생이 될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민주/인권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87년 9월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의 사인 규명작업에 나섰다가 3자 개입과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되고 만다. 전두환과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되는데, 5공 청문회 때 명패를 집어던지는 등 국민의 마음을 대변해준 활약으로 청문회 스타로 이름을 알린다. 노무현 대통령이 숨졌을 때 전두환은 "고통스럽고 감내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해서도 전직대통령으로서 꿋꿋하게 대응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는 말을 남겼다. 전두환에게 '꿋꿋하다'는 말과, 노무현에게 '꿋꿋하다'는 말은 전혀 다른 단어다. 







부시와 맞장을 뜰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오만한 부시조차도 노무현 앞에서는 답변이 궁색해지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마이클 그린 백악관 선임 보좌관도 노무현 대통령은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만난 수십명의 정상 중 가장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국내를 의식한 반미 발언으로 미국을 당혹시켰다. 그러나 한미동맹에 대한 그의 기여는 (친미 대통령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이상이었다. 그가 퇴임하는 2008년 2월 현재 한미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누구에게 머리를 숙이고, 누구에게 숙이지 말아야 할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 이빨이 다 빠진 말년 대통령 부시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오버를 한 이명박. 당시 대선 후보였던 오바마에 대한 정보도 관심도 없었기에 한미관계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바마 당선 후에 국민들은 한미관계를 걱정해야 했다. 줏대도 없고 정세분석도 없었고 남자다움도 없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 현대사에 남긴 민주주의적 가치들에 대해서 말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오랫 동안 연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더욱 성숙됐는지 오히려 위태롭게 되는 빌미를 제공했는지를 판단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

다만 한 인간의 삶으로 볼 때 노무현 대통령은 남자로서 존경할 만한 삶을 살았다.

"여러분들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지만 나는 뙤양볕에서 이렇게 땡볕을 얻어맞는 그 맛이 있습니다. 그 맛이 좀 부족하니 저는 모자도 벗겠습니다." (시사매거진 2580... 노무현의 비공개 파일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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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5-31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 남자다운 남자, 저도 그가 참 좋습니다.
추천!

순오기 2009-06-03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 노무현 좋지요~~ 국민의 대통령이었음을 사진이 말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