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파리 - Breathles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 영화 <똥파리>의 한 장면. 상훈(오른쪽)은 사랑하는 애인에게도 한 번 웃어주지 못할 정도로 폭력에 깊이 노출돼 있었다.


<똥파리>가 상기시켜준 가정폭력의 기억

"세상은 엿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영화 카피처럼 온통 욕지거리 투성이 영화를 보고 나는 점집에 가서 무당에게 욕바가지를 한껏 얻어들은 것처럼 후련함을 느꼈다. 

 책이나 영화 중 유독 글로 남기고 싶은 작품들은 대체로 자기고백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영화 <똥파리>를 보았을 때 영화가 보여준 '폭력의 언어'가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결손가정'이라는 말이 대한민국에서는 참 우습다. 결손하지 않은 가정이 어디 있는지 묻고 싶을 정도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나오는 폭력이 끝에까지 쉬지 않고 이어진다. 영화 중간에 삽입된 10초 남짓한 장면이 모든 '폭력'을 설명해 준다. 아들(상훈)이 아버지를 때리는 근친폭력이 크게 문제시되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이다.

단지 나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휘두른 폭력의 실체를 모두 알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날마다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울먹이며 "승주야 너는 커서 아내를 울리지 마라, 아내를 때리지 마라"라고 하신 말씀이 평생 남아 있다. 그래서 결혼한 후에는 공처가가 됐고 아내의 눈물에 심장이 오그라들 것만 같은 못난 남자가 됐다. 유년 시절 가정폭력의 경험이 얼마나 생생하냐면 어머니가 들려준 묘사가 한순간도 빠짐없이 지금도 남아 있다.

뱃일을 하셨던 아버지는 배삯을 받는 날은 노름방에 직행한다. 그 날도 노름방에 들어가는데 술까지 한잔 해서 뒷주머니에 수표가 반쯤 나와 있었다. 동네 사람이 어머니에게 제보를 해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수표'를 빼내기 위해서 사투를 벌여야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도 못할 만큼 폭력을 휘둘렀고 어머니는 그 매를 다 맞으면서 끝내 수표를 빼앗는 데 성공했다. 어머니는 그 일로 한동안 숨어 다녀야 했다. 아버지의 폭력을 내면으로부터 밀어내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고, 얼마나 많은 책을 소요한지 모르겠다.

나는 일상의 폭력을 일상의 집요함을 통해 극복한 케이스이지만, <똥파리>의 '상훈'은 그렇지 못하다. 극단적인 폭력과 극단적인 사건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 버렸다. 극단적인 사건은 한 사람의 전 인생을 억누르는 경우가 있다. 상훈의 경우가 그렇다. 
 


똥파리의 언어는 바로 '폭력' 그 자체

 <똥파리>는 첫장면부터 충격적이다. 뉴스나 블로그 등을 보면 첫장면에 대한 이야기가 꽤 많다.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흠씬 패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가 남자를 때려눕히고 여자에게 뺨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거기다 침까지 뱉는다.

이 장면은 '폭력'을 언어로 이해하지 않으면 좀처럼 해석되지 않는다. 즉, 상훈은 연민의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도 '폭력'이며, 자신의 사랑표현조차도 '폭력'을 쓴다. 육체폭력이 되지 못하면 '언어폭력'이라도 쓴다. 폭력이라는 알파벳이 새겨진 것처럼 그의 폭력적인 문자는 영화 전체를 헤집고 다닌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사는 사채빚을 받으러 간 집에서 한 남자가 가족들을 사정없이 패고 있을 때, 동생들에게 '작업'을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남자를 때려눕히면서 "밖에서는 X도 아닌 것이 집에서만 김일성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무능력자와 김일성, 폭력을 한 문장에 담아내면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베어냈다. 폭력이란 행위 그 자체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미 징후를 드러낸다. 말이 들어갈 수 있다면 폭력이 낄 수 없다. 고립과 무능력만큼 폭력에 어울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영화는 당시 정치상황과 사회구조를 설명하는 어떠한 장면도 남기지 않았고, 단지 사적인 공간만으로 사회 전체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모습도 날카롭게 그려내고 있다. 예컨대 가족을 죽인 죄로 15년을 복역한 상훈 아버지의 모습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한창 때는 가족들에게 허구헌날 폭력을 일삼다가 감옥에 들어갔다 출소한 후에는 아들에게 밤마다 폭력을 당해야 했다. 아버지의 폭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가 자해를 한 것이 가족에 대한 죄책감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폭력을 쓸 수 없는 처지'에 대한 욕구불만에서 나온 '자기에게로의 폭력'으로 이해한다. 죄책감에 의한 자살시도로 해석될 만한 근거장면을 찾을 수 없다. 폭력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할 때 처할 수 있는 극단적인 형태를 상훈의 아버지가 보여주었다면, 더 이상 폭력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작정할 때 처할 수 있는 극단적인 형태는 바로 주인공 '상훈'이 보여준다.

상훈이 자신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연희와 사랑을 쌓아가며 점차 폭력의 언어가 치유되고 폭력 자체를 폐기할 수 있게 된 상황과 폭력의 언어를 버렸을 때 상훈이 감당해야 할 상황은 일종의 선택지라고 할 수 있다. 결말을 봐야 하는 영화의 배열 자체를 가지고 (상훈의 슬픈 결말에 대해서) 한탄을 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로 인해 폭력 언어를 포기했을 때 사회로부터 어떤 단죄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더욱 분명하게 느꼈다는 점을 소득으로 생각할 수 있다.


리얼리티 <똥파리>의 활주로 역할을 해준 <워낭소리> 고마워

뉴스보도에 따르면 <똥파리>는 <워낭소리>보다 흥행속도가 더 빠르다고 한다. <워낭소리>는 300만이라는 기적적인 숫자를 바라보다가 막을 걷었고, <똥파리>가 새로이 떠오르고 있기 때문에 최근의 보도는 <똥파리> 중심이 될 수밖에 없지만 나는 다른 방식으로 <워낭소리>의 가치를 평가하고 싶다. <똥파리>라는 독립영화가 등장할 수 있도록 텃밭을 일궈준 공로자이기 때문이다. 춘추시대 연나라의 '곽외'라는 사람이 생각난다.

연나라 소왕(昭王)이 천하의 현자를 구하자 곽외가 "먼저 이 곽외부터 쓰면 저보다 현명한 사람들이 어찌 천리길을 마다하겠습니까?"라고 자천했다. 연 소왕이 곽외를 스승으로 삼자 악의(樂毅)가 위(魏)나라에서 오고 추연(鄒衍)이 제(齊)나라에서 오는 등 많은 현자들이 몰려들었다.
- 사마천 <사기>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워낭소리>는 비교적 단순한 스토리텔링과 드라마타이징으로 훈훈한 감동을 주는 독립영화이지만, <똥파리>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충격적인 작품이다.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리얼리티가 살아날 수 있도록 활주로 역할을 해준 <워낭소리>에 대해서 <똥파리>의 관객들은 고맙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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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4-23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똥파리가 이런 느낌의 영화였군요. 날 것 그대로의 충격이라니, 심호흡이 필요하겠어요.

승주나무 2009-04-23 21:53   좋아요 0 | URL
한번 기지개 펴시고 보세요^^

프레이야 2009-04-23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까말까 망설여지는 영화에요.
독립영화의 활주에 박차를 가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선 끌리지만
보고나면 하루종일 그놈의 욕설과 폭력적인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보고싶은쪽으로 더..

승주나무 2009-04-23 21:54   좋아요 0 | URL
요즘 위선을 벗고 까놓고 이야기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김앤장의 변호사님들처럼 젠틀하게 웃으며 세상에서 이보다 더 잔인할 수 없는 짓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보다 대놓고 폭력쓰고 언어폭력쓰는 이 영화가 더 정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정직한 폭력...멋있잖아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