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없는'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라서 탄탄대로는 못 밟는 스타일



언론운동에 몇 년 관여를 하다 보니 신문이나 방송을 불문하고 많은 '종사자'들을 만나게 된다. 술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평소에 듣지 못하는 이야기도 많이 듣게 된다.
그 날은 우연히 MBC 뉴스데스크 신경민 앵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화면의 사실이 현장의 진실과 다를 수 있다는 점, 그래서 언론, 특히 방송의 구조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시청자들이 새해 첫날 새벽부터 현장 실습 교재로 열공했습니다”
- 지난해 12월 31일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지워버린 KBS 의 제야의종 행사 중계를 정면으로 비판한 코멘트

MBC 뉴스데스크나 뉴스는 권력 핵심에 대한 비판이 많고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기 때문에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미디어비평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도 MBC인데, 이런 뉴스들을 시청자에게 전달해주는 앵커가 이 이미지를 대표하다 보니 앵커들이 진보적이라는 착각을 하기 쉽다.

특히 지금은 MBC의 사장인 엄기영 씨의 이미지는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MBC 관계자들이 말하는 엄기영 씨는 실용적인 보수주의자다. 이명박 정권에서 사장 자리를 잘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현 정부와 코드가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요즘 '징계 문제'로 이슈의 중심으로 떠오른 신경민 앵커는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을까. 제야의 종소리 조작 행위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던지는 모습을 보면 영락 없는 진보주의자 같지만 MBC 직원이 말하는 신경민 앵커는 '보수주의자'다. 다만 '합리적'인 보수주의자일 따름이다. 상식을 기준으로 해서 맞지 않으면 아무리 뜻이 좋아도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성향 때문에 MBC의 임원들이 그를 중용하는 것에 대해 몹시 신중해다는 후문도 들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칼럼이 있어서 인용한다.

그의 뉴스 클로징은 ‘양쪽의 반성을 촉구한다’거나 ‘귀추가 주목된다’는 식으로 관점을 어물쩍 뭉개버리지 않는다. 고추냉이가 코를 뚫듯 명쾌하지만 입에 거치적거리는 뼈를 발라내는 대신 뼈째 먹으라고 잔칼질을 해서 내오기 때문에 오래 씹어 삼켜야 제 맛을 본다.
- 시사IN, 74호(2009년 2월 10일), 묻고 따져봐야 OK 하는 남자


자유기고가 유선주 씨의 스케치다. 그가 신 앵커와 친분이 있든 그렇지 않든 관계 없이 이 논평에서는 신 앵커의 특징이 잘 표현돼 있다. 신 앵커가 직접 코멘트한 대목을 보면 그의 '보수주의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방송기자 생활 30년을 맞은 신 앵커는 방통심의위의 징계 움직임에 대해 "앵커(anchor)는 뉴스를 요약하는 사람이 아니다. 말 그대로 TV 저널리즘이 외풍에 흔들리는 것을 막아주는 '고정 장치'다. 그런 구실을 하라고 나이 든 사람에게 앵커를 맡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시사IN 77호


고전의 인물을 예로 든다면 '급암'(한무제 때 활약했던 신하로 직간하기로 유명했음)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한무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폐하께서는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만 인의를 베풀려고 합니다."라고 대들었던 신하였다. 한무제는 급암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마음속으로 급암을 존경했다.

일찍이 한무제가 장막 안에 있을 때 급암이 들어와서 일을 보고하려고 했다. 이때 천자는 관을 쓰고 있지 않았으므로 멀리서 급암을 바라보고 장막 뒤로 몸을 피하고 다른 사람을 시켜 보고를 재가하도록 했다. 
 - 사기열전, 급정열전

하지만 급암은 중용되지 못하고 한직에 머무르다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우리 사회에 왜 보수가 필요한지 알게 해준 사람


나도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하는 편견을 갖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골수 보수주의자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 사회에는 보수도 없고 진보도 없고 단지 기회주의자밖에 없다는 어떤 사람의 말이 떠오른다. 미군정으로부터 시작해 60년이 넘는 동안 극우의 논리에 세뇌당한 찌든 때를 조금씩 벗겨내는 데 굉장히 많은 철학자들과 책들이 동원돼야 했다.

이명박을 지지하면 보수고 반대하면 진보라는 유치한 말장난보다는 상식을 세워놓고 물러남이 없는 보수주의자가 우리 사회에서는 절실하다. 더군다나 신 앵커는 '중용'의 가치를 아는 보수주의자 아닌가.

중용의 핵심 가치는 '시중'(時中, 時中之中의 약자. 때에 따라 급변하는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는 중용철학의 핵심사상)이다. 단지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고 중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촛불집회 당시 다음과 네이버의 대처를 보면 중용의 의미를 확연히 알 수 있다. 다음은 촛불에 대한 뉴스를 지속적으로 내보낸 반면 네이버는 촛불뉴스를 일반 뉴스와 동일한 1/n로 처리하는 우를 저질렀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공정했다고 자부했는데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마치 "내가 틀린 말 했냐?" "법대로 해 법대로!"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네이버가 중용이 없는 포털이라는 것은 이것으로 명백해졌다.

신경민 앵커는 촛불을 상세하게 소개하는 것은 물론 권력에 포화를 던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진보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보수주의라면 나도 기꺼이 힘을 보태겠다.

★ 반가운 소식이다. 신경민 앵커 멘트의 '징계 여부'를 판단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당시 신 앵커의 발언에 대해 '문제없음'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왜 그 멘트를 방통위에서 심의하는지는모르겠지만...


[영상] 문제가 된 1월 1일 MBC 뉴스데스크 'KBS 제야의종행사 중계 방송 비판' 클로징 멘트
 


27일 MBC 뉴스데스크 클로징 멘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람혼 2009-03-05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신경민 앵커의 클로징 멘트를 듣는 재미와 감동으로 뉴스를 보곤 합니다. 제대로 된 방통위라면 아마 징계 여부를 저울질하며 '문제 없음'이라는 밋밋한 멘트를 날리기 전에 신경민 앵커에게 작은 상이라도 하나 줬어야 하지 않을까요. 센스 없는 멘트를 날리는 방통위가 오히려 신경민 앵커의 저 촌철살인 클로징 멘트에서 한 수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승주나무 2009-03-05 13:41   좋아요 0 | URL
네~ 뉴스를 믹스하는 맛이 참 개운합니다. 날이 살아 있는 이런 뉴스라면 사람들이 좀비처럼 정부 하라는 대로 끌려다니지는 않겠죠. 그래서 정부가 엠비씨를 잡아먹으려고 악다구니를 하는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