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강렬했던 에티카와의 첫만남 

나의 인격이랄 수 있는 특징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대학 시절이다.
정확히 대학 2년생이다.

책도 안 읽고 공부도 하기 싫어했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대학에서는 '학문'이 하고 싶어졌다.
맨 처음 만난 책은 <철학 이야기>(윌 듀런트).
몇 년 후 철학을 복수전공하면서 이 첫만남이 무척 행운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철학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다음 권으로 <에티카>를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매일 세계 곳곳에서 사과나무를 심던 스피노자의 필생작을 여름 방학 두 달 내내 잡고 있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윤리학)은 인간과 우주의 질서를 기하학의 관점으로 서술한 대작이다. 때문에 명제, 공리, 정리, 요청 등 수학 용어가 많이 나오며 앞 장과 뒷 장이 연결되면서 머리가 뽀개지기 시작한다. 그 외에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하나는 노트에 정서를 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읽고 음미할 만한 구절을 10쪽이고 20쪽이고 정서를 했기 때문에 한 번 정서를 하고 책을 덮을 때도 많았다. 다른 하나는 그 당시 '노가다'라는 것을 처음 해봤다.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뙤약볕 아스팔트에서 낑낑대다가 옷을 갈아입고 7시부터 9시까지 단 두 시간 책을 읽으러 학교 도서관에 올라갔다. 나는 이 두 시간을 신앙처럼 모셨다.

신에 관해서, 이성에 관해서, 감정에 관해서, 감정의 예속에 관해서, 신을 향한 지적 사랑을 위해서, 자유를 위해서... (에티카의 대강의 순서)

어느 하나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본질을 다루는 책을 가장 먼저 만난 탓에 아직도 스피노자의 특징들이 몸에 배어 있다. 죄와 벌의 '라주미힌'(알라딘의 라주미힌이 아님)처럼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캐릭터를 갖게 된 것도 스피노자의 영향이 지대하다.

긍정은 힘이 커지는 것이며 부정은 힘이 작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에티카)


<정치론> 리뷰를 위한 메모 

인터파크와 인문사회과학출판협의회에서 공동 진행하는 '희망의 인문학' 프로그램의 담당자로부터 인문학 분야의 선정위원이 되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어째서 편독증 환자에게 그런 중요한 일을 시키는지 모르겠지만, 추천사를 위한 준비 메모 정도의 글을 남겨두려 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아버지이지만 이들의 꿈은 '정치'였다.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철학'을 최고 목표로 삼았다. 얼핏 철학하면 지고지순하며 초연해서 정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느 철학을 살펴봐도 '정치'의 결이 보이기 마련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정치'를 지향하지 않은 철학은 공허하다.
우리가 철학자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철학자들이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의 후손에게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대인'을 위해 고뇌하고 당대인에게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보편성을 타고 현재까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당대'는 곧 '정치'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때문에 '정치'라는 키워드로 철학자에게 접근하면 훤하게 길이 뚫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보지 못한다면 '당대'에 대한 이해가 그만큼 부족한 것이다.

고전으로서 정치론으로서 스피노자를 소개하는 이유를 500자에 담기란 이 책을 10번 읽기보다 어려울 것이다. 짧은 말로 간결하게 정리하는 훈련이 돼 있지 않은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스피노자에게는 '전복'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데, 그를 제외한 어떤 철학자도 책을 덮었을 때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힘들게 억제하도록 만든 사람이 없었다. 오죽 했으면 스피노자를 읽은 사람들이 '마녀의 빗자루 효과'라는 말을 만들어 냈을까. 1998년 여름 토익책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소리를 질렀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하다.

철학자들은, 우리를 괴롭히는 정념의 변화들을 사람들 스스로의 잘못으로 생겨난 악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들을 경건하게 보이려고, 대개는 그러한 정념들을 비웃거나, 측은해 하거나, 또는 비난하고, 저주한다. - <정치론> 맨 첫줄

첫줄부터 스피노자의 진면목이 보인다. 스피노자를 읽을 때는 '정념'이라는 개념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정념뿐만 아니라 '몸'의 가치 역시 스피노자로부터 환기된다. 니체는 '스피노자를 읽고 나서야 나는 몸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서양 철학에서 정념은 몸과 마찬가지로 저급하게 취급하는 오래된 전통이 있었다. 스피노자는 한솥밥 먹는 철학자들과 원천적으로 다른 길을 가겠노라는 선언을 한 셈이다. 이 선언은 평생동안 지켜졌다. 내가 스피노자에게 가장 큰 은혜를 입었고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구절을 공개하면

감정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감정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그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하면(또는 이해를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그 감정은 더 이상 나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 에티카 중에서

나는 이제까지 이 구절을 '처세술'적으로만 활용했다. 하지만 <정치론>의 첫구절을 읽음으로써 드디어 '이해', 즉 '정념에 대한 이해'라는 개념이 눈에 들어왔다. 10년만의 발견이었다.
10년 만에 또 다른 보너스를 얻었다. 바로 '안또니오 네그리'의 발견이다. 이 철학자는 적어도 두 사람에게 소개받았다. 드팀전 님과 다른 한 분이다. 네그리는 "철학사로는 스피노자를 도저히 담을 수 없다"는 평가를 했는데 전적으로 동감한다. 철학사를 펼 때마다 스피노자 부분을 맨 처음 읽으면서 이내 답답했던 마음이 네그리의 이 한마디로 드디어 '표현'을 얻어서 자유로워졌다.

아무튼 10년 만에 이 책을 만나게 되어 행복한 밤이다. 그리고 이 책을 널리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니 이것 역시 축복이다. 500자 추천사와는 별도로 이 시대에 왜 스피노자의 <정치론>을 읽지 않으면 안 되는지에 대한 글을 조만간 따로 내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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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9-02-18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 <정치론>의 새 국역본 출간이 너무 반가워서ㅡ예전에 <국가론>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적도 있었고 90년대에도 한 번 더 국역된 바 있었지만ㅡ출간 즉시 바로 구입해서 틈틈이 읽어오고 있는데요, 승주나무님의 개인사가 담긴 이 글을 읽으니 더욱 힘을 내서 독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로 내놓겠다고 말씀하신 <정치론>에 대한 글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승주나무 2009-02-22 23:1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열심히 읽고 있는데 스피노자에 대한 옛 추억이 떠오르면서 앞으로 갈 길이 밝아지는 듯합니다. 즐거운 독서를 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