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마지막 날 김정환 시인의 집을 찾아갔다. 독자 두 명과 당산동에 있는 시인의 자택을 찾았을 때 시인의 방에는 매우 익숙한 듯한 클래식 선율이 울리고 있었고 시인과 노모가 손님들을 맞았다. 김정환 시인은 편한 추리닝 차림으로 우리를 맞았는데, 작업 시간을 방해한 불청객이 돼 미안한 기분도 들었지만 편안한 차림으로 '무장해제'한 시인의 면모를 보는 맛도 좋았다. 거기다 시인이 직접 타다 준 '잔칫집 커피'를 마시며 최근 번역한 '셰익스피어 시리즈'와 세상만사에 대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나눴다.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 작업을 하고 있는 김정환 시인의 당산동 자택을 찾았다. 아침이슬 출판사에서 나온 1차분을 설명하며, 표지의 재질부터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품격을 갖추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시인은 작업과정을 소개했다. 


'4대 비극'이니 '5대 비극'이니 하는 건 일본에서 건너온 편의주의

고등학교 때부터 셰익스피어를 원전으로 즐겨 읽었다던 김정환 시인이 '뒤늦게' 셰익스피어 전집을 번역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유는 뭘까? '뒤늦게'라는 표현을 쓴 것은 "대학(서울대 영문과) 시절의 김정환씨를 알았던 친구들은 그가 셰익스피어 전공 교수가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한겨레 인터뷰) 시인은 "환갑이 넘으면 슬슬 작업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그 때 되면 기력이 쇠진해 총기도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라며 번역작업을 서두르게 된 이유를 밝혔다. 시인에 의하면 셰익스피어를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무대언어와 발성도 알아야 하고, 영어도 알고, 한글도 알고, 시도 좀 알아야" 하는데 시, 소설, 평론, 번역과 무대연출에 이른 수십 년 동안의 연륜을 통해 비로소 셰익스피어에 다가갈 수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됐다. 좀 더 캐묻자 비로소 이유를 말한다. <셰익스피어 전집>을 낸 출판사는 <아침이슬> 출판사인데, 교육과 청소년 관련 책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출판사 사장과 이야기를 하던 중 청소년을 위한 책으로 어떤 게 좋겠느냐는 질문에 "셰익스피어만 한 게 있을까요?"라고 반문했고, 이 일을 계기로 셰익스피어 번역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말했다.
1차분은 이른바 '4대 비극'(햄릿, 오셀로, 맥베스, 리어왕)과 만년작 '폭풍우'인데, 시인은 '4대비극'이니 '5대비극'이니 하는 말은 일본에서 건너온 편의주의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이런 분류법뿐만 아니라 일본에 해방되는 과정에서 셰익스피어가 번역되었는데, 이 때 일어 표현과 일어 문법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당대의 어른들이 읽기에는 별 무리가 없지만, 한글세대가 읽기에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현대어에 맞는 번역이 필요했던 차에 청소년 전문 출판사와 함께 작업에 나섰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셰익스피어 완역본으로 거의 유일한 판본은 1964년 정음사판 세익스피어 전집(4권)인데(나머지는 대체로 5대 비극이나 4대 비극에 국한돼 있다), 희극, 비극, 사극, 시편이라는 체재로 이루어졌는데, 김정환의 아침이슬판에는 희곡(37편), 소네트(1), 장시(2)이 담길 예정이다.

김정환 시인은 '셰익스피어'가 '천재'라기보다는 무척 기민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시인이자, 극작가, 배우, 무대연출자 같은 다역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극단의 단장으로 경영까지 해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궤적은 작품을 더욱 생기 있게 만들었고 '영어'를 한 단계 쇄신시켰다. 김정환 시인은 근대영어를 만든 두 사람을 꼽으라면 제임스판 성경을 주도한 제임스 왕과 바로 셰익스피어라고 말했다. 셰익스피어 작품은 영어라는 언어가 생겨나는 과정이 그대로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당대로부터 불과 30년 전에 통용되던 '고어'와 차별된 '현대 영어'의 보고라는 찬사다. 때문에 영어를 공용어로 쓰거나 잘 아는 사람들은 무리 없이 셰익스피어의 원전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시인에 의하면 고전이라는 것은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동양의 사서삼경이나 산스크리트, 서양의 그리스 고전,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언어'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 모음>과 독일어 사전을 편찬해 독일의 정체성을 오롯이 담아내려 했던 그림 형제와는 달리 셰익스피어는 엄청난 분량의 사회적 경험과 이를 통한 다양한 인사들과의 만남, 그리고 이것을 '작품'이라는 품격 높은 형식에 담으려 했던 노력을 통해 새로운 언어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운 '현대인'이다. 때문에 빌 게이츠는 "셰익스피어는 21세기형 인간이다"는 찬사를 보냈고 엥겔스는, 다소 거칠게, "사회주의란 산업화에 셰익스피어의 문체를 합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환 시인의 작업실 전경. 클래식을 일상적으로 틀어놓고 볕이 잘 들어오는 큰 창문이 인상적이었다. 영어, 일어, 그리스어 등 대여섯 개의 사전을 펼쳐들고 번역작업을 하다보면 뒷골이 쑤실 때가 많다고 말했다


"술술 읽힌다"는 말 칭찬이 아니야

"번역은 너무 매끄러운 윤문을 피해, 그 과정의 맛을 살렸다. (중략) '너무 매끄러움'은 인간 사회의 온갖 신분, 온갖 직접 및 분야의 현상, 상승 및 타락, 그리고 해체 과정을 셰익스피어 '당대적'으로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것을 놓치기 십상이고, 그렇게 되면 많은 것을 놓치는 것이다."

김정환의 셰익스피어 번역은 음식으로 따지자면 '거친 음식' 같다. 오래 보고 되새김질을 하면서 음미해야 하는 구절이 있고, 어떨 때는 강렬하게 한 문장만 기억에 남기도 한다. 자구나 기호 하나하나 고집스럽게 완역했고, 때로는 우리 어순을 뒤집은 표현이나 쉼표로 길게 연결된 복문이 적지 않다. 이에 대해 김정환 시인은 "되도록이면 행들을 그대로 맞췄다. 행들을 맞춰 읽는 것은 의미 전달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세익스피어의 경우는 단지 문학작품의 언어뿐만 아니라 '무대 언어'도 무척 중요하다. 쉬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쉬어야 하며, 행을 끊어야 의미전달이 될 때도 있다고 한다. 유일하게 '세미콜론(;)'만은 넣지 않았는데, 2차분부터는 다시 담기로 했다고 시인은 말했다.

번역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시인은 '윤문'에 대한 직격탄을 날렸다. '술술 읽힌다'는 평판은 결코 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500년 넘게 이어 온 문화와 역사가 있는데 '윤문'이라는 당의정을 넣을 것이라면 아예 스토리만 읽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윤문이라고 하는 것은 대체로 '김소월 투'(하네, 옵소서, 오리까)인데, 원작의 의미를 전혀 살려주지 못한다. 함께 인터뷰에 동행했던 독자는 처음 김정환 셰익스피어를 접했을 때 비인칭주어와 직역이 거북스러웠지만, 큰 소리로 연극하듯이 읽으니 이해가 되더라고 말했다. 시인의 명구가 이어졌다.

"거친 속에서 문장 하나가 문득 훨씬 아름답다"


김정환 시인은 '윤문'이나 '술술 읽힌다'라는 말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거친 문장들 속에서 강렬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건져내는 맛을 즐겨보라고 권유했다.



셰익스피어를 제대로 감상하는 법

 

"글쟁이라는 게 글 내놓고 한 달 동안은 술퍼먹는다. 왜 그러는지 아는가? 쪽팔리기 때문이다."

 

책을 내고 나서는 여지 없이 부끄러움을 달래려고 술을 '퍼'마신다는 시인에게 셰익스피어 감상법을 물어봤다.

 

시인에 따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클래식에 비유할 수 있다. 햄릿은 베토벤 9번 교향곡처럼 난삽하고, 분량 길고,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햄릿의 인생과 같다. 새로운 사태가 벌어지면 대부분은 회피하거나 과감하게 껴안는 데 비해, 햄릿은 난세를 견디면서 스스로 망가지는 캐릭터라고 시인은 평가했다. 격변기의 시대상황을 가장 잘 설명한 작품이 <햄릿>이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멕베스는 베토벤 교향곡 5번처럼 극적 구성이 탁월하다. 교향곡을 들으며 셰익스피어를 읽는 맛도 좋을 듯하다.

 

무대언어를 생각하며 작품을 읽는 것도 재미를 더해준다. 소리를 내고 연극처럼 읽는 것도 좋다. 우리는 대체로 셰익스피어 주요 작품의 스토리는 다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를 제대로 음미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셰익스피어의 고향 영국에서는 '줄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일반화돼 있다.

 

영국에서는 이보다 레퍼토리가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어떤 배우가 햄릿 역을 맡았기 때문에, 혹은 어떤 연출가가 이번에 연출을 맡았다던데 한 번 더 보자 하는 식이다. 셰익스피어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작품을 볼 기회가 생긴다면 함께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최근에는 '리어왕' 연극이 있었고, 지금은 '뮤지컬 햄릿'이 한창 공연중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광기가 가득 담긴 인물이나 바보 등이 등장하고, 이들의 말은 쉽게 알아들을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때는 그 앞이나 뒤에 무슨 말이 나오는지를 파악해 문맥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시인은 말했다.

 

김정환 시인은

1954년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0년 《창작과 비평》에 시 '마포, 강변동네에서' 외 5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하나의 이인무와 세 개의 일인무》《황색예수전》《회복기》《좋은 꽃》《해방 서시》《우리 노동자》《기차에 대하여》《사랑, 파티》《희망의 나이》《노래는 푸른 나무 붉은 잎》《텅 빈 극장》《순금의 기억》《김정환 시집 1980~1999》《해가 뜨다》《하노이 서울 시편》《레닌의 노래》《드러남과 드러냄》등 20여 권의 시집과, 소설 《파경과 광경》《세상 속으로》《그 후》《사랑의 생애》, 산문집 《발언집》《고유명사들의 공동체》《김정환의 할 말 안 할 말》, 평론집 《삶의 시, 해방의 문학》, 음악 교양서 《클래식은 내 친구》《내 영혼의 음악》, 문학 창작 방법론 《작가 지망생을 위한 창작 강의 일곱 장》, 역사 교양서 《상상하는 한국사》《20세기를 만든 사람들》《한국사 오디세이》등이 있으며, 《더블린 사람들》《셰익스피어 평전》 등을 번역했다. 2007년 제9회 백석 문학상을 수상했다.

 

김정환 시인의 셰익스피어 번역 1차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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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1-03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너무 멀리 있어서 잘 안보이고 클래식 cd들이 가깝게 보이네요. 밑에는 테이프같기도 한데..^^

승주나무 2008-11-04 11:31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 다시 읽으면서 베토벤 운명교향곡을 들었는데, 음악과 문장이 썩 잘 어울리던걸요.^^

2008-11-04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04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