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강남 좌파에게서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보다.

시사IN 55호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보았다. 이른바 '강남 좌파' 이야기. 인터넷 토론 사이트에서 활력을 불어넣는 '강남아줌마', '변호사의 아내', '내과의사' 같은 닉네임을 가진 논객들은 강남 부유층에 속함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 "생각은 좌파적인데, 생활 수준은 강남 못지 않다"는 게 강남 좌파의 정의이다. (강준만, <한국생활문화사전>)
폴로 셔츠에 CP컴퍼니 재킷, 450만원짜리 까르띠에 시계, 고급일식집과 룸살롱 한 달 접대비만 2억원을 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와 나 사이에 명확한 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루에 몇 천원도 안 되는 생활비로 살아가면서도 군복을 입고 광화문에 나가 정부 지지 농성을 벌이는 할아버지들이 더 낯설다.
우리나라에는 돌연변이가 많다. 가난하고 비정규직이면서 비정규직을 대변하는 후보보다는 착취자들을 대변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이른바 '계급 배반 투표'도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환경에 의해 억눌린 삶이라는 점에서 한국 사회를 바꾸는 돌연변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한국사회를 바꾸는 돌연변이는 가만히 있어도 기득권 안에 무리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데도, 그곳을 과감하게 박차고 나온 사람을 말한다. 강남 좌파는 우리 사회의 몇 안 되는 돌연변이다. 교수나 자본가, 정치인, 사회 지도층은 대체로 기득권의 이익을 수호하며, 약자들에게는 몹시도 인색하다. 이것이 계급에 복종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이다.
기득권 복종자들이 많으면 그 사회는 활력이 떨어진다. 역설적으로 돌연변이들은 기득권에게도 도움이 된다. 기득권이 극단적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제어해주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기득권과 약자들 사이에 교량 역할까지 할 수 있다. 지난 18대 총선에서 도합 10% 넘는 득표율을 차지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진보신당 신언직 후보와 민주노동당 김재연 후보는 강남 지역이 고학력층이 많은 만큼 논리적 설득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맹자는 '사람이 항산(恒産, 일정한 벌이)이 있으면 항심(恒心)이 생기게 마련이다'고 했는데, 강남 사람들이야말로 항산이 있으니 당연히 항심이 생길 터이다. 지식과 문화를 쌓아가는 사람은 지식과 문화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자 중의 부자인 재벌들은 하나같이 멍텅구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변화할 역동성의 한 축을 잃은 상태다. 어떻게 재벌들이 이토록 멍청할 수 있을까.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은 유한양행의 유일한 사장 정도뿐인데, 그 정도로는 한국 사회는 끄떡없다. 이 분야에서는 애초에 기대를 접었다. 

 

▲ 연설 중인 아룬다티 로이(위키백과)

인도 부유층에 사랑과 찬사를 받던 작가, 부유층의 주적으로 돌아서다.

한국사회를 바꾸는 '돌연변이'를 언급하며 한국 작가의 예를 들 수 없다는 사실이 참 슬프다. 이번 촛불 국면에서 눈에 띄는 작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계급배반을 할 만큼 돈이 많지도 않고 그들이 보여준 활동량 역시 일반인들을 감화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쉽다. 그래서 인도의 작가를 예로 들고자 한다.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데뷔작으로 영국의 권위 있는 <부커상>을 수상하면서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된 아룬다티 로이는 그 후로 단 한권의 소설도 발표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핵실험, 대형댐 건설 프로젝트, 다국적 기업의 행태를 고발하는 정치칼럼을 써왔다. 한때 인도 중산층이 총애하던 존재에서 이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로이는 인도의 힘있는 이권세력의 아픈 곳만 골라서 찌르며 격분을 사더니 결국은 법정모독죄로 기소되기에 이른다.
그가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999년 인도 대법원이 중부 인도의 '나르마다' 강에서 반쯤 지어진 상태에서 논란을 빚고 있는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에 대해 4년간 계속되어온 법적 건설중단 조치를 무효화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뉴스를 보면서부터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새만금 사업의 판결만큼이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사건 속에서 '나르마다 바차오 안돌란(NBA)'의 열정적인 활동가들을 만나고 나서다. 이 판결은 한 정부가 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스고, 국가이익이라는 이름 밑에서 이렇게 교묘한 방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망가뜨리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한 로이는 톨스토이 문학집 대신 댐 건축에 관한 책, 관개업에 관한 책, 핵폭탄에 관한 책, 법정 진술에 관한 책들을 섭렵하며 현장의 투사답게 싸웠다.
로이 덕분에 서구의 다국적 기업들은 인도의 댐 건설과 핵폭탄에 투자하기를 꺼려하여 점점 발을 빼게 되었다.

로이에 의하면 인도는 수 세기가 공존하는 나라다. 수천 년 동안 숲에서 한발자국도 떠나보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가 하면, 도시에서는 세계 일류의 유행을 몸에 걸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위에 언급한 나르마다 강은 3,500개의 크고 작은 댐을 건립할 예정인데, 30개의 초대형 댐과 수백 개의 대형 댐, 수천 개의 소형 댐이 강을 완전히 분해하면 최소 5천만명 정도가 숲과 강 밖으로 밀려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똥을 싸는 일에서부터 하루 생계를 벌기 위해 남들 앞에서 굽신거리는 일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로이는 말했다. 이 약자들의 운명을 걱정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작가가 있다는 것이 부럽지만, 작가의 힘만으로는 이들을 지키기에 턱이 없어서 위태롭기 그지 없다.

로이는 자신이 약자들의 고통을 끌어안는 '계급 배반'을 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보지 않았으면 모르겠지만, 그것을 본 이상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든 미국이든 로이가 보았던 장면은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그리고 잘 먹고 잘 배워서 똑똑한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런 장면들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결같이 이런 장면들을 외면하는 사회라면 누가 우리 사회를 책임질 것인가.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녹색평론사)는 사회과학자의 분석력과 작가적 상상력이 환상적으로 조합된 정치평론집이다. 때문에 사회과학자의 분석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무미건조함도 없고, 문학 작가의 글에서 읽을 수 있는 패배감이나 허무함이 없다. 작가다운 조롱과 해학이 매우 날카롭다. 그가 염원하는 것은 작은 풀벌레와 나무숲을 날아다니는 작은 새 한 마리이다. 9.11이 일어나고 이라크 전쟁이 터진 전장에서 작은 풀벌레가 날아다니는 상상이란 몹시 잔인하기 짝이 없지만, 그만큼 우리가 멀리까지 왔음을 차분히 말해준다. 지적인 작가들의 사회 분석이나 비판보다 한 발짝 정도 나아간 사유에 이르러서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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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0-07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사in의 기사는 저널리스틱한,섹시한 것이었지요...마치 가십기사를 보듯 봤습니다.
왜인가 하면...
'계급은 동일하지 않다.' 라는 명제를 생각해보면 결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지요. 강남에서 진보신당10% 넘었다고 놀라는 분위기에서는 사실 약간 웃음도 낫습니다. 간남에 온통 사모님,사장님만 사신다고 생각했던 걸까요.전 오히려 기사 내용에 한달 접대비로 1억 쓴다는 강남 좌파의 경제규모에 사실 약간 놀랐습니다.저 같은 월급쟁이는 생각해보지 않은 판공비여서.^^

제가 보기에 '강남좌파'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유주의적 우파',어떤 의미에서 클래식한 의미의 '보수주의자'라고 보는 것이 맞는 듯 합니다. 그들이 자신과 선긋고 있는 것이 '천민적인 강남 땅부자'들인 것도 그때문입니다. 즉 어느정도 가진자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지와 사회 공공성은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한다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번 걸쳐 이야기하는 거지만, 좌파의 척박성만큼이나 부족한 한국 우파의 얇은 선수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보수주의(사실 수구)들에게 없는 '관용의 정치'인데...^^ 언젠가 그 '관용'이 얼마나 허약하고 취약한 것인지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던것 같군요. .

승주나무 2008-10-10 20:36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사람들은 강남좌파가 아니라 강남우파라고..
좌파가 워낙 죽을 쑤니까 강남좌파, 심지어는 '한나라당 좌파'라는 말까지 나도는 것 같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