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그의 시집을 들었다.

광화문 광장에 벗들과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면서도

나는 쓸쓸했다. 친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시위라는 것은 사람에게 하는 인간의 고귀한 행동이지만,

벽에다 대고 시위를 하는 쓸쓸함이랄까.

신문기사를 봐도 나의 쓸쓸함은 채워지지 않았고,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많은 시간을 들여 기사를 클릭했고,

책의 활자를 억지로 꾸역꾸역 넣었다.

컴퓨터 앞에서 쓰러져 자다가 아침에 보면 불도 켜져 있고 컴퓨터도 켜져 있고

엉망이었다.

그 와중에도 내 머릿속에서 '검색'이 되고 있었던 것일까?

어느날 갑자기 기형도의 <밤눈>이라는 시와 시작메모가 들어왔다.


<밤눈>은 광화문과 거리의 쓸쓸한 시민들을 가장 잘 위로해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시국미사를 보도한 한 언론사는

"따뜻한 어머니 품에 안겨 실컷 운 느낌"이라고 제목을 땄다.

인간의 마음은 기본적으로 아이이다.

유년시절은 인간 감성의 원천이기 때문에

권력과 경찰의 무차별한 폭력에 물러서지 않았던 용감한 사람도

영혼의 위로 앞에서는 스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다.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 '밤눈' 전문, 기형도전집 91쪽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밤눈같은 존재인 우리들은
저마다 고유한 온도를 가지고 빛을 내뿜으며 녹는다.
눈이 쌓이는 광경은 마치 해병의 진격 같다.
선두에 달리는 눈은 땅에 닿자마자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가 죽은 자리는 터전이 되어 다음 눈이 죽지 않도록 해준다.
그리하여 수백의 눈 알갱이가 터를 닦은 곳에
무릎보다 더 높은 눈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밤눈>이라는 시는 나의 전투력을 앙양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를 하면서 처음으로 강원도에 있는 오마이스쿨에 갔다.
거기서 백창우 씨를 처음 만났다.
고무신을 신은 그는 어린이 노래를 잔뜩 준비해 왔는데,
관객이 모두 어른이라 레파토리를 급변경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지막곡은 기형도 시인의 <빈집>이라는 시였다.
백창우 씨는 '작곡가'가 아니라 '잡곡가'라는 세간의 평이 그럴듯하다.
내가 들었던 백창우 씨의 노래와는 전혀 다른 풍을 만나 반가웠고,
기형도의 빈집을 노래로 들어서 더욱 반가웠다.

기형도의 <빈집>은 시인들의 존경을 받는 작품이다.
빈집에 갇혀 시를 쓰는 시인을 그려보게 된다.
단어들이 종이에서 기어나와서 시인을 괴롭히거나
시인에게 고단한 인생사를 늘어놓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시인은 아직도 빈집에 갇혀 나오지 못했지만,
나는 기꺼이 빈집 문을 두드린다.


※ 중간에 카메라맨으로서는 금기인 효과음이 끼어들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기형도-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을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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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7-02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백창우씨. 알아주는 보석이죠! ^^

승주나무 2008-07-02 12:25   좋아요 0 | URL
정말 보석같은 음률과 가사였습니다. 그 자유분방함이 반짝반짝했습니다^^

연두부 2008-07-02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뭉클하네요...위로 받고 갑니다,,,,

승주나무 2008-07-02 12:25   좋아요 0 | URL
다행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승주나무 2008-07-02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오른쪽 양말 빵꾸났씨요 ㅋ

승주나무 2008-07-02 12:25   좋아요 0 | URL
승주나무 씨~ '빵꾸난 양말과 고무신'ㅋㅋ 토속적이네..

순오기 2008-07-04 19:38   좋아요 0 | URL
ㅋㅋ 두분 얼굴만 보느라고 빵구난 양말은 못 봤는데~ㅎㅎㅎ제발이 저리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