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유머가 어우러진 서울의 촛불광장

이문재 시인은 72시간 릴레이시위에서 '새로운 공간'을 발견했다고 기록했다. (시사IN 39호) "거대도시에서 도로는 법과 질서의 힘이 압축되어 있는 대표적인 공적 영역이다. 중앙선, 차로, 표지판, 신호등, 규정 속도 등이 운전자를 규제한다. 그리고 도심의 대로는 보행자에게는 금지된 장소다. 촛불을 들고 중앙선을 걸어보면 안다. 시속 3km로 완보하다 보면, 신호등, 표지판, 주위의 건물이 전혀 달라 보인다." 2008년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서 촛불 행렬은 권력과 규율의 상징인 10차선 대로를 광장으로 바꾸어 버렸다. 광장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모자라 아예 커다란 스케치북으로 만들어버렸다. 유치원 때 붓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듯, 가로 두 줄 세로 두 줄 그려놓은 아홉 칸짜리 종이에 아버지, 어머니란 글자를 처음 새기듯 도로에 천천히 자신의 뜻과 소망을 적어놓았고 거기에는 유머가 흘러넘쳤다.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류승완 씨는 2008년 촛불문화제의 대표적인 키워드는 '유머'라고 규정했다.
누군가 길거리에 흰색과 노란색, 빨간색 분필을 놓았고, 시민들은 그 뜻을 알아채 하나둘씩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쥐'이거나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 소년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길거리 스케치북에 생각을 옮겨놓고 있다.




대통령 때문에 도매금으로 욕을 얻어먹는 쥐의 섭섭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쥐'박이라는 말이 몹시도 못마땅한 듯하다



쥐의 천적인 고양이를 그려 놓았다.





사뭇 성찰적인 메시지도 오간다. 광우병은 소를 공장의 부품 다루듯 대형생산하려는 인간의 욕심으로 생긴 질병이므로 순수하게 인간이 창조해낸 병중의 하나이다.





시민들이 길거리에 한창 글과 그림을 새겨넣고 있다. 이 밤이 지나면 길거리는 난생 처음 보는 장관이 펼쳐질 것이다
.



누가 시작했는지 중앙선 한가운데 촛불들이 띠를 이루고 있다. 촛불은 시민들의 염원이 높이 날아갈 수 있도록 놓인 활주로를 연상케 한다.


꺼지지 않는 촛불


광화문 일대와 경복궁 등 주요 도로에는 모두 컨테이너 박스가 2층으로 지키고 섰다. 거기다가 그리스(윤활제)를 발라 침범을 막고 있다.
시사IN에 따르면 컨테이너 박스 아이디어는 어청수 경찰청장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한다. 어청장은 부산경찰청장 시절이던 2005년 11월 부산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때 최초로 컨테이너를 들고 나왔다. 1차 정상회의가 열렸던 11월18일 벡스코 회의장으로 진입하는 수영강 3호교에 경찰은 컨테이너박스 10여 개를 이중으로 쌓아 시위대의 진입을 원천 봉쇄했다. 뿐만 아니라 시청광장을 점유한 보수단체의 집회는 경찰청이 허가한 것인데 2005년 APEC 정상회담 때도 보수단체의 집회가 있었다. 보수단체 집회와 컨테이너 박스라는 두 가지 복병으로 시위대의 동선을 원천봉쇄하자는 속셈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는 대통령이 국민과 대화할 생각이 없음을 선포하는 것이자 집권자의 '공포'를 상징한다. 시민들은 이 우중충한 조형물을 마음껏 조롱을 해주었다.




시민들이 컨테이너 장벽에 피켓을 붙이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장벽을 한껏 조롱하고 있다.



이미 많은 시민들이 붙여놓은 게시물을 시민들이 사진과 영상에 담고 있다.






유치장에 갇힌 이명박 대통령의 형상 밑에 '민주경찰 함께해요'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애먼 국민들이 유치장에서 겪었을 서러움과 좌절감, 고통을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거리의 예술가들은 그림을 그리기에 분주하고 기자들은 사진에 담기에 분주하다. 이래저래 6월 10일은 바쁜 하루였다.



아예 종이를 앞에 세워둔 사람도 있었다. 마치 절대왕조가 된 것처럼 행세하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자후를 보내고 있다.


이 흉물스러운 조형물에도 시민들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름하야 '명박산성'이다.







거리의 예술가들이 꺼지지 않는 초를 만들었다. 이 컨테이너는 밤이고 낮이고 타오를 것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두었으면 좋겠다. 바로 역사이기 때문이다. 2008년 6월 10일의 서울은 '촛불'이 어떤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지 진면모를 보여준 날이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시민들의 해학은 멈추지 않는다. 광화문역에 놓여 있는 광고판이 기가 막히게 현재의 세태를 잘 압축해 놓았고, 한 재기발랄한 시민이 이를 발견해 그 앞에 '이명박'이라는 글자를 써놓았다. 길을 가던 시민들이 걸음을 멈추고 크게 웃으면서 사진을 또 담았다. 즐거운 웃음으로 가득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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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6-11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백일 됐는데,,, 지겹게 오래 간다니... 헛, 그넘도 참 불쌍허이... ㅎㅎㅎ
잘 다녀 오셨나요?
어젠 부산에서도 아이들이 분필로 대로에 낙서를 하더이다.
전부 쥐박이 밉단 말이지, 뭐.

마늘빵 2008-06-11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낙서는 못 봤어요. 아래를 안 보고 다녀서 그랬나. 아래를 볼 수도 없는게 다들 꽉 들어차서. 일찍 와서 보셨나봐요.

순오기 2008-06-1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내는 선조들의 정신을 대물림한 후손인데~~~ 명바기만 모르는거죠!ㅋㅋ 정말 대단한 시민이고 국민들이에요!!

L.SHIN 2008-06-12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역사의 한 면으로 기억될만한 명(?)장면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