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9일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4,776명의 명단을 공개한 날이다. 그 날 서중석 교수는 그 자리에 함께 해 달라는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기자와의 인터뷰 약속이 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 참여하지 못할 만큼 급한 인터뷰는 아니었는데 괜히 역사에 죄를 짓는 것 같아 속상했다. 서중석 교수는 전날 밤늦게 요청전화가 와서 불가피했으니 너무 괘념치 말라고 오히려 기자를 달랬다. 인터뷰는 오전에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 연구실에서 진행했고, 그날 저녁 역사비평사가 주최하는 서중석 교수 강연회의 내용을 묶어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하였다. - 기자주

 

인간적 감화를 주는 지식인 소묘

 

성균관대 교수연구실에서 서중석 교수와 인터뷰를 했다.

 

나는 지식인의 인상적인 유형으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인간적 감화를 주는 지식인이며, 둘째는 지적 감화를 주는 지식인이다. 첫째 유형에 걸맞는 인물은 스피노자를 들 수 있는데, 그의 철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 일관된 삶의 방식에 존경을 표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철학자 러셀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의 저서 <서양철학사>에서 스피노자를 "가장 고귀하고 또 존경할 만한 대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기록하며 "지적인 면에서 그보다 탁월한 철학자가 몇몇 있기는 하였지만, 윤리적인 면에서는 그를 따를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둘째 유형에 걸맞는 인물은 '루소'를 들 수 있다. 그의 사상은 프랑스혁명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교육학이나 사회학에 영감을 준 바가 컸으나, 사생활에 있어서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자신을 통해 태어난 아이들을 모조리 고아원에 보냈기 때문이다. 물론 격변기를 살았던 그의 신상을 생각하면 봉시불행(逢時不幸), 즉 시대를 잘못 만난 탓도 있었겠지만 그가 남긴 지적 성과는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이렇게 지식인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서중석 교수에 대한 인상을 기록해 두기 위해서다. 서중석 선생은 대한민국 헌법과 같은 해(1948년)에 태어났다. 현대사의 주요한 변곡점과 마디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75년 2월 17일 석방되었고, 당시 '정치 신문'과 동의어였던 <동아일보>에서 약 10년간(1979~1988) 기자 생활을 했다. 현재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의 상임공동대표와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위원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강연회에서 "역사의 방향에 맞춰서 진지하게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밝혔는데, 나는 그런 사람을 보고 있는 듯하였다. 강연을 하는 동안,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의 표정에서 현대사가 생생하게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안타까운 순간을 말할 때는 아쉬운 표정, 화가 나는 순간을 말할 때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신명나는 순간을 지나가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것처럼 화색이 돌았다. 나는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그와 같이 일체화시킬 자신이 없다. 그가 일궈낸 역사적 연구성과나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그를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갑자기 궁금했다. 현대사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동시대인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 그러면서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냉정함. 이성에도 '온기'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러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서중석 교수와 인터뷰를 나눈 주제는 현대사, 선거, 교과서 문제 등이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인터뷰의 내용이다.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현대사를 불편하게 보고 피하려 하는 경향 안타까워

 

개성에 다녀오셨다고 들었다. 북한의 분위기는 어떤가?

- 지난주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 동안(24,25일) 북한의 학자들과 학술토론을 했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에서 남북역사용어사전을 공동편찬하기로 협의한 데에 따른 모임이었다. 모임의 성격은 민간교류이므로 남북 당국에서 막으려 하지도 않고 필요성도 느끼고 있지만 미묘한 분위기가 감지되는 것은 사실이다. 민간교류 성격이지만 사전편찬 등으로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을 때는 또 다른 것 아니겠나. 북쪽에서는 "남쪽의 태도를 '이해'하겠다"는 입장이라는 데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 정부 또한 남북관계가 안 좋게 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것으로 본다. 결국 남북이 안 풀리지는 않을 거 아닌가.

 

요즘 드라마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사와 관련된 책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반면 현대사에 관한 책은 너무 적다. 그 이유가 뭐라고 보는가?

- 독자들이 고대사나 조선사는 좀 친근함을 가지고 접근하지만, 여기에는 일종의 '보상심리'가 작용하지 않나 생각한다. 국제적으로 대단한 영향력을 보였고 강토를 넓혔다는 주장들은 일반인들에게 고대사에 대한 흥미와 유혹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부정확한 내용이나 과대하게 포장된 부분이 적지 않다. 조선사도 마찬가지로 왕실의 이야기나 애정관계, 권력투쟁을 주로 다루며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지만 일반 서민의 모습이 그 안에 얼마나 담겼는지는 의문이다. 이것을 보면 대중들이 현실과 관계있는 것을 고민하기보다는 그것을 피하려는 인상을 주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일제시대에 최초로 나라를 빼앗겼고, 6.25로 최초로 분단현실을 맞은 것과도 상관관계가 있다고 본다.

 

나라를 빼앗긴 것이 비단 일제시대만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삼전도 굴욕에서 보듯이 청나라에게 항복한 경험이 있으며 삼국시대도 일종의 분단현실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 삼전도 굴욕사건을 예로 들면 청나라는 곧바로 철수하고 '조공형태'로만 지배관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겼다기보다는 일종의 외교관계의 재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시대 역시 엄밀한 분단국가가 아니라 역사가 통합ㆍ진전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분단이라고 볼 수는 없다.

 

사람들이 현대사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수강신청률 같은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근현대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때문에 자기 자신조차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데, 이를 불편하게 보는 시선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뭔가 잘못했다는 자괴감 같은 거다. 그것은 현대사의 부정적인 면이 너무 과장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사를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분명히 사회ㆍ문화적인 면에서도 발전하고 있고 동태성ㆍ능동성ㆍ활기가 분명히 포착되는데, 이런 점이 부각되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 예전에 강의를 받던 학생이 "현대사는 고통과 비관에 차 있는 것 같다"고 한탄을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던 경험이 있다. 지금도 강의당 학생 수는 좀 줄었지만 꾸준히 등록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현대사 시험을 보고 나면 성적이 참 좋지 못하다. 그것은 초중고등학교 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온통 박정희 찬양만 들어서 객관적인 관점으로 현대사를 바라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 크다고 생각한다. 교육이란 결국 반복효과 아니겠는가. 그런데 현대사 강의에서는 이제까지 들어서 알고 있는 것과 거꾸로 된 것을 일러주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거다.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가 너무 크거나, 내가 너무 현대사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학생들을 짓누르는 면이 있다. 때문에 나는 학생보다 오히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수를 하는데, 골자는 교사들이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면에 비중을 두어서 학생들의 기를 펴줘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을 전달해주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 교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수를 가 보면 "남북관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같은 질문들만 해서 토론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내가 무슨 예언자인가? 그런 걸 알게.

 

서중석 교수, <역사비평사> 주최로 열린 <풀로엮은집>의 대중강연에서 

 

새역모 교과서 채택률은 저조하지만 대중서는 반향 엄청나 

 

교사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묻겠다. 이번에 새역모가 출판사를 지유샤(自由社)로 바꿔서 문부과학성에 검정 신청을 했고 신청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만약 내년 3월에 검정에 합격하고 4월에 채택전이 시작되면 또 시끄러워질 것 같다.

- 새역모가 내홍을 통해 두 파로 갈라진 것으로 안다. 그것은 미국에 대한 입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거기도 책을 팔아야 한다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수요자가 거부감이 일어나지 않게 이번에는 더 부드럽게 만들 거라는 말이 들린다. 내용이 달라지고 좀더 교묘해질 것으로 예상한다. 사실 이전 교과서는 내용에서 문제가 많고 독자들에게 극단적인 주장을 강요한 측면이 없지 않다. 교과서 치고는 얇은 두께인 데도 불구하고 러일전쟁에서는 무려 4쪽을 할애하였고, 소화천황에 대한 내용도 불필요하게 길다.

2001년도에는 0.03%, 2005년에는 0.4% 정도로 미미한 수치이지만, 이 수치에 안심하기는 이르다. 새역모의 위상을 생각해 보자. 일본 자민당 의원의 다수와 민주당의 상당수가 사실은 새역모 교과서와 사관을 똑같이 한다고 보면 된다. 새역모의 일반용 단행본은 넉달만에 50만부가 팔렸다. 그것의 만화판은 더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것은 일본 대중이 군국주의 사관에 호응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시장에서의 성공과 대중의 지지, 정치세력으로서는 의회의 다수파가 우군이 받쳐준다는 것이 새역모의 실상인데 0.4% 채택률로 위안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명박 대통령은 22일 ‘일본에 과거 사죄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대일정책을 선언했다.

-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문제가 생긴다면 그 태도를 바꿀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실 최근의 대통령들은 처음에는 모두 그렇게 시작한 거 아니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일본과의 협력·우호를 강조했지만, 과거사와 관련된 일본의 망언이 나오기가 무섭게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 강경 발언을 했고, 김대중 정부는 ‘21세기 한·일 파트너십 선언’을 통해 조심스러운 출발을 했으나 교과서 파동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했다. 노무현 정부 역시 초기에는 사상 처음으로 양국 정상 셔틀회담이 마련될 정도로 좋은 분위기를 유지했지만 독도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여론이 악화되자 단숨에 일본과의 ‘외교전쟁’을 거론하는 단계까지 갔다.) 노무현 대통령의 예만 들어도 2005년 86돌 삼일절 기념사에서 역사 문제에 대한 단호한 대처를 약속했고, 정부는 ‘외교 문제보다 독도 문제를 상위개념으로 두겠다’고 정책 전환을 선언하는 등 능동적인 자세를 보이면서 지지가 올라갔거든. 때문에 일본에서는 정략적이라고 들고 일어난 것이다.

 

사람들이 과거사를 말할 때는 독일과 일본의 예를 든다. 독일의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해달라.

- 일본 대중들은 자신들이 침략을 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참화'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누구나 자기가 당한 것을 오래 기억하는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본에 대한 제재를 제대로 못하고 오히려 육성해준 것이 지금까지 역사관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독일 역시 나치에 협력한 세대들은 반성을 안했다. 하지만 68혁명을 주도한 진보적 학생을 중심으로 독일에서는 자기반성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올해는 68혁명 40돌 되는 해이다.) "희생자의 편에서 역사를 보아야 진실이 보인다. 우리 아버지, 부모 세대 잘못을 반성하자"는 주장이 공감대를 얻었고, 스스로 반성하고 후학들을 가르침으로써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무척 노력을 했다. 독일 총리가 희생자에게 사죄를 하거나 엄청난 비용을 관련 사업에 후원한 것은 본질이 아니다. 독일의 시민과 학생, 청년 사이에서 진정으로 우러나는 반성이 있었다. 이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지금도 독일에서 과거사와 관련한 세미나가 있을 때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듣는다.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 하면 작년에 의미 있는 전시회가 있었다.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진재(관동대지진) 학살사건(일본 정부에 의해 조작된 유언비어에 의해 살인자와 약탈자로, 강도와 성폭행범으로 몰린 재일조선인들이 일본 경찰과 자경단들에 의해 6천여 명이나 학살되었던 사건) 84주기 전시회할 때 수십일간 전시회를 열었지만 그곳을 방문한 시민들은 많지 않았다. 이 대목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을 '국민성'의 차이로 볼 수 있는가?

- '국민성'으로 접근하면 결정론과 흑백론에 잘못 빠지기 쉽다. 그보다는 시민의 의식이 얼마나 성숙했는가 하는 차이가 큰 요인일 것이다. 일본 시민사회는 여전히 부국강병의 사고가 만연해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현재까지 아직도 천황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없는 것 같다.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고 청산하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지금은 너무 늦어버렸다. 한국은 활기라도 있는데, 일본은 그게 없다. 무엇보다 자기 사회를 비판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사회에서는 건강한 시민의식이 자라나기 힘들다.

 

그래도 68혁명의 대표지성인 샤르트르가 일본에서 강연을 할 정도로 지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었고(이 강연은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걸작으로 출간됐다) 전공투 세대가 활약하지 않았나?

- 전공투의 활약은 평가할 만하다. 미일신안보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1960년 기시정권을 무너지게 한 주역들이다. 하지만 1970년대 엄청난 속도로 경제 발전을 이룩하면서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은 당시 '경제동물'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즉 도덕성, 가치관, 민주주의, 과거사와 함께 이뤄낸 경제발전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을 계기로 일본인의 의식이 멈추고 보수화ㆍ우경화로 나타나고 말았다. 과거사 반성은 더욱 약화됐으며, 고이즈미가 신사참배를 공약으로 내세웠을 때는 절정에 달했다.

 

이명박 정부 역시 '경제살리기'에 치중하고 있어서, 우리나라도 10년 후에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우려된다.

- 우리나라 역시 삶의 질은 따지지 않고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을 펼쳐 왔다. 이렇게 가치관 없는 발전을 이룩하면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은 크게 다른 점이 적지 않다. 일본 보수세력은 일본인에게는 매우 긍정적으로 보인다는 점, 에도 정부와 도쿠가와 막부, 30년대 군국주의 침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역사관이 일본인에게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정권을 비판적으로 보는 측면이 많다. 말뿐 아니라 몸으로 저항하다가 다들 감옥소 갔다온 역사가 있지 않은가. 나는 우리 역사를 그렇게까지 비관적으로 보지는 않지만, 그렇게 볼 만큼 나쁜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서중석 교수, 합정역 근처 풀로엮은집 강의실에서 

 

진보세력조차 현대사 공부 너무 안 한다.

 

선거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선거의 결과를 어떻게 보나?

-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막판에 혈전 비슷하게 나타났다. 민심 동향이 달라진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가장 우려되는 점은 역사상 최하인 50%의 투표율이 안 되었다는 점이고, 특히 젊은층이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점은 두고두고 뼈아프다. 서울ㆍ경기권에 사는 젊은이 2~3%만 투표했어도 한국사회가 더욱 동태적으로 되고, 국회가 논의의 장이 되었을 것이다. 정치권의 판도와 양상이 달라질 수 있는 득표율이었는데 참 아쉽다. 이 역시 현대사의 역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번 선거에도 '현대사의 역설'이 작용했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 보수세력은 젊은이나 여성, 노동자 등이 투표장으로 오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그들이 어디에 투표할지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선거연령의 변천으로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 남조선 과도입법부에서 보통선거법을 통과시켰을 때 이승만은 선거연령을 아주 높여 놨다. 피선거권을 25세, 선거권을 23세로 규정한 것이다. 미군정이 이 법안을 보고 무척 놀랏다. 이건 안 된다. 요새 이런 나라 없다고 설득할 정도였다. 당시 유엔감시위원단의 선거방식을 담당한 대표국가는 프랑스였는데, 프랑스 대표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18~20세에서 선거권이 정해지는 데, 이러한 '터무니없는' 선거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3월 중순 발표된 보통선거법에 의하면 선거권은 21세, 피선거권은 23세가 되었다. (대한민국 유권자로서 프랑스 대표에게 감사(?)한다) 선거권이 20세로 낮아진 것은 그로부터 12년 후인 1960년대였다. 여기서 또 1년이 낮아지기 위해서는 4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싸워서 얻어낸 선거권 연령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투표하지 않았다. 이것이 현대사의 역설이 아니고 무엇인가?

 

<선거이야기>에서는 역설적 현상, 또는 '이성의 간지(奸智)'라고 표현했는데, 다른 역설도 몇 가지만 소개해 달라.

- 지방자체제, 정당제, 공천제를 소개하면 될 것 같다. 52년 정부통령 선거 당시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이승만의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국회에는 이승만의 반대세력이 득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내각책임제가 민주주의의 보증수표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이승만이 짜낸 묘안은 자유당을 만든 것이다. 자신에게 힘을 실어줄 집단을 만든 것이다. 이를 관제여당이라고 하는데, 박정희의 공화당,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이 대표적인 관제여당이었다. 최초의 공천제 역시 그 의도가 불순한데,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을 허용할 것"이라는 개헌 각서에 사인하는 사람에게만 공천을 준 것이 최초의 공천이 된 것이다. 지방자치선거는 더 기가 막히다. 이승만은 처음에는 지방자치 제도 자체를 거들떠도 안 보다가 전쟁 중인 1952년에 뜬금없이 지방자치선거를 했다. 당시 국회의원들은 압도적으로 이승만을 반대했는데, 이승만은 "읍면도의원도 민의를 대변하는 선량이다"고 주장하며 지방의원들을 자신의 권력유지용도로 활용한 것이다. 이처럼 의도는 나빴지만 결과적으로 이 제도가 한국정치에 공헌한 바가 크다. 하지만 역설적인 변화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성장하지 않는 한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이번 두 번의 선거로 인해 선거제도 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선생님의 <선거이야기>는 그렇지 않다고 하고 있는데, 간단히 소개해 달라.

- 4.19혁명이 일어난 과정을 살펴 보자. 먼저 3.15 부정선거가 있었다. 그에 대항해 3월 학생운동이 바로 일어났고 100명의 희생자가 생겼다. 이것을 발화로 해서 4.19혁명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결국 이승만이 퇴진하게 되었다. 결국 '선거'는 4.19를 이끌어낸 동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0.26 역시 사건 자체보다는 문맥을 살펴야 한다. 10.26 직전인 1978년 12월 12일에 선거가 있었는데, 야당 득표가 1.2% 앞섰던 것이 결정적이다. 이런 민의를 의식해서인지 1978년 대통령 취임식에는 세계 어떤 나라도 축하사절을 보내지 않았고, 일본 역시 비공식 사절단만 12명 보냈을 뿐이었다. 80년대는 더욱 빠르다. 살얼음같은 서울의 봄이 12.12와 5.17에 의해 좌절되었지만, 85년 2.12총선에서는 세상이 뒤집어지려는 분위기를 누구나 감지할 수 있었다. 여당인 민한당 의원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한 한민당 후보는 "'이거 큰일 났다. 이거 큰일 났다'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고 했다. 2.12총선은 그야말로 폭풍이 불어닥친 선거였다. 이로 인해 6월 대항쟁으로 나아가는 대도가 뚫린 것이다. 당시 정치인들은 이런 민의를 잘 대변했다. 정치는 이런 거다 하는 기백이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마지막 코너로 집어넣을 수 있었다. 조봉암의 경우 한때 주먹으로 날렸다는 시라소니조차도 무서워서 곁을 떠날 만큼 배짱이 있었다. 그 배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있을 때, 민중과 일체될 수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정치인을 찾기가 쉽지 않다.

- 정치의 국면으로 따지자면 한국정치는 갈 데까지 갔다. 야당은 지리멸렬하고, 지금 시류에 맞지 않은 주장들을 하는가 하면 아마추어리즘을 노출하곤 한다. 무엇보다도 진보세력조차 현대사 공부를 너무 안 하는 것 같다. 만약 그들이 현대사 공부를 조금만 했더라면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총선 직전에 분열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면 그들을 '학습미달 정치인'이라고 부르면 되겠다.

- 학습미달이 맞다. 이런 나쁜 정당정치는 고통 속에서 정리될 것이다. 박정희 18년 정치가 부재했던 것이 가장 큰 영향일 것이다. 정치부재의 사회, 중앙에 의한 중앙정치의 사회. 박정희 시절은 현대사의 허리에 해당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는데, 성장제일과 근대화 지상주의에 빠지는 등 그 시절이 보인 패착이 주는 그림자가 매우 길고도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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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5-02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중석 선생님 얼굴이 너무 붉게 상기되셨어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술 한잔 걸치신 줄 알겠어요 ㅎㅎ

승주나무 2008-05-03 15:07   좋아요 0 | URL
서중석 선생님이 현실에 대해서 갖는 애정으로 읽혔어요^^
기쁨과 슬픔을 어떻게 이렇게 일체화시킬 수 있는지~~~
나도 나이가 들면 저런 표정 만들 수 있을지 궁금해요^^

순오기 2008-05-05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감사^^
우리딸이 대학입학 후 두달만에 집에 와서 하는 말이 '애들이 현대사를 너무 모른다.'는 한탄이었어요.ㅠㅠ 이 글을 읽으니 훨씬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이 책 방학에 오는 딸을 위해 찜합니다!

승주나무 2008-05-03 15:07   좋아요 0 | URL
저도 2000년까지 현대사의 현 짜도 모르는 형편이었어요. 현대사는 자기가 스스로 찾아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영원히 멀어지는 것 같아요~

마노아 2008-05-03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중석 선생님은 지식인의 인상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요? 인터뷰 잘 읽었어요. 오늘 근현대사 시험 채점했는데 가장 점수가 좋은 반만 평균 59점이었고, 2등반이 47점이었어요.
수능에서 선택과목으로 채택한 학생들이 한 반에 다섯 명 정도인데, 그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관심이 전무하다고 봐야 하더라구요. 가심이 쓰렸습니다. ㅜ.ㅜ

승주나무 2008-05-04 02:49   좋아요 0 | URL
당연히 인간적 감화를 주는 지식인상이었습니다.
<선거이야기>는 그런 특징이 잘 나타난 책인 것 같습니다. 일관된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도전일 텐데, 그것을 잘 이겨낸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몹시 기분이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