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내 자아의 다른 얼굴은 이 글을 쓰지 말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쓰지 않을 수 없다.
따지고 보면 큰 잘못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약하고 비겁한 모습을 그대로 노출했던 그 날의 사건을 기록하고자 한다.
자랑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언제라도 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비 오는 날 그 일은 아주 순간적으로,
그렇지만 변명할 여지 없이 지나갔다.
우산을 들고 나는 횡단보도를 바쁘게 건너고 있었다.
갑자기 온 비에 우산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 눈에 띈 것은 양복 차림의 60대 중반의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가 두 손을 머리 위로 가리며 힘든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들고 그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 물론 바빴다. 바빴다고 치자.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나는 그 노인을 그냥 '지나쳤다'

아주 순간적인 선택이었는데,
나는 분명히 그 상황을 지나쳤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이 일을 돌이켜준 글귀 하나를 만났다.

   
  아까 광화문에서 구름다리를 건너오는데, 다리 위에서 쏟아지는 비를 온몸에 맞고 엎드려 손을 내밀고 있는 아이를 보았어요. 나는 한 손에 무엇을 안았고, 다른 손에는 우산을 받고 온다는 핑계로 그 앞을 모른 척하고 지나왔지만, 오면서 생각하니 내가 사람이 아니었구나, 왜 그 아이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이라도 쥐어 주면서 어서 어디 들어가라고 말해 주지 못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원인이 어디 있든지, 절박한 삶을 제 힘으로 해결하지 못해 도움을 청하고 있는 아이를 보고, 쌀쌀한 눈으로 못 본 척 지나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사회를 그 아이는 얼마나 절망했을까요? 이건 정말 어떤 동물보다도 못하게 퇴화한 동물의 사회가 아닌가요?
- 이오덕, 어린이를 살리는 문학(청년사)
 
   



그래,
승주나무야~
네가 그토록 단골처럼 사용했던 '선비'의 예를 들어 보자.
선비가 책을 읽는 이유는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소용이 되기 위함이다.
자신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할 때에 만약 역량이 미진하거나 지식이 부족하거나 덕성이 부족해서 그 일을 해내지 못하는 상황이 오는 것을 선비는 가장 두려워한다고 하였지~

그러면 네가 그 동안 읽었던 책들이나,
시사인 어쩌구 하면서 언론자유 어쩌구 외쳐왔던 것들이 모두 위선이 아니냐?
승주나무야~
너는 네 옆에서 떨고 있는 노인에게 그 널찍한 우산 반쪽으로 비를 가려줄 넉넉함이 없으면서
어떻게 이 넓은 세상을 감싸안으려 하는 것이냐?

나는 이 말에 대답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이거는 자해의 글이 아니다.
명백한 사실이다.
호리지차 천리지말~
여우 터럭만큼의 차이라도 거기서부터 지구 한 바퀴의 '어긋남'이 생긴다.
만약 이 한계적 상황에 대해서 절실한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다면,
다음에는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내가 해야 할 '그 행동'을 할 수 있겠지.  

유감스러운 하루다.
이를 돌이키게 해준 고 이오덕 선생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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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2 0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8-04-12 02:39   좋아요 0 | URL
눈에 안 보였거나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그 할아버지가 안 보이는 순간까지 "할아버지 가시는 데까지 좀 같이 써서 갈까요?"라고 말하려는 마음이 자꾸 들었는데, 말을 하지 못했죠.
저의 개성이 들어가 있는 장면이긴 하지만요..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저도 그 분을 이해합니다^^;;

stella.K 2008-04-12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벽지 도배 새로했네. 좋은데!^^

승주나무 2008-04-14 00:55   좋아요 0 | URL
네~ 기분 좀 바꿔봤어요^^

마노아 2008-04-12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벼운 선의를 베풂에 있어서도 마음의 넉넉함과 함께 용기도 필요한 것 같아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기가 참 힘들어요. 작은 일에서부터요. 그래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요.

승주나무 2008-04-14 00:55   좋아요 0 | URL
네~ 작은 일일수록 더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것 같아요.
큰일은 원래 신경 많이 쓰기 마련이니^^;

2008-04-12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14 0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L.SHIN 2008-04-12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로는 '어떻게 해야 할 지 알면서' 그냥 지나치는 때가 있죠.
그리고 자꾸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스스로가 한심하고 부끄럽기도 하죠.
하지만 그게 인간이죠. 가끔은 자신을 배신하면서 사는 생물.
문제는 '자책'이나 '양심'이 없는 인간입니다. 스스로 깨닫는 바가 있어 다음에는
더 큰 사랑을 타인에게 혹은 세상에게 줄 수 있는 동기가 부여되기도 하니까,괜찮아요.

하지만, 비를 맞으며 구걸하는 아이를 못본 척 한 것은 너무 심한데요.

승주나무 2008-04-14 00:57   좋아요 0 | URL
네~ 이오덕 선생이 이 사례를 떠올리시는 걸 보니 많이 미안했나 봐요~
저도 그에 못지 않았어요 ^^;

순오기 2008-04-14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에게나 있을 듯한 일이지만, 뒤돌아서 후회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게 더 문제라고 생각해요. 부끄러운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날마다 자기를 키우는 양분이라고 위로하며...

승주나무 2008-04-16 18:0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반성에만 의존하는 삶은 결코 좋지 않다"라고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 같은데, 좀 찔리기는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