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같은 딸을 낳아라."

"싫어. 그럼 엄마도 나 같았겠네. 엄마가 나를 낳았잖아."

 

아... 내가 이런 진부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고작 여섯 살짜리를 붙잡고 하게 될 줄 몰랐다.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라는 그 당연한 명제를 가슴에 품으려고 애쓰건만

그건 머리로나 가능한 일인지

점점 아이와 입씨름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도 당연히 유치해지고 비논리적이고 되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때로 든다.

 

 

 

육아는 이론으로 타인의 사례로 조언으로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아이가 기고 아장 아장 걷고 혀짧은 소리로 세상의 사물들을 명명하고 자신의 느낌을 서툴게 표현했을 때

몸은 힘들었지만 아이와 의사 소통이 되면서부터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읽은 책의 제목만으로도

당시 나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때로는 모성이 생래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절망하기도 하고

아이 때문에 나의 감정을 절제할 수 없어 미칠 것도 같았고 이러한 양육 방식이 아이에게 독이 되는 것은 아닌가,

불안하기도 했고. 가끔은 썩 괜찮은 엄마라고 생각하며 자족하기도 하고. 꽂혀 있는 책들만 보면 육아박사가 되어 있을 터인데.

나에게는 저 만큼의 허전함과 결핍이 있었던 것같다.

 

육아에서 아이에게 공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나이로 내려가 자신의 심리 상태를 기억해 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의 기억도 여섯 살 근처에서 시작되는 것같다. 세상은 엄청나게 크고 나는 엄청나게 작았다. 엄마의 팔은 나의 세상 전부를 덮는 커다란 우산이었다. 무서운 것도 많았고 못 견딜 것도 많았다. 예쁜 연년생 동생 옆에서 몸이 움츠러들었고 심술도 많이 부렸다. 나는 착하고 귀여운 아이가 아니라 심술맞고 당돌한 것으로 어른들의 관심을 받아보려 했던 것 같다.

키우기 힘든 아이였다. 엄마는 무뚝뚝했지만 나의 화와 짜증을 엄하게 다스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엄마라는 존재는 내가 세상에서 받은 그 숱한 좌절과 실망, 불만도 안전하게 풀어낼 수 있는 커다란 우산이 되어야 한다.

 

 

 

 

 

 

 

 

 

 

 

 

 

 

 

 

 

기네스 펠트로가 한창 예뻤을 때, 그리고  에단 호크가 아직은 대머리 징조가 안 보였을 때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녀가 분수대 근처에서 키스하던 장면이 이들이 아이였을 때 했던 서툴게 했던 키스와 오버랩되던 장면. 원작은 찰스 디킨스의 동명의 성장소설이었다. 사실 큰 재미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이의 심리 상태에 대한 섬세하고 적나라한 묘사가 절로 몰입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의 작은 눈 앞에서 굴절된 세계는 어떻게든 희극적이다. 아주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아이였을 때 잊었던 그 숱한 두려움과 착각, 기대들에 대한 충실한 복기로 시작되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어떤 상황을 온전히 이성적으로 제대로 세계화하지 못하고(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두려움과 절실함이 만들어 낸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양육자(주인공 핍한테는 누나)가 가지는 그 어마어마한 무게에 대한 고찰. 여기에는 각종 희극적인 어른들이 등장한다. 무기력한 매형도 누나가 초대하는 그 위선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지역의 유지들도. 핍한테는 그저 한심하고 때로 무시무시한 비정상적인 캐릭터로 재창조된다. 그 시선이 잘못되었다고 어른들은 가르치려 들며 또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저만치 밀어내고 만다. 그러니 아이들과 어른은 영원히 소통할 수 없다. 그 격차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묘사. 그 안 어디쯤엔가 찰스 디킨스는 있다.

 

아이한테 나라는 엄마는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내가 주문한 자그마한 트리가 아이한테는 불만이다. 이것저것 각종 장식 용품까지 아이가 좋아할 모습을 기대하고 검색에 검색을 거듭해서 주문했건만. 아이의 반응은 나를 유치하게 만들었다. 내가 보는 트리와 아이가 기대한 트리의 간극. 그것은 내가 강요로 메울 수 없는 공간이다. 다시금 제대로 다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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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2-07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만요 블랑카님. 블랑카님이 보는 트리가 아이가 기대하는 트리와 다르다고 해도, 거기에 간극이 있다고 해도, 저는 괜찮다고 느껴져요. 물론 그 간극이 없다면 최상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내가 기대한 것과 다른 사람이 보여주는 것은 다를수도 있구나' 하는것도 저절로 알게 되지 않을까요? 음, 이건 제가 여섯살 아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걸까요? 물론,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저 역시 기대 이상의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활짝 웃는걸 보고싶고, 행복해하는 눈빛을 보고싶고.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으면서 저도 블랑카님과 똑같은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찰스 디킨스가 마구 좋아졌어요. 이렇게 아이의 눈으로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정말 괜찮은 사람일 거라는. 핍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집에서 먹을 것을 싸가고 하는 그 두려움들이 아주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지잖아요. 아, 나라면 울음을 터뜨렸을거야, 하면서 읽었었어요.

blanca 2012-12-08 15:2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페이퍼 읽고 아, 맞아, 읽어야지, 했던 거예요. 그래서 고마워요^^ 아, 너무 재미나요. 아껴 읽는 중이에요. <호밀밭의 파수꾼> 저리 가라더라고요.

다크아이즈 2012-12-07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보니 아이 키우던 그 때가 새록새록.
자식은 엄마 뜻대로, 엄마 성향 대로 커주는 게 아니라 오롯이 '지 뜻'대로 커가더군요.
그게 때론 서운할 때도 있지만 신기하기도 해요.
저랑 완전히 다른 성향을 지닌 딸아들을 키우면서(키웠다기 보다 지대로 컸군요.ㅠ)얻은 결론
자식 곁을 맴도는 엄마보다, 자식을 지켜보는 엄마가 자식 교육에는 훨씬 낫더라는...
밀착형 엄마의 회한기보다 방임형 엄마의 자책감이 조금 나아 보이는 요즘.

블랑카님은 현명하니 잘 키우실 것 같아요. 따님 한 명인가요?

blanca 2012-12-08 15:28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제가 요새 느껴요. 저희 엄마가 좀 방임형 스타일이셨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더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도 내공이 필요해서 저는 잘 되지도 않고 혼란스러워요. 예, 딸 하나랍니다. 동생에 대한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지요--;; 자녀분이 얼마나 큰지 궁금해요.^^;;

노이에자이트 2012-12-0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도 예전에는 어린이였을텐데 정작 어린이를 대할 때는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어른이었던 것처럼 하거든요.그게 어른의 특권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디킨스 소설 중에서 요즘은 <위대한 유산>의 인기가 최고더군요.저는 <올리버 트위스트>도 참 재밌게 읽었어요.완역본은 상당히 두툼하더군요.

blanca 2012-12-08 15:26   좋아요 0 | URL
아,<올리버 트위스트>요! 저도 기회가 되면 읽어볼게요. 다른 분 페이퍼에서 <미들마치> 번역이 진행되고 있다고 노자님이 댓글 다신 것 본 것 같아요. 너무 반가워서 기다리는 중인데 제 기억이 맞는지요?

노이에자이트 2012-12-08 20:32   좋아요 0 | URL
올리버 트위스트는 정말 추리소설 같아서 재밌어요.

미들마치 이야기 맞습니다.금성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이미 번역되었으니 도서관 중에서는 비치한 곳이 있을 겁니다.저도 도서관에서 빌려 봤어요.

프레이야 2012-12-07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는 엄마의 한계를 깨닫게 되고 욕구를 조절하는 법도 자연히 익히게 되어요.
엄마가 좀 모자라면 오히려 자율성도 생기구요. (저에 대한 변명 같아요.^^)
엄마가 앞서는 것보다 반 발 정도 물러나 따라가는 것처럼 뒤에서 지켜보는 게 좋다고 들었어요.
저도 집에 크지 않은 트리가 있어요.
아이들 어릴 때 쓴 건데 이젠 폐물이 되어 베란다방 구석에 처박혀 있다는..
그때 울딸들 그닥 내켜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ㅋㅋ 저 혼자 좋아라 했어요. 작은 만족 같은 것이었는데
아이들의 요구와는 간극이 있었겠지요.^^

blanca 2012-12-08 15:2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는 벌써 사춘기가 걱정됩니다. 아이가 엄마가 좀 모자라도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훌륭한 책을 읽는 경험은 첫 키스와 같다. 나는 진심으로 이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열다섯 살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댈러웨이 부인>은 내게 첫 키스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내가 읽은 어떤 책보다 농밀하고 내밀하게 다가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이클 커닝햄

 

 

 

이제 2012년도 채 한달이 남지 않았다. 거울을 본다. 아직도 젊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살아온 날만큼 더 살면 나는 완연한 노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아주 운이 좋은 경우가 아니라면 나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또 몇몇의 지인도 내 곁에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세월은 꾸준하게도 뚜벅뚜벅 제 갈길을 간다. 한파는 시간의 흐름과 마무리를 응축한 은유 같아서 더 시리다. 눈이 와도 이제 강아지처럼 뛰어다닐 일은 없으리라. 아이의 성장은 나의 또다른 시계다.

 

버지니아 울프의 책은 처음이다. 그녀는 나에게 완고하고 성마른 인상이었다. '의식의 흐름기법' 들어는 봤다. 그러니 나는 그녀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 것같지 않았다.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버지니아 울프를 꼭 알아야 할 것 같은 강박을 준다. 그에게 이 책은 첫 키스를 회고하는 첫사랑 같은 글이라 한다. 이미 열다섯 살에 그는 버지니아 울프를 읽었다. 나는 지금에서야 그녀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다. 첫 키스는 뒤늦게도 찾아온다. 이 책은 생각만큼 어렵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의식의 흐름'이란 거창한 어구 아래 그저 내 마음 속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모호한 생각, 느낌 들이 그녀의 명료한 언어로 분출된 듯한 느낌. 정말 농밀한 책. 구십 년도 더 전의 그녀는 어쩌면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무단 침입한 듯하다. 표현할 수 없었던, 말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그녀의 언어에 빚진다. 소설의 한계의 철책은 그녀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구나.

 

 

런던이다. 찬란한 6월의 아침. 오십 대의 클라리사는  파티에 필요한 꽃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선다. 그리고 하루. 파티가 열린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서사는 그것이 전부다. 그녀의 눈에 비친 런던의 풍경, 그녀를 둘러싼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성공한 사람들, 때로는 그렇지 못한 채 소외된 사람들의 정경.

 

그녀는 빅토리아 거리를 가로질러 건너며 인간이 너무나 어리석은 바보처럼 느껴졌다. 무엇때문에 인생을 그렇게 사랑하고, 어떻게 그런 관점으로 인생을 보고, 여전히 꿈을 꾸는 걸까.

-p.9

 

수많은 아침을 밀어넣은 지극히 농밀한 이 하나의 아침. 이 순간. 젊은 시절의 어리석은 사랑도 오늘의 어리석은 세속적인 욕심도 함께 파도처럼 밀려온다. 아무리 불행해도 인생은 포기 못할 그 어떤 마지막 꿀을 숨기고 있다. 무모하고 비겁하고 "낭만적인 해적 같은 남자"인 그녀의 젊은 시절의 사랑, 피터 속에는 이러한 깨달음이 있다.

 

늙는다는 것이 가져다주는 보상은 바로 이거야. 열정은 여전하지만 지난날의 경험을 천천히 불빛 아래 돌려 볼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존재에 최상의 향기를 더해주는 힘이지. <중략> 쉰세 살이 되고 보니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필요치 않았다. 인생 그 자체, 인생의 순간순간, 그것의 방울방울, 여기, 이 순간, 지금 이 햇빛 속에, 리젠트 공원에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정말이지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p.115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추억의 귀환. 끊임없이 테잎은 되감기고 의미는 가공된다. 하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경험도 했더라면 좋았을 경험도 이제는 무의미하다. 내 인생에 삶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의 무게의 추는 숙명적으로 내 삶의 닻이다.  단하나의 무의미함도 어떤 하나의 사소함도 걸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댈러웨이 부인>을 읽아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작품이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속의 '사자' 거기에도 파티가 있었다. 그 파티에 참석했다 우연히 죽어버린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며 흐느끼는 아내 옆에서 삶을 조망하는 남자가 있었다. 묘하게 닮아 있는 이야기.

 

 

 

 

 

 

 

 

 

 

 

 

 

 

 

 

자기라는 존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뿌연 세계로 사라져가고, 그들 죽은 사람들이 한때 살던 현실의 세계 그 자체는 허물어져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 p.291

 

노이모 자매의 파티에 참석한 조카 가브리엘은 아내 레이첼의 추억을 버지니아 울프의 피터처럼 불빛 아래 천천히 돌려보게 된다. 역설적으로 추억의 귀환은 죽음에 대한 명료한 의식으로 연결되고 현재의 순간에 대한 농밀함으로 통한다. 버지니아 울프와 조우하는 부분이다. 두 작가의 생몰 연대를 보니, 놀랍게도 같다. (1882~1941)  버지니아 울프의 약력을 보니 그녀의 죽음이 제임스 조이스의 죽음에서 온 우울증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친분이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밀착되어 있던 관계였던 것같다. 파티라는 생의 축제에서 갑자기 다가오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삶의 본질적 유한성에 대한 두 작가의 공통적인 통찰에서 유려하게 빚어낸 깨달음이다. 클라리사도 가브리엘도 어쩌면 작가들 자신의 투영인지 모르겠다. 파티를 개최하고 파티에서 시를 읽고. 각기 다른 의미에서 파티에서의 주인공 역할을 했던 그들도 그들이 걸었던 그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거리도 이제는 없다. 그리고 그 둘은 그럴 것을 이미 안다. 내일 죽을 것을 이미 아는 것은 머리로 가능한 명제이지, 가슴으로 간직하는 깨달음은 아니다. 모든 것의 유의미성도 무의함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지금 하는 사랑은, 지금 하는 일은 우리가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 되기도 하고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하게 되기도 한다. 삶 앞에서 어리석어지는 것은 이 단순한 명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클라리사의 말처럼 그것은 의회의 법령으로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뛰어들고 싶어했을 정도로 화창했던 유월의 아침. 그 순간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반복된다.

 

눈이 온단다. 사박사박 그 눈을 밟으면 2012년 12월 5일은 또 허공으로 스러질 것이다. 그 경계를 딛고 나는 또 나아가고. 무작정 스산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댈러웨이 부인>은. 

 

P.S.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 바치는 일종의 헌사다. 각기 다른 세 시대, 세 여인의 접점은 <댈러웨이 부인>이다. 심지어 한 명은 댈러웨이 부인의 클라리사라는 이름과 같다. <디 아워스>로 영화화되기도 했던 이 작품을 <댈러웨이 부인>과 함께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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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사랑의 시작
    from A Month in the Country 2012-12-06 23:17 
    서재 이웃분이 한 번은 내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소설을 쓰게 된다면 누구처럼 쓰고 싶은지. 소설이나 글을 같은 것으로 이해한 나는 누구를 표준모델로 골라야할까 고민을 좀 했었다. 일전 한 페이퍼에서도 썼었는데, 내게 '글'이란 정연(井然)과 정연(整然)이 만나서 이뤄내는 무겁거나 깊은 어떤 것,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의 밖에 머무는 어떤 것이다. 지금처럼 소소한 상념들을 블로그에서 끄적거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문학소녀 시절을 벗어난 이후 '소설'이든 '
 
 
댈러웨이 2012-12-05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요즘 저는 <출항>을 끝냈고, 울프의 다른 책들이 오는 동안 <등대로>를 다시 읽었고, <제이콥의 방>을 읽고 있어요. 반가워요. 버닝햄의 책도 함께.

댈러웨이 2012-12-05 21:35   좋아요 0 | URL
마이클 커닝햄이에요. 뭘 버닝하고 싶었던 걸까요 저는? --; 블랑카님, 저 먼댓글 달고 싶어지는데요? ^^

blanca 2012-12-06 09:31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이 떠올랐어요. 왜 댈러웨이라고 이름 붙이셨는지 설명 안 하셔도 느낌으로 다가올 만큼 너무 좋은 책이더라고요. 저도 커팅햄이라고--;; 수정했답니다. 참, 댈러웨이님! 저 울프의 다음 책으로 재미있고 감동적인 것으로(아, 너무 지난한 표현이지만) 한 권 더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다크아이즈 2012-12-05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커팅햄의 <첫 키스> 비유가 왜 <댈러웨이 부인>에 가서 걸리는지 아직 이해가 안 되는 일인.
억지로 읽어보려 했는데도 그냥 덜 읽고 반납하고 만 기억이 있네요.
어쩌면 번역상의 문제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안을 삼아봅니다.
291쪽 옮긴 글(깔끔한 번역 같지 않아요.)보다 저는 블랑카님의 해설이 더 좋은 걸 어쩌라구요?^^

blanca 2012-12-06 09:33   좋아요 0 | URL
아, 팜므느와르님, 댓글 읽고 커닝햄의 <세월>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추신으로 덧붙였습니다.^^ 아, 번역이요! 그러실 수도 있어요. 제가 읽은 이태동님의 번역은 참 좋았어요. 일단 표지가 이뻐서 낙찰했더랍니다.^^;;
 

이런 뭉클함은 간만인 것 같다. 책 말미 작가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 "사망하기 이 주 전,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금을 수령한다."는 지점.

 

 

 

 

 

<감상소설>의 작가 미하일 조셴코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평생 소외된 삶을 산다. 혁명 후 고도의 정치화된 소련 사회에서 그가 그려내는 지극히 평범하거나 빈곤한 사람들의 정경은 하나의 직무유기로 치부되어 마침내 작가동맹에서조차 제명되어 생계에 극도로 곤란을 겪게 된다. 해결의 물꼬가 트이자마자 죽음을 맞게 되는 그의 삶은 그가 이 책에서 그려낸 숱한 비극적 삶의 주인공들과 묘하게 겹친다.

 

이 소설들은 변변찮고 약한 사람들과 서민들에 대한 것이며, 사라져가는 가련한 삶에 대한 것이다.
-1판 서문 중

 

 

그는 러시아의 톨스토이도 도스토예프스키도 아니다. 생소한 작가. 지극히 평범한 제목의 단편집. 그러나 이 책 속에서 만나게 되는 갑남을녀는 비범하다. 이야기 속에 박제된 비현실적인 종잇장같은 인물들 대신 당장이라도 펄떡이며 물 위로 튀어오를 것 같은 그들의 생명력은 적나라하게 사실적이다.  작가는 나약하고 어리석고 하나는 알지만 둘은 모르는, 그래서 자기가 쳐 놓은 함정에 자기가 빠지기도 하는 그런 불완전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자본주의 사회로 치면 루저들에 대한 조망이다. 그 루저들은 하나의 기질이 극대화되어 희화화된 면도 있지만 그 속에 자잘하게 흩어져 있는 그들의 실수와 착각은 지극히 사실적이다. 무언가를 제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우리들은 미끄러진다.

 

아폴론과 타마라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군대 징집에 끌려가는 무도회 전문 피아니스트. 그는 몰락한 채로 돌아오고 여자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 이제는 단조로운 피아노 소리에 왈츠를 추는 문화마저 쇠락의 길을 걷고 피아니스트는 공동묘지의 산역꾼이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몰락일까? 사랑하는 여자와 이루어지지 않고 더이상 아름다운 음악들을 연주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그의 삶은 다른 종류의 소소한 행복들로 채워진다. 그는 성실히 일하며 평화롭게 늙어간다. 그리고 예전의 여자가 죽고 난 이틀 뒤에 죽는다. 그의 삶은 그렇게 흘러가 마침표를 찍는다. 군대에 소환되지 않고 무도회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높여 사랑하는 여자와 살았어도 이렇게 행복했을까? 그 여자와 손을 맞잡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삶은 단편적인 도식에 의하여 성립하는 명료한 결론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글과 말로 체감할 수 없다. 대신 이런 작가의 이러한 이야기로 찰나이나마 저릿하게 느낀다. 그때 그랬더라면, 나는 더 행복했을까? 그것은 아무도 단정지을 수 없다. 외형적인 가치 척도로 절대 우위에 있는 상황의 가정법 안과 그렇지 않은 배경 속의 나. 삶은 저울질로 완벽하게 무게를 잴 수 없다.

 

사람들

 

귀족 가문 출신의 사내가 몰락하여 마침내 아내마저 이웃에게 빼앗기는 처지가 되는 정경은 눈물겹다. 그가 짐승처럼 살며 아내 주위를 배회하다 떠나고 난 뒤 아내는 이웃 남자의 아이를 출산한다. 작가는 '멋진 봄이었다'고 시니컬하게 이야기한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내의 전남편에게서 빼앗아 온 석유곤로 값을 돌려줄 수 없게 되자 그 금액만큼을 고아원에 기부한다. 사라져 버린 '그'가 가졌던 느낌들은 낯설지 않다. 삶은 오늘도 여전히 투쟁에서 멀리 있지 않다. 자신의 아이를 낳은 기념으로 고아원에 기부를 하는 남의 아내를 빼앗은 남자는 어떠한가. 이런 모순적이고도 비합리적인 캐릭터가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한 적이 있었던지. 그러나 현실 안에서 우리는 절대로 조화될 수 없는 것들이 오롯이 한데 담긴 사람들을 종종 마주친다. 사람의 속은 때로 마블링 같다. 도저히 섞일 수 없는 것들이 한데 뒤틀려 있는 모습. 그것은 차마 직시하기 힘들었던 인간의 복합적인 내면의 표출이다.

 

그는 불가사의한 삶 앞에서 경악했다. 삶이란 지상에서의 존재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목숨을 건 투쟁 같았다. 그는 죽음과 같은 슬픔 속에서 문제는 바로 삶의 지속이라고 느끼며 자신의 능력, 자신의 지식, 그리고 그것을 적용할 수단을 생각하고 찾았다.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차례로 상기한 후,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서글픈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 중

 

 

즐거운 모험

 

전도유망한 청년이 아가씨와의 저녁 데이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친척 아주머니의 죽음을 기다리는 풍경은 또 어떠한가. 아주머니는 마침내 죽고 청년은 아주머니가 남긴 유산으로 아가씨와 결혼에까지 이른다. 작가는 맹랑하다. "그들은 행복했다." 고 이야기한다. 여기에 권선징악은 없다. 어떤 일로도 단죄받지 않는다. 그가 삶을,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은.

 

 

 인생이 가로수 길을 걷는 아침 산책처럼 보이던 젊고 아름답던 시절에, 작가는 인생의 어두운 면을 많이 보지 못했다. 그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작가의 두 눈이 그런 것을 보려 하지 않았다. 작가의 눈은 여러 가지 즐거운 것들을, 여러 가지 아름다운 대상과 경험만을 보았던 것이다. 꽃이 자라는 모습, 꽃봉오리가 벌어지는 모습, 하늘에 구름이 떠가는 모습, 사람들이 뜨겁게 사랑하는 모습만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발생하고 , 무엇이 무엇으로 움직이고 무엇에서 자극을 받는지, 작가는 어린 나이와 우둔한 성격과 순진한 관점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물론 훗날 작가는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여러 가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 이런 것이 보인다. 머리가 백발인 사람 하나가 다른 사람과 악수하고, 그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건넨다. 예전이라면 작가는 이런 장면을 보고 영혼의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중략> 그렇지만 지금 작가는 시선의 착각을 믿지 않는다. 의심이 작가를 삼켜버렸다. 작가는 그 백발의 사람이 악수를 하고 상대방의 눈을 응시하는 것은 위태로운 자신의 일자리를 살려보려 하거나 교수 자리를 얻어 미와 예술에 대해 강의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한다.

- <라일락 꽃이 핀다> 중

 

슬프지만 우리는 상대방을 오해하고 오독하며 켜켜이 쌓인 불신의 탑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 방어기제를 평생을 통해 활용한다.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도 없고 아름다움과 진실의 가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삶 그 자체를 추동할 수도 없다. 먹고 살고 견디려면 어느 정도는 절망적이어야 한다. 차마 할 수 없었던 말들과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감정들이 그의 인물들을 통해 표현될 때 우리는 찔리기도 하고 속절없이 웃음보가 터지기도 한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다"라고 이야기했던 찰리 채플린의 시선은 조셴코가 이미 형상화했던 명제였다. 암염소를 소유한 줄 알고 뚱뚱하고 늙은 여자에게 접근했다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구조조정까지 당하는 하급관리의 이야기에 마냥 웃어젖힐 수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그러니까 이런 것이 전부일까? 작가 조셴코는 지나치게 솔직하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우리의 내면에서 지치지 않고 피어오르는 그 작은 소망. 그도 그런 게다. 그러니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겠지.

 

그러나 작가의 성정은 감상적이며, 작가가 소망하는 것은 보도 위에 제비꽃이 자라는 것이다.

-<라일락 꽃이 핀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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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1-29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블랑카님 오랜만입니다. 저만 오랜만인가요~? ㅎㅎ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단편집이라.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조합이라 기대가 가요.
특히 피아니스트가 나오는 첫번째 단편이 끌리는 군요.

blanca 2012-11-30 10:23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서재에는 종종 방문하고 있다지요. 이제 곧 방학이네요. 어떤 계획을 세우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도 검색하다 그냥 기대없이 읽게 되었는데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답니다.

댈러웨이 2012-11-30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렇게 리뷰를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제가 지금 뭐 했게요? 비밀! ^^

blanca 2012-11-30 10:2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온갖 상상이--;;

2012-11-30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30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11-30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뭉클한 단편, 읽고 싶어지는 책이네요.
문학동네, 요새 할인대전 하던데 왕창 구입하고 싶지만 갈등 중이에요^^

댈러웨이 2012-11-30 10:4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 오늘까지 미루다가 그래서 문학동네 지를려구 책상에 앉았어요. ㅎㅎㅎ.40프로면 정말 배송비 빼고도 남는 금액요. 민음사도 40프로라. 하. 갈등요.

blanca 2012-11-30 18:37   좋아요 0 | URL
그게 한 두권씩은 해당 안되는 이야기겠죠? 이 댓글들을 읽는 순간 또 찾아보러 가게 되네요 ㅋㅋ

Jeanne_Hebuterne 2012-12-03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상상력이 있는 사람도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순간이 있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리뷰.

blanca 2012-12-05 12:45   좋아요 0 | URL
아, 상상력에 비례하는 공감력이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누군가를 심하게 아프게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나는 늦된 아이에 속하였고 특히나 숫자에 둔감했다. 초등학교 3학년 나눗셈 쪽지시험을 보았을 때 물론 결과는 처참했고 틀린 수대로 손바닥을 맞고는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수학, 물리학, 화학 등에서는 꾸준히 고전을 면하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영영 숫자, 과학과는 멀어질 줄 알고 기뻐했지만

 

소위 문과 속의 이과라 통칭되는 전공과 관련된(그러니까 나의 전공과는 무관한) 회사에 취업을 해서 울며불며 또 회계 공부를 해야 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니 나는 이런 책을 읽고 좌절할 수밖에. 솔직히 청소년 권장도서라는데도 불구하고 화학에 관련된 내용의 태반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분명 중고등학교 수준이었을 텐데.

 

 

 저자 올리버 색스는 이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신경정신과 교수로 로버트 드니로와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사랑의 기적>의 원작자로도 유명하다. 2004년 출간된 <엉클 텅스텐>의 개정판이다. 일종의 올리버 색스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꼬마 소년의 화학에 대한 열정의 기록이라고나 할까. 중간 중간 과학과 의학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장착하고 태어난 듯한 대가족에 대한 아련한 시간들에 대한 회고도 있다.

 

엉클 텅스텐은 텅스텐으로 백열 전구의 필라멘트를 만드는 일을 했던 올리버의 데이브 외삼촌을 일컫는 용어다. 18남매 중 열여섯 째로 태어난 어머니 덕분에 올리버는 이모와 삼촌 풍년을 맞는다. 삼촌들은 올리브의 화학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해소시켜 주는 역할을, 이모들은 숫자와 자연, 애정에 대한 갈구를 충족시켜 준다. 그러나 주로 그가 하는 이야기는 역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직선적, 논리적인 순서가 아니라 도약, 분열, 수렴, 일탈, 반복, 궁지로 점철된 화학사에 대한 것이다. 돌턴의 원자론으로부터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양자의 발견까지 화학 교과서에서 줄기차게 거론되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기억의 지형에서 사라져 버린 것들이 정말 낯설게 그러나 때로는 낯익게 튀어 나온다. 물론 그의 입을 빌려 나오면 최대한 지루하지 않게 각색된다. 한창 화학 교과서 주기율표에서 원소들의 위치와 특성을 암기해야 하는 현역에 있는 학생들이 읽는다면 시너지 효과가 상당할 것 같다. 화학을 단순히 여러 교과 중 골치 아프고 실생활과 동떨어진 것으로 박제한 상태에서 암기하고 끝내버린 나로서는 너무 뒤늦게 발견한 책이라 아쉬울 뿐이다. 꼬마 올리버가 이렇게 화학에 열중한 이유는

 

내가 화학을  사랑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화학이 '전환의 과학'이기 때문이었다. 성질 자체는 고정되어 변함없고 영원한 몇십 가지의 원소가 수많은 화합물을 탄생시키기 때문이엇다. 원소의 고정불변성은 나에게 심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불안한 세상에서 한 자리를 지키는 일종의 닻과 같았다.

-p.323

 

라듐에 대한 장에서 그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선물받아 읽었던 퀴리부인의 전기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기억과 겹친다. 시간이 훌쩍 흘러 그가 수많은 청중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을 때 그의 추억은 한 명의 청중을 미소짓게 한다. 바로 퀴리 부인의 딸이자 그 전기의 저자였던 에브 퀴리였다. 나도 언젠가였는 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제일 처음으로 읽은 전기가 바로 마담 퀴리에 관한 것이었다. 삽화가 아주 아름다워서 퀴리 부인이 소녀 시절에 마호가니 책상(아, 마호가니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했다)앞에서 아버지와 나누던 교감, 다락방에서 추위에 떨며 밤을 지새던 모습, 남편의 죽음 등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마지막 장에는 흑백 사진으로 퀴리 부인과 남편이 자전거를 타고 떠났던 허니문의 기록도 있었다. 그 책을 몇 번이고 읽고 나도 퀴리 부인처럼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기억이 난다. 올리버 색스도 그런 식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회상하며 아련한 잔상에 잠겼다 퀴리 부인의 딸과 조우한 대목에서 나도 마치 그런 상황에 맞닥뜨린 것처럼 반가웠다. 원자물리학, 핵물리학은 순수하고 태평했던 퀴리 부부의 시대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는 그의 슬픈 증언은 인간의 지적인 호기심, 사물의 진리를 파헤지고자 하는 연구욕이 지배욕과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려는 욕망으로 변질되어 버릴 때 얼마나 비극적인 파국으로 치닫는 지를 보여준다.

 

자 이 정도까지 왔으면 이 책은 당연히 따라올 것이다. 솔직히 끝까지 못 읽었다. 주기율표의 원소 하나 하나마다 자신의 삶을 대응시킨 프리모 레비의 간이 자서전 같은 이야기. 아마 나는 우라늄부터 인내심과의 사투를 벌이다 포기해 버렸던 것같다. 올리버 색스의 책과 함께 읽었으면 완독에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같다.

 

 

 

 

 

 

 

 

 

 

 

 

 

 

 

 

 

가을에는 이 세상 어느 나라에서나 똑같은 냄새가 난다. 낙엽, 휴식하는 대지, 불타는 나뭇가지 더미, 즉 '영원'하리라고 생각했지만 끝나가는 것들에게서 나는 냄새 말이다.
- <주기율표> p.133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상상과 감성을 잊고 워즈워드도 말했다시피 '찬란했던 영광이 평범한 일상의 빛으로 바래가는 과정'인 걸까?

-<이상하거나 멍청하거나 천재이거나>p.354 

 

 

올리버 색스는 열네 살 때 '화학에 대한 열정이 죽었다'고 느낀다. 끝나가는 것들. 유년기의 끝과 청소년기의 시작이 맞물려 있는 지점에서 올리버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하지만 그는 당시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 든 할아버지가 되어 그 시간들을 다시 복기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미소짓기도 하며 '영원'하리라고 생각했지만 끝나가는 것들에서 나는 냄새를 다시 찬찬히 맡는다. 그리고 그 향기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전염된다. 관심분야는 달랐지만 무언가에 대한 계산되지 않은 열정으로 하루가 짦았던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오는 책. 다 읽고 나면 태반이 화학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절반을 넘는 삶에 대한 아련한 아름다움으로 마음이 뭉클해진다. 좋은 책. 아이가 크면 화학이 지겹다고 얘기하기 시작하면 꼭 읽히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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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13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학과목을 싫어했던 저도 이 책을 학생때 읽었더라면 좋았겠어요. 주기율표도 전 완독 못한 상태인데 저런 구절이 있군요! 블랑카님 여긴 제법 바람이 쌀쌀해요. 행복한 오후 보내세요.^^

blanca 2012-11-14 10:21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님, 여긴 정말 너무 너무 추워용. 따악 감기 걸리기 좋은 날씨. 전 겨울을 안 좋아해서 벌써 봄을 기다린답니다.

다크아이즈 2012-11-13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딴 건 모르겠고, 지금 같은 가을에는 블랑카님의 글을 읽는 게 제격이란 생각밖에는...
이런 화학스런(!) 책을 어떻게 감질맛나는 블랑카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지 시샘 어린 존경만...
앗, 위에는 제가 의지하는 프레이야님 등장하셨다~~ 늦가을 오후 저, 대박났어요.

blanca 2012-11-14 10:23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솔직히 제가 책을 제대로 읽었는 지도 모르겠어요^^;; 여하튼 이제 좀 말랑말랑한 책들로 가려고 한답니다.

댈러웨이 2012-11-14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퀴리부인을 저도 읽은 것 같은데 왜 마호가니 책상 같은 건 기억이 안날까요? --;

블랑카님, 사실 좀 일찍 댓글을 달고 싶었어요. 근데, 저도 심하게 문과였는데... 이런 책을 읽으셨네요. --; 밑에 인용하신 두 부분은 문학책 같습니다. --; 뭐에요, 이 책? 왜 이렇게 헷갈리게 하는 거에요? --; (땀만 삐질삐질 --; 그렇지만, 나중에 아이에게 읽히면 정말 좋을 것 같긴 하네요. ^^)

blanca 2012-11-15 09:59   좋아요 0 | URL
저는 그 책상이 너무 강렬해서^^;; 뭔가 찾아보고 그랬던 것 같아요. 저에겐 역시나 무리수였던 것 같아요. 좋은 책들이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더라고요. 딱 화학 시간에 수업 받을 때 함께 읽으면, 특히나 주기율표 배울 때 너무 좋을 것 같아요.^^

Jeanne_Hebuterne 2012-11-26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주기율표를 외우고, 화학과 생물의 그 무서운 결과 값에 감동했던 사람 중 1인으로서 주기율표를 아직 못 읽은 것이 늘 부끄러웠습니다. 이렇게 보면 칼슘 같기도 하고 저렇게 보면 칼륨 같기도 한데 철이 아닐까? 라는 대화는 화학에서는 불가능했어요. Ca는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칼슘이 될 수밖에 없는 그 명징함. 나올 수 없는 무엇이 나오면 돌연변이라 일컫는 희극을 사랑했어요. 어쩌면 너무 많은 기준에 자신을 스스로 맞출 수 없어 한탄하다 겨우겨우 찾아낸 원칙에 기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블랑카 님의 글을 읽으니 뒤늦게 듭니다. 깨달음은 너무 늦거나 이르지 않게 찾아와야 하는 것을.

blanca 2012-11-29 10:05   좋아요 0 | URL
저는 이과와는 담쌓고 지낸 사람이라 이런 명료한 학문에 열중하고 빠질 수 있는 사람들은 또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 같아 한편 부럽답니다. 다음 생에는 좀더 명료하고 용감하게 태어나고 싶어요.쥬드님.

다락방 2012-11-30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기율표]의 티타늄편이요, 블랑카님. 이 책은 티타늄에서 압권이에요!!

blanca 2012-12-02 14:3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다시 한번 <티타늄>편 차근차근 읽어볼게요!
 
무도회가 끝난 뒤 펭귄클래식 8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무도회가 끝난 뒤>는 마치 삶의, 청춘의 은유 같다. 제목만으로도 왠지 심호흡을 하게 된다. 삶은 몇 개의 찬란한 순간과 그 순간들의 뒷감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 뒷감당이 반드시 성가시고 초라하고 처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삶의 교사 톨스토이가 교조적인 설교를 늘어 놓을 때에는 조금 멈칫하게도 되지만 이 작품에서 그는 설교대신 명징한 서사를 날린다.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 데에 절로 수긍이 갈 정도로 더할 것도 덜어낼 것도 없는 딱 그대로의 완벽한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눈부신 순간들이 있다. 노년에서 뒤돌아 본 그곳에 정지되어 있는 순간들은 그 자체로 빛을 발한다. 평범한 이름의 이반은 젊고 활기찼던 대학생 순간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그의 회고담을 숨을 멈추고 듣는다. 거기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소녀가 있고 그 소녀가 위무도 당당한 은빛 견장을 단 아버지와 등장하여 마주르카를 춘다. '나'의 앞에서 그 부녀는 하나로 혼재된다. 딸을 아름답게 입히기 위하여 정작 자신은 낡은 부츠를 신고 딸과 무도회에서 스텝을 밟는 아버지. '나'는 단박에 그 부녀의 이미지와 사랑에 빠진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소박한 부츠와 딸을 닮은 다정한 미소가 함께 떠오르면서 가슴 벅차도록 정겹고 따뜻한 감정이 밀려들었지요.

-톨스토이 <무도회가 끝난 뒤> 중

 

삶은 때로 가혹하게 교훈을 설파한다. 삶은 단순하지 않다. 무도회에서의 아름다운 부녀와 사랑에 빠진 젊은 청년의 이야기는 결코 해피엔딩일 수 없다.  반전은 잔혹하게 다가온다. '나'는 거리에서 그 다감하던 아버지의 모습 대신 도망가려던 포로를 가차없이 매질하고 학대하는 폭력의 주동자로 그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의 시선을 짐짓 피한다. 당당하고 부유한 아버지가가 되기 위하여 타협하여야 하는 것들,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무언가 이성적이고 세속적이고 그럴 듯한, 그렇고 그런 설명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톨스토이는, '나'는 이러한 폭력의 구체화만으로도 자신의 소망, 환상, 사랑을 그 자리에서 포기해 버린다. 톨스토이가 자신이 가진 막대한 재산, 저작권을 포기하려 했던 그 모습과도 닮아 있다. 어느 순간, 무언가를 깨달아 버린 그 자리에서 다시 물러서기란 쉽지 않다. 그게 뭐 어때서,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라고 쉽게 타협하고 체념해 버리고 침묵해 버리고 견디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두 남자는 묘하게 닮아 있다. 그렇게 인생의 비의는 벗겨진다. 정말 톨스토이다운 이야기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가난하고 비참한 농노가 주인에게 자신의 결백과 진정성을 증명해 보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한 심부름은 맡은 돈을 허무하게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가 대들보에 목을 매는 것으로 종결된다. <폴리쿠시카>. 이 불쌍하고 전혀 정당해 보이지 않는 삶에 대한 묘사의 천착은 눈물겹다.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하니 막힌다. 옮긴이가 '최상의 리얼리즘을 이루어 낸 작가'라고 그를 명명한 것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삶은 그 정도로 비참하고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맥을 함께 한다.

 

<무도회가 끝난 뒤> 사랑과 정의와 대의의 환상에서 비틀거리며 걸어나온  그 청년과 <폴리쿠시카>의 그 비참한 농노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톨스토이는 절망을 얘기하려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얘기해 버렸다. 대령에게서 매질을 당하던 포로와 그 대령의 품에 안겨 사뿐히 스텝을 밟던 아름다운 소녀와 주인에게 자신의 충절을 증명해 보이려다 또다른 배신자처럼 오인받을 상황에 몰려 목을 맨 농노. 이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다 존귀하고 눈물겨운 생명이다. 그런 얘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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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2-10-31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훔쳐볼 때마다 <글 잘쓰는 블랑카>라는 생각만 들게 하는 블랑카님.
첫 단락부터 장난이 아니네요.
많이 읽는다고 다 잘쓰는 건 아닐텐데, 이건 뭐... 비결은 꾸준히 쓰는 걸까요?

blanca 2012-10-31 22:14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쌀쌀한 날씨에 제 마음 따뜻해지라고 이런 댓글 달아주시는 거지요?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2-10-31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첫 문단부터 압도적입니다^^
블랑카님, 전 요즘 안나 카레니나를 뒤늦게 읽고 있어요. 영화는 진작에 봤지만 원작을 제대로 읽질 않아서요.
언젠가 님이 쓰신 리뷰도 본 적 있는데요.
톨스토이는 절망을 얘기하려다 사랑을 외치는, 그런 작가 같아요, 정말.

blanca 2012-10-31 22:15   좋아요 0 | URL
와, 프레이야님! 안나 카레니나 읽고 계시는군요! 아 꼭 리뷰 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