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뭉클함은 간만인 것 같다. 책 말미 작가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 "사망하기 이 주 전,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금을 수령한다."는 지점.

 

 

 

 

 

<감상소설>의 작가 미하일 조셴코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평생 소외된 삶을 산다. 혁명 후 고도의 정치화된 소련 사회에서 그가 그려내는 지극히 평범하거나 빈곤한 사람들의 정경은 하나의 직무유기로 치부되어 마침내 작가동맹에서조차 제명되어 생계에 극도로 곤란을 겪게 된다. 해결의 물꼬가 트이자마자 죽음을 맞게 되는 그의 삶은 그가 이 책에서 그려낸 숱한 비극적 삶의 주인공들과 묘하게 겹친다.

 

이 소설들은 변변찮고 약한 사람들과 서민들에 대한 것이며, 사라져가는 가련한 삶에 대한 것이다.
-1판 서문 중

 

 

그는 러시아의 톨스토이도 도스토예프스키도 아니다. 생소한 작가. 지극히 평범한 제목의 단편집. 그러나 이 책 속에서 만나게 되는 갑남을녀는 비범하다. 이야기 속에 박제된 비현실적인 종잇장같은 인물들 대신 당장이라도 펄떡이며 물 위로 튀어오를 것 같은 그들의 생명력은 적나라하게 사실적이다.  작가는 나약하고 어리석고 하나는 알지만 둘은 모르는, 그래서 자기가 쳐 놓은 함정에 자기가 빠지기도 하는 그런 불완전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자본주의 사회로 치면 루저들에 대한 조망이다. 그 루저들은 하나의 기질이 극대화되어 희화화된 면도 있지만 그 속에 자잘하게 흩어져 있는 그들의 실수와 착각은 지극히 사실적이다. 무언가를 제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우리들은 미끄러진다.

 

아폴론과 타마라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군대 징집에 끌려가는 무도회 전문 피아니스트. 그는 몰락한 채로 돌아오고 여자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 이제는 단조로운 피아노 소리에 왈츠를 추는 문화마저 쇠락의 길을 걷고 피아니스트는 공동묘지의 산역꾼이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몰락일까? 사랑하는 여자와 이루어지지 않고 더이상 아름다운 음악들을 연주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그의 삶은 다른 종류의 소소한 행복들로 채워진다. 그는 성실히 일하며 평화롭게 늙어간다. 그리고 예전의 여자가 죽고 난 이틀 뒤에 죽는다. 그의 삶은 그렇게 흘러가 마침표를 찍는다. 군대에 소환되지 않고 무도회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높여 사랑하는 여자와 살았어도 이렇게 행복했을까? 그 여자와 손을 맞잡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삶은 단편적인 도식에 의하여 성립하는 명료한 결론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글과 말로 체감할 수 없다. 대신 이런 작가의 이러한 이야기로 찰나이나마 저릿하게 느낀다. 그때 그랬더라면, 나는 더 행복했을까? 그것은 아무도 단정지을 수 없다. 외형적인 가치 척도로 절대 우위에 있는 상황의 가정법 안과 그렇지 않은 배경 속의 나. 삶은 저울질로 완벽하게 무게를 잴 수 없다.

 

사람들

 

귀족 가문 출신의 사내가 몰락하여 마침내 아내마저 이웃에게 빼앗기는 처지가 되는 정경은 눈물겹다. 그가 짐승처럼 살며 아내 주위를 배회하다 떠나고 난 뒤 아내는 이웃 남자의 아이를 출산한다. 작가는 '멋진 봄이었다'고 시니컬하게 이야기한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내의 전남편에게서 빼앗아 온 석유곤로 값을 돌려줄 수 없게 되자 그 금액만큼을 고아원에 기부한다. 사라져 버린 '그'가 가졌던 느낌들은 낯설지 않다. 삶은 오늘도 여전히 투쟁에서 멀리 있지 않다. 자신의 아이를 낳은 기념으로 고아원에 기부를 하는 남의 아내를 빼앗은 남자는 어떠한가. 이런 모순적이고도 비합리적인 캐릭터가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한 적이 있었던지. 그러나 현실 안에서 우리는 절대로 조화될 수 없는 것들이 오롯이 한데 담긴 사람들을 종종 마주친다. 사람의 속은 때로 마블링 같다. 도저히 섞일 수 없는 것들이 한데 뒤틀려 있는 모습. 그것은 차마 직시하기 힘들었던 인간의 복합적인 내면의 표출이다.

 

그는 불가사의한 삶 앞에서 경악했다. 삶이란 지상에서의 존재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목숨을 건 투쟁 같았다. 그는 죽음과 같은 슬픔 속에서 문제는 바로 삶의 지속이라고 느끼며 자신의 능력, 자신의 지식, 그리고 그것을 적용할 수단을 생각하고 찾았다.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차례로 상기한 후,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서글픈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 중

 

 

즐거운 모험

 

전도유망한 청년이 아가씨와의 저녁 데이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친척 아주머니의 죽음을 기다리는 풍경은 또 어떠한가. 아주머니는 마침내 죽고 청년은 아주머니가 남긴 유산으로 아가씨와 결혼에까지 이른다. 작가는 맹랑하다. "그들은 행복했다." 고 이야기한다. 여기에 권선징악은 없다. 어떤 일로도 단죄받지 않는다. 그가 삶을,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은.

 

 

 인생이 가로수 길을 걷는 아침 산책처럼 보이던 젊고 아름답던 시절에, 작가는 인생의 어두운 면을 많이 보지 못했다. 그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작가의 두 눈이 그런 것을 보려 하지 않았다. 작가의 눈은 여러 가지 즐거운 것들을, 여러 가지 아름다운 대상과 경험만을 보았던 것이다. 꽃이 자라는 모습, 꽃봉오리가 벌어지는 모습, 하늘에 구름이 떠가는 모습, 사람들이 뜨겁게 사랑하는 모습만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발생하고 , 무엇이 무엇으로 움직이고 무엇에서 자극을 받는지, 작가는 어린 나이와 우둔한 성격과 순진한 관점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물론 훗날 작가는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여러 가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 이런 것이 보인다. 머리가 백발인 사람 하나가 다른 사람과 악수하고, 그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건넨다. 예전이라면 작가는 이런 장면을 보고 영혼의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중략> 그렇지만 지금 작가는 시선의 착각을 믿지 않는다. 의심이 작가를 삼켜버렸다. 작가는 그 백발의 사람이 악수를 하고 상대방의 눈을 응시하는 것은 위태로운 자신의 일자리를 살려보려 하거나 교수 자리를 얻어 미와 예술에 대해 강의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한다.

- <라일락 꽃이 핀다> 중

 

슬프지만 우리는 상대방을 오해하고 오독하며 켜켜이 쌓인 불신의 탑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 방어기제를 평생을 통해 활용한다.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도 없고 아름다움과 진실의 가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삶 그 자체를 추동할 수도 없다. 먹고 살고 견디려면 어느 정도는 절망적이어야 한다. 차마 할 수 없었던 말들과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감정들이 그의 인물들을 통해 표현될 때 우리는 찔리기도 하고 속절없이 웃음보가 터지기도 한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다"라고 이야기했던 찰리 채플린의 시선은 조셴코가 이미 형상화했던 명제였다. 암염소를 소유한 줄 알고 뚱뚱하고 늙은 여자에게 접근했다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구조조정까지 당하는 하급관리의 이야기에 마냥 웃어젖힐 수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그러니까 이런 것이 전부일까? 작가 조셴코는 지나치게 솔직하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우리의 내면에서 지치지 않고 피어오르는 그 작은 소망. 그도 그런 게다. 그러니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겠지.

 

그러나 작가의 성정은 감상적이며, 작가가 소망하는 것은 보도 위에 제비꽃이 자라는 것이다.

-<라일락 꽃이 핀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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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1-29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블랑카님 오랜만입니다. 저만 오랜만인가요~? ㅎㅎ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단편집이라.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조합이라 기대가 가요.
특히 피아니스트가 나오는 첫번째 단편이 끌리는 군요.

blanca 2012-11-30 10:23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서재에는 종종 방문하고 있다지요. 이제 곧 방학이네요. 어떤 계획을 세우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도 검색하다 그냥 기대없이 읽게 되었는데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답니다.

댈러웨이 2012-11-30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렇게 리뷰를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제가 지금 뭐 했게요? 비밀! ^^

blanca 2012-11-30 10:2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온갖 상상이--;;

2012-11-30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30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11-30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뭉클한 단편, 읽고 싶어지는 책이네요.
문학동네, 요새 할인대전 하던데 왕창 구입하고 싶지만 갈등 중이에요^^

댈러웨이 2012-11-30 10:4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 오늘까지 미루다가 그래서 문학동네 지를려구 책상에 앉았어요. ㅎㅎㅎ.40프로면 정말 배송비 빼고도 남는 금액요. 민음사도 40프로라. 하. 갈등요.

blanca 2012-11-30 18:37   좋아요 0 | URL
그게 한 두권씩은 해당 안되는 이야기겠죠? 이 댓글들을 읽는 순간 또 찾아보러 가게 되네요 ㅋㅋ

Jeanne_Hebuterne 2012-12-03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상상력이 있는 사람도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순간이 있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리뷰.

blanca 2012-12-05 12:45   좋아요 0 | URL
아, 상상력에 비례하는 공감력이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누군가를 심하게 아프게 할 수 없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