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죄와 벌 1~2 - 전2권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문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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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중의 걸작. 마지막 대목 읽고 전율. 도스토옙스키가 생존해서 로쟈와 소냐가 유형 생활을 겪고 마침내 어떻게 됐는지 후속편을 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재미있고 문장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악과 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넓혀줌. 인내심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고전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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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9-15 17: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죄와 벌이 인내심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고전읽기였다는 말씀에 너무 공감합니다! 즐건 저녁시간되십시요!ㅎ

blanca 2021-09-15 19:18   좋아요 2 | URL
막시무스님도 아시는군요!오랜만에 느낀 감정이었어요.

새파랑 2021-09-15 17: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내심을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는 말 멋지네요 ^^

blanca 2021-09-15 19:18   좋아요 1 | URL
저는 정말 많은 인내심을 요구할 줄 알았거든요 ㅋㅋ

다락방 2021-09-15 17: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물다섯에 읽었는데 블랑카님 평을 보니 지금 새로 읽고 새로운 감상을 갖고 싶어지네요. 이렇게 사야할 그리고 읽어야할 책의 목록은 늘어가나요..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잊혀지지가 않아요. 라스꼴리니코프..

막시무스 2021-09-15 17:55   좋아요 2 | URL
개인적으로 뫼르소와 라스콜리니코프는 잘 잊혀지지 않는 이름인것 같습니다!

다락방 2021-09-15 18:29   좋아요 3 | URL
뫼르소!! 그러네요!! 😱

blanca 2021-09-15 19:19   좋아요 1 | URL
아놔, 러시아 이름 ㅋㅋ 그런데 너무 신기한게 러시아 사람들은 전혀 어렵다고 생각 안 한대요. 당연한 거지만 ㅋㅋㅋ 오, 너무 좋은 나이에 읽으셨어요. 라스콜니코프 나이가 딱 스물셋이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 이십 대와 사십 대가 친구가 될 일은 없다. 친구가 되는 선결 조건은 전제는 일단 연령대가 같아야 한다. 세상을 보는 시선, 세상에 대해 가지는 불만, 기쁨을 느끼는 지대가 겹쳐야 비로소 대화는 시작된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각한다고 나는 여긴다. 비슷한 연령대의 친구가 아닌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에게 하는 조언이나 의견은 잔소리가 된다. 발끈한다. 요즘 애들은 저러니까 안 돼, 저 아줌마는 꼰대스러워. 모든 이해와 곡해는 세대차로 환원된다.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고 경계한다.


아주 예쁜 이탈리아 친구는 나보다도 훨씬 나이가 어렸는데 나를 자신의 친구라고 불렀다. 아이가 동갑이라 친해진 우리는 서로의 나이를 끝까지 모른 채 헤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우리가 나이 차가 많이 난다는 이유로 애초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여겼다면 우리가 나눴던 그 수많은 교감의 시간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우정을 그리워한다. 그러한 우정은 나이가 절대적인 경계라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바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런 교감은 간접적으로 읽기를 통해서 가능할까.
















젊은 작가 서이제의 문장은 특이하다. 확실한 단언형이 아니라 의심과 머뭇거림, 전복과 도치의 그것들로 해체된다. 그런데 어렵지 않다. 난해하지 않다. 그 흐름은 무언가 어떤 리듬감이 있어 이탈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내가 느꼈던 모든 것들, 그리고 심지어 지금 느끼는 것들이 혼재되어 공감을 자아낸다. 나는 서이제 작가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서이제 작가는 내가 이십 대에 느꼈지만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추스르지 못한 감정들을 언어로 소환한다. 지금도 여전히 내게 있는 것들을 환기한다. 


길을 걷고 있을 때는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길을 잃었을 때, 앱으로 지도를 보면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고 있다면, 나는 이런 말도 할 수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조금만 더 참으라고. 또는 반쯤 왔다고 힘내라고. 또는 한참 멀었다고. 지도를 보면 지금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현 위치와 내가 가야 할 길, 그러나 삶에는 지도 같은 게 없어서,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살아야 했다. 

-서이제 <(그) 곳에서>


우리가 소환하는 청춘에 대한 미화된 이상화된 그리움과 지금 청춘이 그들의 젊음에 대하여 느끼는 현실적 결핍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도 와닿았다. 경제적 성장기에 향유한 우리들의 청춘과 잔치가 끝난 뒤의 그 허탈한 공간에서 방황하며 자신이 살 곳을 찾아 헤매어야 하는 오늘날의 청춘과의 거리에 대한 이야기에 가슴이 저릿했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더 이야기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젊음은 무조건 좋은 것이다,라고 지금 한창 힘든 젊음에게 얘기하는 것은 결국 의사소통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돈이 되지 않는 무용한 것들을 꿈꾸는 이야기. 그래서 야단맞다 넘어지는 이야기. 그러한 이야기들에 마음이 가라앉을 찰나에 서이제 작가의 문장들은 부력을 부린다. 진지한데 한없이 무겁지만은 않은 이야기들로 읽는 이들도 덩달아 떠오를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을 만드는 작가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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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어나더커버) - 10인의 작가가 말하는 그림책의 힘
최혜진 지음, 신창용 사진 / 은행나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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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어릴 때 감정 동화책을 읽어주다 정작 내가 울어버린 적이 있다. 슬픔을 상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조곤조곤 속삭이는 듯한 책에서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어도 되고 그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마음껏 해도 괜찮다는 처방이 실린 책에서 나는 늦은 치유를 경험했다. 그때는 절대 그 사람을 떠올려서도 눈물을 흘려서도 안 된다고 했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세월과 성장으로 체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렵고 고차원적인 이야기 속에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는 프랑스에 거주하는 유명한 그림책 작가들을 인터뷰한 책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이 책은 그렇고 그런 책으로 축소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기대 이상으로 거대하고 심원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 최혜진은 작가들의 성장을 묻는다. 그 성장은 결국 그들의 삶의 이야기로 그것은 다시 그들의 창작으로 뻗어 나가며 한 사람의 삶의 지도를 만든다. 제대로 된 질문과 그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타난 창작자들의 교감의 향연은 놀랍다. 여느 철학서 못지 않게 그것은 진지한 삶 속의 내밀한 질문들과 탐구, 그에 대한 천착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림책에 전혀 관심이 없는 그 누구라도 이 인터뷰 내용들에게서 무언가를 얻어 갈 수밖에 없다. 


"시도해보고, 감탄하고 실패하고, 수정하고, 배우고, 다시 해보면서 변화하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은 거짓말이에요. 그 말 좀 믿지 마세요.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산다는 건 예측 불가능한 난관을 통과하는 과정이고, 우리는 언제든 그 과정에서 배우고 수정하고 진화할 수 있습니다."

-클로드 퐁티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프랑스의 국민 그림책 작가 클로드 퐁티는 대단히 불행한 유년 시절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 유년에 함몰되는 대신 그것을 딛고 자신이 잃어버린 유년의 꿈들과 자유를 아이들에게 선물한다. 인간의 회복 탄력성의 산 증인이 바로 그다. 슬프고 외로웠던 유년을 통과한 사람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동화들이 눈부시다. 인간이 대단한 점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절망 속에 고꾸라지는 사람도 목격하지만 그곳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을 때로 목격한다.


부모로서 아이를 양육하는 일에 대한 솔직한 고백은 그 어떤 육아서보다 실질적인 조언이 된다. 작가 키티 크라우더의 "우선은 엄마 이전에 자기만의 삶을 가진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 아이를 삶의 중심에 놓고 이 사회가 제시한 경쟁 사회의 규격에 맞게 아이를 통제하고 채근하는 우리나라의 현 교육 과정에서의 학부모로서의 삶과는 다른 이야기다. 엄마가 엄마 본위의 삶을 살 때 우리는 모성을 의심하도록 키워졌다. 우리는 우리가 열망했던 자본주의의 위계의 사다리 위로 아이를 올려놓는 것이 가장 잘 성취된 양육과 교육의 최종 도착지인냥 간주해 왔다. 작가들의 이야기는 이러한 우리의 열망과 대치된다. 아이들이 스스로 느끼고 때로는 실패하고 좌절하며 배워나가도록 한 걸음 떨어져 지켜본다는 그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생경하게 들리지만 그런 여건과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바람직한 부모 자녀 관계는 각자의 생태계를 가진 두 개의 호수 같아야 합니다. 지하수로 연결되어 소통은 하지만 서로의 생태계를 존중하는 관계여야 하죠. 

-클로드 퐁티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모든 인간 관계에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 같다. "각자의 생태계를 가진 두 개의 호수" 기억하고 싶은 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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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10-08 18: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blanca 2021-10-08 19:4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시기를 바라요.

새파랑 2021-10-08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축하드려요 ^^

blanca 2021-10-08 19:44   좋아요 2 | URL
잊지 않고 축하해 주셔서 감사해요.

프레이야 2021-10-12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각자의 생태계를 가진 두 개의 호수.
블랑카 님 리뷰만큼이나 좋은 비유라고 생각이 되네요.
분홍공주는 많이 컸겠어요. ^^

blanca 2021-10-13 07:5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이제 그 무서운 중2랍니다. 세월이 정말 빠르죠!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어나더커버) - 10인의 작가가 말하는 그림책의 힘
최혜진 지음, 신창용 사진 / 은행나무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작가들의 그림책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부모가 되어 한 인간의 창의력을 일깨우는 일에 대한 진짜 이야기가 들어있다. 잊고 살았던 정작 중요한 것들을 다시 되찾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한 책, 자신들이 만든 그림책처럼 사진 속 작가들의 미소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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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이라는 건 언뜻 절대적일 것 같지만 상황에 따라 대단히 상대적이다. 모두 여성인 집단, 남성이 대다수인 집단에서 내가 여성으로서 느끼는 감각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홍일점인 집단에서 일 년 정도 근무하며 나는 내가 당하는 어떤 불합리, 부당한 일들을 대부분 내가 여성이라는 성정체성을 통과한 후 해석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됐다. 분명 그것과 상관 없는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점점 더 그렇게 됐다. 그건 내가 평등하게 대우 받거나 평가 받지 못한다는 반복된 경험에서 비롯된 편향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어떤 경험을 반복해서 하게 되면 나는 때로 그 경험의 소유자가 아니라 노예가 된다. 


몇 년 전 해외에 있으면서 백인들 속에서 나는 또 비슷한 경험을 했다. 점점 그들이 하는 말, 행동들을 내가 아시아 여성이어서 이렇게 말하는 건가? 내 피부 색깔이 이러해서 그런 건가? 내가 백인이어도 그랬을까? 스스로에게 반문하게 됐다. 분명 전혀 인종과 상관 없는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프리즘을 통과해서 사람들의 나에 대한 시선을 자꾸 해석하게 됐다. 심지어 내가 흑인이었다면? 이런 가정을 하게 된 적도 있다. 전적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아직도 남성과 여성인 것이 사소한 일이 아닌 것처럼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한 지 백육십 년 가까이 흘렀음에도 피부 색깔은 여전히 중요했다. 의식하거나 미처 의식하지 못했거나 아시아 여성과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과 백인 남성의 삶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다르게 흘러간다. 
















백인의 외모를 갖춘 흑인 여성이 백인 행세를 하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을 상상해 본다. 흑인 여성으로 사는 삶이 백인 여성으로 사는 그것과 전혀 다른 열등한 경로를 가고 마침 자신이 백인과 비슷한 용모를 갖추고 있다면 분명 유혹적인 상황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들의 리그를 떠나간 친구가 마침내 다시 돌아왔을 때 느낄 이중적인 감정은 짐작이 간다. 아이린은 친구 클레어의 패싱의 비밀을 지켜주고 싶기도 하고 그것에 공모한 죄책감에 괴로워하기도 하며 한편 그녀가 파멸하기를 바라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패싱을 단죄하는 것 같은 결말이 씁쓸하다. 


안온한 자리, 절대적인 안정은 삶에서 없다. 고정적인 정체성도 없다. 우리가 여기에서 지금 누리는 것들은 결국 지금 우리의 욕망의 상한선 아래에서 맴돈다. 노화와 죽음을 배제한 욕망은 환상 그 자체다. 그러나 그 환상 없이 일상을 지속하기란 어렵다. 이 모순의 줄타기가 삶이다.
















오십 대가 되어 추방당한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가기 전 카사노바는 한때 후의를 베풀었던 올리보의 영지에서 그의 조카딸을 만나 애욕을 품게 된다. 더 이상 젊음도 외적 매력으로도 젊은 여자를 유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과정은 비참하다. 모두가 카사노바라고 생각했던 그 화려한 성적 매력은 연기처럼 허무하게 사라졌다. 어쩌면 그때부터가 진짜인지도 모른다. 우리를 우리이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을 걷어내고도 우리는 스스로를 여전히 확인할 수 있을까? 그 진지한 물음에 정답은 없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아이즈 와이드 셧>의 원작이 된 <꿈의 노벨레>는 단지 부부의 성적 판타지의 화려한 향연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관한 진지한 성찰이다. 의사 프리돌린이 자신의 욕망에 눈을 뜨게 되는 과정에서 환자의 죽음을 경험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우연히 참석하게 된 가장 무도회에서 만난 욕망의 대상이 딱딱한 시체로 돌아왔을 때 그가 느낀 허무와 놀라움에 대한 묘사도 그러하다. 우리가 딛고 선 생의 지반은 어쩌면 모두 허위인지도 모른다. 진짜라고 여겼던 것들을 해체하고 정상과 비정상, 현실과 환상의 경계의 철책을 과감하게 허무는 슈니츨러의 글쓰기는 경이롭다. 마침내 프리돌린이 아내 곁에 누웠을 때조차 우리는 그것이 그가 원래의 삶으로 안온하게 귀가한 것이 아님을 알아차린다. 좌절된 욕망의 집적이 생임을 암시하며 작가는 비정하게 떠나버린다. 이것은 <패싱>도 다르지 않다. 다른 세계로 자신의 욕망이 실현되는 곳으로 건너갔다고 생각한 순간 파멸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씁쓸하다. 이야기는 대안의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에 대한 환상을 그리는 것으로 그친다. 


결국 돌아오는 곳은 여전히 우리가 도망가려고 애썼던 바로 그 현실이다. 여전히 욕망은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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