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 : 어느 작가의 생
캐롤 스클레니카 지음, 고영범 옮김 / 강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9월 3일부터 읽기 시작했다. 오늘 새벽 감기로 뒤채다 견딜 수 없어 타이레놀을 찾아 일어났다. 약을 삼키니 이제 마저 읽고 싶어져 바닥에 퍼더 앉아 그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따라갔다. 이미 죽을 것임을 알고 일어나는 모든 현재진행형 일들이 사소하게도 느껴지고 엄혹하게도 느껴지고 너무 무기력하고 가련하게 보여 중간 중간 멈춰야 했다. 이제 레이먼드 카버는 바야흐로 미국 단편의 거장으로 그 자신은 자신의 작품을 축소하고 사소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는 이유로 싫어했던 미니멀리스트 그 자체로  가는 시점이었다. 모든 실현되지 않을 여행 계획들, 출판할 책들이 죽음의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으려 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했던 동반자 시인 테스 갤러거는 그의 작품을 위해 자원해서 삶을 헌납했던 메리앤의 헌신의 모습과는 또 달랐다. 그녀는 '그'를 완성시켰다. 그가 마지막으로 사랑을 이야기했던 그리고 그의 사후 그의 작품들을 정리하고 간행하고 세상에 정련된 모습으로 보여주었던 그 여자가 결국 그의 마침표에 동했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십여 년에 걸친 자료수집, 생존자들과의 면담, 저자 자신의 언어에 대한 성실함과 레이에 대한 애정, 경탄은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들 만큼이나 그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복원해 내었다. 이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사이의 틈새를 허룩하게 방치하며 검증된 낱낱의 사실들의 공허한 나열도 아니고 성급하게 그 막간에 개입하여 소위 소설을 써 나가는 오만도 아닌 가장 균형 있는 지점에서 이 모순적이고 매력적이고 천진한 작가의 삶을 관조하고 언어의 결들에 실어 나르고 있다. 그러니 그 모든 성실한 취재의 틈마다 생략된 잊혀진 이야기들은 공백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레가토를 따른다. 레이가 자신을 대신해 가족을 부양하느라 웨이트리스로 심지어 백과사전 세일즈까지 했던 전처 메리앤과 왜 결국 결혼 생활을 끝낼 수밖에 없었는 지, 편집자 고든 리시의 오만에 왜 그다지도 미온적으로 반응했었는 지에 대한 의문들은 그러니 그 자체로 가지고 이 사내의 삶의 여정에 동행해도 괜찮다. 모든 상상력의 여지와 생략과 말줄임표 사이에 진실의 핵이 숨어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캐롤 스클레니카는 잘 알고 있으니까.

 

레이먼드 카버와 같은 이름의 아버지는 노동자였고 아들처럼 알코올 중독자였지만 아들에게 불성실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고 이웃의 사내에게 주말마다 사냥에 아들을 데려가 자연 속에서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노력까지 했다.  이 시간은 오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레이가 작가로서 성장하는 데에 분명 무언가를 남겼다. 아버지는 소멸로 가는 그 여정에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육체 노동은 이제 글쓰는 일로 세상에 이름을 남길 거구의 아들을 둔 이 아버지의 존재감이었다. 레이는 그 자신조차 아버지의 역할과 책임의 한계 앞에서 혼란스러워했다. 알코올 중독자가 된 딸을 아파하면서도 그 딸이 재정적으로 너무 기대어 올 때는 부담스러워했고 자신과는 다르게 착실하게 성장한 아들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그 아들과의 관계에 대한 부담감을 은연 중 내비치는 단편으로 아들을 아프게 한다.

 

레이의 작품들에는 거의 대부분 부부가 나온다. 그리고 아내의 모습에는 열다섯 살, 도넛상점에서 처음 시선을 마주친 아내 메리앤의 모습이 많이 투영되어 있다. 제재소에서 일하고 돌아온 소년에게 함께 보바리 부인과 안나 카레니나를 읽게 한 소녀는 그가 글을 쓰는 데에 전념할 수 있도록 둘째를 가지고도 과수원에 일하러 나가 타자기를 사들고 온다. 자신의 학업이나 꿈은 항상 레이 앞에서 후순위였다. 마침내 남편이 성공하여 자신을 떠나 '자신은 여전히 빗 속에 있을 때에도' 그녀는 레이를 걱정하고 배려했다. 다른 여자 옆에 있어도 레이는 그러한 아내와 공유한 시간과 꿈들, 눈물들을 저버릴 수 없었다. 시인 테스 갤러거가 진정한 의미의 작가로서 레이를 완성시키는 데에 일조를 담당했다면, 메리엔은 레이를 작가로서 나아가게 한 원동력이자 레이가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그 사소한 에피소드들을 작품화 하는 데에 강력한 동기를 작용한 추동력처럼 보인다. 그러니 죽어가면서도 레이는 전처의 천사 같았던 그 모습을 제발 염두에 달라고 테스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에서 동반자 역할을 할 수 없었던 그리고 그의 사후 작품에 관련된 모든 권리에서 대부분 소외되게 된 메리앤이었지만 이러한 레이의 진심만은 어떤 형태로든 짐작하고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직 성인이 되기 전 부모가 되었던 소년, 소녀는 들이닥치는 삶의 과제들을 외롭게 해결해 나가야 했던 그들은 그러한 것들 대부분을 이야기화해 나가며 싸우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마침내 전설로 만들어 버렸다.

 

레이먼드 카버의 알코올 중독 시절 쏟아낸 많은 작품들이 편집자 고든 리시의 과도한 개입에 의하여 더 완성도를 가지게 되었는 지, 카버 특유의 색깔과 신선함을 잃게 되었는 지에 대한 의견은 확정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어디까지가 리시의 편집이자 창작인 지에 대한 경계도 그러하다. 이는 저자의 "출판이란 언제나 예술을 상업적으로 전환시키기 마련인데 거기에 리시의 과도한 편집과 카버의 알코올 중독이 합쳐지면서 이 모든 과정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모호해졌다."는 표현이 많은 것을 담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 '모호함'의 지대에 레이먼드 카버의 것들이 놓여 있기에 논쟁의 끝은 명료한 것이 되기 힘들다.

 

그 무엇보다 레이먼드 카버가 알코올 중독에서 해방되는 과정이 그 자신의 표현 만큼이나 팬으로서 자랑스럽고 감동적이었다. 아버지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취해 있었던 그가 마지막 잔을 입술에 대고 술을 마시지 않는 날들이 하루 하루 차곡 쌓여가는 과정이 마침내 술에 대한 그의 승리로 귀결되는 묘사가 아름답다. 드디어 레이먼드 카버는 삶과 글들을 주무를 수 있다고 착각해도 괜찮게 되는 시점, 그 원숙한 지점에 도달하고 걸작 <대성당>을 낳는다.

 

서른다섯의 하루키는 이미 죽음에 임박해 있는 작가와의 조우를 계기로 그를 초대하기 위하여 그 거구를 누일 침대를 일본에서 제작한다. 이 모든 것들은 삶에서 밀려오는 그 잔인하고 때로 신비로운 우연 앞에서 좌절된다. 그것 또한 레이먼드 카버의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을 통과하며 그 모든 것들을 잉크처럼 푹 담가 써 내려갔던 그의 모든 이야기들은 레이먼드 카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모든 게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헛된 시도는 아니었다-여행."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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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9-20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다 해도 한사람의 삶이 끝나가는 걸 보면 마음이 가라앉기도 하죠

알코올 의존증은 고치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마시지 않다 다시 마시면 다시 돌아가고... 처음부터 그렇게 안 되도록 하면 좋겠지만 그게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그것을 고쳤다는 말을 보고 이런 말을 했군요 딸도 그랬다니... 이것도 유전되는 걸까요 그것보다는 그런 모습을 봤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걸지도 모르겠네요 부모를 보고 나는 그러지 않겠다 하는 사람도 있고, 닮는 사람도 있잖아요

레이먼드 카버 소설 예전에 한권 읽기는 했는데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소설은 못 봤지만, 이건 한번 보고 싶기도 하네요


희선

blanca 2015-09-20 22:34   좋아요 0 | URL
그만큼 어려우니 카버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일이 술끊기에 성공한 것이었다고 고백한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술잔을 입에 대고 그 날들이 쌓여 마침내 금주에 성공하는 장면이 그의 소설들 만큼이나 극적이고 감동적이었어요.
 

레이먼드 카버의 평전을 읽고 있는데 이제 반이나마 왔다. 팔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과 빡빡한 자간이 부담스러웠는데 평생 육체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했던 아들과 이름이 같았던 레이먼드 카버 아버지 이야기, 본인들도 채 다 크지 못한 채 부모가 되어 어깨에 지게 된 짐과 자신의 욕구, 욕망, 꿈과의 간극에서 헤매는 카버 부부의 분투, 아버지뻘의 존 치버와 대작을 하며 어울리는 모습, 이제 곧 성공의 진입로에 섰는데 본인도 어쩔 수 없는 무질서와 상처 속에서 허둥대는 모습, 그리고 너무 빨리 늙어버려 정작 카버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이미 그는 자신의 삶의 시계에서 중노년의 시점에 섰음을 알아차리며 남은 그의 짧은 아까운 생을 헤아려 보고 아쉬워하게 된다. 그는 쉰이 되어 죽고 결혼 생활 대부분에서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며 레이먼드 카버가 작가로서 입지를 굳히는 데에 거의 중추적인 역할 이상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조강지처 메리엔과는 헤어지게 될 것임을 그는 지금 알지 못한다. 부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때로 불화하고 폭력적이고 기이하게 비쳤지만 분명 외면적으로 다 풀어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결속된 관계 속에 있었다. 십대에 만나 아이 둘을 낳고 그 아이들을 부양하고 못다한 학업을 끊임없이 재개하려 애쓰고 남편의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을 어떻게든 실현시키기 위해 이동, 또 이동, 포기, 선택했던 동반자적 역할은 부부 관계 안에서만 담을 수는 없는 내용이었다.

 

 

 

 

 

 

 

 

 

 

 

 

 

 

 

나도 내가 나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처럼 될 턱이 없기에 전체적인 조망 아래 삶을 진지하게 관찰할 수 없기에 지금 여기에서 내 삶에 얼마만큼 어떻게 와 있는지 알 수 없이 매일 매일의 일상과 과제에서 허우적댄다. 누군가가 조금 떨어져 나의 삶을 지켜본다면 수많은 나의 어리석음과 치기와 실수와 근시안을 찾아내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삶을 다 살고 나서가 아닌 다음에야 내가 그러기는 힘든 노릇이다. 그때 왜 그랬었지?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할 것을, 조금만 더 참을걸, 조금 더 나아갈걸, 하는 회한과 아쉬움은 지금 당장을 사는 사람의 것은 아니다.

 

가족이 아프고 만성 위염이 도지고 아이 둘을 돌보다 지쳐 벼르고 벼르던 내시경을 했다. 전날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온갖 것들이 걱정됐다. 혹시 내가 여기서 끝이면 어떡하지? 그러면 아직 어린 아기는 어떡하지? 다음 날 아침 일찍 한산한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급하게 혈압을 재고 수면 내시경을 시작하려 약을 투여했다. 마취가 잘 되지 않아 눈을 계속 뜨고 있으니 간호사가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조금 더 약을 투입하는 듯한 움직임을 마지막으로, 간호사가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지러웠다. 위염이었고 의사는 아직 내가 젊다고 했다. 그 말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성인이 되면서 내가 제일 먼저 만난 것은 위염이었다. 신입사원이 되어 제일 힘들었던 것도 위염이었다. 되지 않는 술을 억지로 먹다 보니 위염은 더욱 심해졌고 위벽이 다 헌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내가 과연 이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반문했다. 힘들면 마음이 아프면 영락 없이 나의 위도 시끄러웠다. 침대에서 일어나 어떻게 집에 왔는지 그 집으로 오던 길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약국에는 처방전이 아니라 병원 영수증을 내미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전날 밤 하도 오만가지 최악의 상황 속에서 헤메어서 그런지 어지러워도 좋았다. 그냥 그 안심되는 느낌이 좋았다. 나는 때로 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사는 게 좋다. 할머니가 되어 죽고 싶다. 할머니가 되면 그래도 죽음과 어느 정도 타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할 수도 수긍할 수도 없겠지만 어쩔 수 없는, 어쩌지 못하는 것들에 체념할 수 있을 것같다.

 

그래서 사는 동안 이 모든 어리석음, 조급함, 치기가 다 소중하다. 무의미하고 실패할지라도 그게 어쩌지 못하는 삶인 것 같다. <대성당>을 쓴 카버의 삶도 그러지 않았는가? 정말 무언가,를 남을 것을 이룬 사람의 삶도 일상 속에서는 어리석고 슬프고 구태의연하고 구차한 면이 있다. 그는 점점 위대해져 전설이 될 것이지만 지금 당장은 술독에 빠져 있다. 이제 막 술독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그 어떤 성취보다 바로 그 점을 자랑스러워하게 될 순간을 맞게 될 시점으로 가고 있다. 그렇게나 사랑하고 지독하게 싸웠던 아내와는 헤어지고 다른 여자의 곁에서 임종을 맞게 될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그가 몰랐다고 해서 그의 지금이 무의미하다고 어리석다고 폄하될 수 있을까? 모르는 것들 투성이, 어떻게 결론에 치닫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게 바로 삶의 묘미이기도 한 것같다. 그래서 계속 읽게 된다. 이미 결론을 아는 이야기도 그곳으로 닿는 길은 미답인 경우가 많다. 처음과 끝이 아니라 그것을 연결하는 길에 진짜가 실재가 있는 지도 모른다는 느낌. 가을 하늘이 너무 예뻐서 이런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게 사는 것이라면 산다는 건 어쩌면 더 처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 되면 꼭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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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9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10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0 0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0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르헤스의 말 - 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윌리스 반스톤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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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사진 속의 노인은 원피스 차림의 아름다운 실루엣의 젊은 여인의 한쪽 팔짱을 끼고 다른 한쪽 손은 지팡이를 짚고 있다. 한쪽 눈은 흡사 감겨 있는 듯하고 성해 보이는 눈의 시선도 불안정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당당함이 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여인은 아마도 그의 마지막 연인이자 그가 그렇게나 소원하던 망각과 소멸로 가기 전에 결혼한 서른여덟 연하의 비서 마리아 코다마인 듯하다. "여름날의 더딘 땅거미처럼" 시력을 잃어버린 보르헤스는 그녀의 얼굴을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명성과 경탄에 아연해하고 수많은 공적 자아, 대중, 성공을 하찮게 여길 줄 아는 여든의 보르헤스의 '말'이 있다. 그의 삶과 글쓰기에 관련된 공개 대화, 대담에서 그는 자신이 보르헤스인 게 싫다고까지 고백하기도 하고 언제 죽을 지 모르니 빨리 질문하라고 너스레를 떨며 재촉하기도 하고 대답하기 싫은 질문에는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하며 언어로 한 인간을 형상화할 수 있다면(물론 당사자는 반문할 것이다.), 가장 실제적이고 평이한 형태로 그 자신을 드러낸다. 거울, 미로, 글의 환상에 천착했던 보르헤스는 이제 땅에 내려와 자신을 해명하고 상찬하기보다는 깎아내리고 대신 그 자신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단테, 스티븐슨, 에밀리 디킨슨을 친절하게 이야기한다. 이미 위대해져 신화로 걸어들어가는 눈먼 작가는 소멸 앞에서 당당하고 겸손하고 성실하고 도덕적이고 회의한다. 바리톤의 그의 실제 목소리를 상상하며 때로 그를 도발하는 인터뷰어들의 여정에 동참하는 일은 그 자체로 보르헤스와 함께 사적인 만남을 갖는 듯한  환상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대중은 환상이고 각각의 개인으로 대면하고 있다는 보르헤스의 이야기는 진실일 것이다.

 

나는 울적할 때-간혹 울적한 기분에 빠져든답니다-죽음을 커다란 구원으로 생각하지요. 어쨌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일어나는 일이 도대체 뭐가 중요하겠어요? 나는 죽음을 희망으로, 완전히 소멸되고 지워지는 희망으로 생각하는데, 그 점이 의지가 되는 거예요. 내세는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두려워할 이유도 희망을 가질 이유도 없지요. 우리는 그저 사라질 뿐이고, 그래야 하는 거예요. 나는 불멸을 위협적인 것으로 여기는데, 사실 그건 허망한 생각이에요. 아무튼 나는 개인적으로 불멸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해요. 그리고 죽음은 행복일 거라고 여긴답니다. 망각보다, 잊히는 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이게 바로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이에요.

-p.160

 

1975년 크리스마스, 인터뷰어 윌리스 반스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민들의 시위 속에서 보르헤스와 만찬을 함께 하고 마리아 코다마를 먼저 보내고 난 후 노시인과 바람 부는 거리를 천천히 걷는다. 그들은 밤새 걸어 새벽에야 보르헤스의 아파트에 도착했다고 한다. 보르헤스와의 구체적인 기억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는 윌리스에게 노작가는 망각의 축복을 이야기한다.

 

2013년 윌리스는 이야기한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거나 그의 글을 읽은 사람은 평생 그를 기억할 것이다."라고. 이는 보르헤스의 소망에 전적으로 역행하는 일이다. 그는 철저하게 잊히기를, 완전히 소멸되고 지워지기를 희망했는데 끊임 없이 부활하고 있다. 그를 읽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를 인용하고 그를 계승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작가들에게 그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과거가 되었고 현재에 미끄러져 들어온다. 죽음에 대한 담담한 그의 이야기는 얼마간 위안이자 희망이 되지만 그의 미래에 대한 반어적인 예시가 되고 말았다.

 

모든 불가능과 한계에 대한 이야기. 모든 확신에 반문하고 회의하는 이야기. 해답은 없음을 전제하는 이야기. 구원은 없음을 수긍하는 이야기. 보르헤스다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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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9-03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늘 새겨 읽게되는 리뷰
반가워요. 보르헤스의 말, 담아갑니다. 가을이 와요. 이미 왔나요^^

blanca 2015-09-03 23:18   좋아요 0 | URL
덥다가도 문득 공기가 달라졌음을 느껴요. 유난히 힘든 일들이 많이 지나간 시간들이 이제는 그 만큼의 좋은 일들을 몰고 왔으면, 바라 봅니다.

AgalmA 2015-09-03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대부분의 작가는 ˝소멸˝을 원하는데, 그건 인생 때문일까, 글을 쓰면서 도달하게 되는 종국의 필연일까 늘 가늠하게 돼요.
작가는 언제나 글이 구원이길 바랐으나 매번 실패라고 생각해서 일까 싶고요. 타인의 열광과는 상관없이.
불가능과 한계....좋은 작품들에선 언제나 그게 문신처럼 보이더라는.
카프카는 사라지길 원했으면서 왜 브로트에게 유작의 처리를 맡겼는가 의견이 분분하죠. 저는 작가가 작품으로 자살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댓글이 심란한 점 죄송합니다;


blanca 2015-09-04 06:54   좋아요 0 | URL
보르헤스는 유명세가 자신의 실재와 많이 떨어져 있다고 스스로 판단했던 것 같아요. 아니면 그의 개인적 성향 때문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인간인 이상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각이 불멸의 욕구와 절대적으로 어긋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글은 영원히 남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썼다는 것은 남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이긴 해요.^^

yamoo 2015-09-1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당~~ㅎ


blanca 2015-09-12 15:02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아직 허룩하죠. ^^;;

희선 2015-09-20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잊히지 않기를 바라기도, 보르헤스는 사람들이 잊기를 바랐군요 라디오 방송에서 보르헤스가 책을 많이 읽어서 눈이 보이지 않게 됐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저는 그 말 듣고 무슨 병이 있었던 건 아닐까 했습니다 책 읽기 좋아하는 사람이 눈이 보이지 않게 돼서 힘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눈이 보이지 않아도 다른 것을 느꼈다고 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때 잘 들어뒀다면 좋았을 텐데...


희선

blanca 2015-09-20 22:36   좋아요 0 | URL
보르헤스의 실명이 유전적이었다는 건 아는데 정확히 어떤 질환에 의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죠, 듣기로 갈음한다 해도 한계가 엄연히 있으니까, 늙어 죽을 때까지 좋은 시력을 유지하는 것도 대단한 행운인 듯해요.
 

그 시점까지 나는 내 삶에서 모든 게, 비록 정확히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할지라도, 내가 희망하는 대로 또는 원하는 대로 어떻게든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 순간 빨래방에서, 그건 전혀 진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내 삶의 대부분이 어지럽고 시시한 일로 이루어졌으며, 희망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이먼드 카버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중 

 

 

 

 

 

 

 

 

 

 

 

 

 

 

 

 

 

 

 

 

 

 

카버가 빨래방에서 가족들의 빨래를 안고 초조해하며 건조기 순번을 기다리는 순간 새치기를 당하고 느낀 단상이다. 카버는 언제나 가난했고 스무 살이 되기 이전에 이미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었고 아버지 카버처럼 반생을 술로 고생했다. 이러한 게 단순히 카버적인 개별적인 그만의 신산한 삶의 풍경이었을까? 아니면 삶의 전반적인 풍경이 그저 카버 앞에서 순수하게 더 명료하게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 카버의 언어로 형상화된 것 뿐일까? 대체로 누구에게나 결국 삶은 시시하고 힘들고 예기치 않은 불운에 때로 얼굴을 가격 당하며 그렇게 버티며 나아가는 것일까? 그러다 늙음에 병마에 먹혀 자기가 미처 마침표도 찍기 전에 그냥 '끝'으로 사라지고 마는 걸까...

 

카버의 단행본에 실리지 않은 단편들의 끝은 여느 평범한 단편처럼 마무리되는 맛도 없고 오 헨리의 그것처럼 반전도 없고 다만 삶의 진실, "명쾌한 해답이나 엔딩은 주어지지 않는다"에 충실하다. 언제나 비극에 무방비이지만 쉽게 무릎꿇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신에게 다가온 일들을 좌지우지하겠다고 섣불리 덤비지도 않는다. 그의 '이야기'는 '현실'이다. 그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어제 생각했던, 혹은 몇 년 전에 들었던, 보았던 것들, 미래에 겪고 느끼게 될 감정들이다.

 

아껴 읽고 싶다. 노동자였던 그래서 일을 하며 술을 마시며 외동 아들을 사랑했던 아버지 레이먼드 카버에 대한 이야기, 이제 '쓴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 정열, 좌절, 자신의 삶, 아이들, 그리고 또 카버가 만든 많이 다듬지는 않은 날것의 이야기들. 병원 복도의 창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부모의 심정을 돌이켜 보게 될 줄 몰랐듯이 그의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그냥 산다는 것의 편린들이라 무심코 흘려보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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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5-08-28 1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희망하는대로,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불안해하면서 행동하는 것이 강박이 되지요. 문득
요즘 제가 만나는 중3 아이가 떠올랐어요. 삶이란 것이, 원하는대로만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데도 포기하기 어려워요. ^^

아껴 읽고 싶다 라고 쓰긴 문구, 너무 좋아요.

blanca 2015-08-28 23:32   좋아요 0 | URL
지금도 아끼고 괜히 두고 그러는데 자꾸 진도가 나가네요. ㅋㅋ 중3... 코알라도 벌써 중3이라 하셨죠. 내가 열여섯이었던 시간들이 어제 같은데 정말 시간은 휙휙 지나가네요.

희선 2015-09-07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는 바라는 대로 될지도 모른다 한 적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때는 그리 길지 않은 듯해요 꽤 오래전부터 저는 사는 게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게 언제부턴지도 모르겠군요 시시한 일만 있고... 남한테는 시시해 보여도 자신한테는 그렇게 시시하지 않은 일도 있겠군요


희선

blanca 2015-09-07 11:21   좋아요 0 | URL
저도 요새 인간의 자유의지란 환상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어릴 때는 구체적이고 자잘한 고충들을 매일 매일 해결해 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혹은 이렇게 하는 데에 확신이 들지 않아 혼라스러웠다. 고작 마흔으로 가는 시점에서 그런 모든 것들에 익숙해졌다고 얘기하면 자만이 될 터이고 다만 적어도 그런 것들은 조금 실수해도 다시 해도 괜찮다, 정도의 심정이다. 다만 이제 내가 어쩌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덮쳐 올 때 내가 그것들을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해결해 나간다는 것은 하나의 헛된 바람이자 오만이 될 수 있다는 또다른 두려움을 배워가는 중이다. 삶은 가혹한 학교다. 냉정하고 가차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이미 어쩌지 못하고 세상에 나와버렸다. 그 힘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를 소멸로 데려가는 힘도 내 안에 내재되어 있겠지만 그것 또한 이미 나의 것이 아니다. 나도 늙고 주변 사람들도 늙고 때로 절망하고 넘어지고 병들고 그렇게 큰 흐름 속에서 그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 한계, 그 종점을 항상 의식하면 어느 정도 슬프지 않고는 현재를 딛고 설 수가 없다. 마냥 즐겁고 마냥 꿈꿀 수 있던 시간들은 이미 내 뒤에서 삭아버리고 있다. 난 이미 중년이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현악 4중주단.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선율이 서로를 타고 넘는 그 흐름, 때로는 합쳐지고 어긋나고 멀어지고 다시 만나는 그 순간들의 명멸이 베토벤에 의해 만날 때 인생은 반드시 다 살고 나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이 불현듯 온다. 베토벤은 이미 다 알아버린 것같다. 인생의 근저에 깔린 그 허무함, 헛헛함, 슬픔, 그런데도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 연약한 시도들. 사람들, 만남, 사랑, 소통, 다툼, 이별.

 

25년 간 멤버들의 아버지뻘 나이의 첼리스트 피터가 이끈 4중주단은 그의 파킨슨병 진단으로 위기를 맞는다. 피터는 파킨슨병이 가져오는 그 모든 미세한 떨림, 퇴행이 연주자에게는 치명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약의 힘으로 병이 완화된다면 시즌 첫 콘서트를 베토벤의 현악 4중주곡 중 14번을 연주하는 고별 연주회로 하고 떠나겠다고 한다. 생의 종반부에 맞은 피터의 고난은 제2바이올린을 맞아 항상 제1 바이올린을 맡았던 다니엘에게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했던 로버트의 억압된 불만을 표출하는 계기가 되고 홍일점 첼리스트인 아내 줄리엣과의 불화 등 나머지 멤버들의 내면에 침잠했던 갈등들이 불거져 나오는 증폭제가 된다. 잔잔했던 팀내의 분위기는 악화일로를 치닫게 된다.

 

영화의 한계는 인물들의 내면을 오고가는 생각, 느낌을 간접적으로 그려내고 추정해 낼 수 밖에 없다는 데에 있다면 그러한 한계가 이 영화에서는 교단에 선 피터의 학생들과의 교감, 이야기로 충분히 해소된다고 볼 수 있다. 노년의 거장은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 14번을 단순히 연주를 위한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게 아니라 그 연주에 접근해 가며 당시 그것을 작곡했던 베토벤의 심상, 연주 당사자들이 그 어떤 휴식 없이 7악장을 연결해 나가야 하는 도전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 들에 함께 다가가려 한다. 특히 T.S. 엘리엇의 평의 인용은 한 구절 한 구절이 베토벤의 그것과 만나 뭉근하게 녹는다. 모든 시간의 현재성. 시작과 끝의 그 경계, 그 간극 안에 있는 현재성. 과거도 미래도 결국 현재 안에 녹아 있다는 그 시간 안에 우리의 삶과 베토벤의 음악이 있다.

 

마침내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연주는 성황리에 마쳤을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삶과는 다른 할리우드식 서사에 그쳤을 것이다. 엔딩이 압도하는 대목은 나이 든 연주자들의 공연 안에 삶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엔딩. 피터는 어쨌든 성공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완수해 낸다. 모두가 아는 방법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외가 예측할 수 없음이 삶의 본질임을 이 영화는 직시한다. 소멸과 퇴장, 늙음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우리의 것이 될 것임을 알기에 가장 잘 이야기해져도 우리를 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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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9-07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 사람이 더 일찍 많은 것을 알아버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그때는 그렇게 오래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일지도... 모두 그렇게 짧게 산 것은 아니기도 하겠지만... 마지막은 눈물 흘리게 하는군요 끝난다 해도 그때까지 살았다는 것도 잊지 않으면 좋을 텐데, 편하게 끝을 맞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군요


희선

blanca 2015-09-07 11:23   좋아요 0 | URL
희선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면이 있네요. 아무래도 평균 수명이 짧았으니 깨달음이나 성숙도 어쩌면 더 빨랐을 지도 모르겠어요. 요즘 애들이 빠르다,는 면은 사실 성숙 차원의 이야기는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