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말 - 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윌리스 반스톤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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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사진 속의 노인은 원피스 차림의 아름다운 실루엣의 젊은 여인의 한쪽 팔짱을 끼고 다른 한쪽 손은 지팡이를 짚고 있다. 한쪽 눈은 흡사 감겨 있는 듯하고 성해 보이는 눈의 시선도 불안정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당당함이 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여인은 아마도 그의 마지막 연인이자 그가 그렇게나 소원하던 망각과 소멸로 가기 전에 결혼한 서른여덟 연하의 비서 마리아 코다마인 듯하다. "여름날의 더딘 땅거미처럼" 시력을 잃어버린 보르헤스는 그녀의 얼굴을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명성과 경탄에 아연해하고 수많은 공적 자아, 대중, 성공을 하찮게 여길 줄 아는 여든의 보르헤스의 '말'이 있다. 그의 삶과 글쓰기에 관련된 공개 대화, 대담에서 그는 자신이 보르헤스인 게 싫다고까지 고백하기도 하고 언제 죽을 지 모르니 빨리 질문하라고 너스레를 떨며 재촉하기도 하고 대답하기 싫은 질문에는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하며 언어로 한 인간을 형상화할 수 있다면(물론 당사자는 반문할 것이다.), 가장 실제적이고 평이한 형태로 그 자신을 드러낸다. 거울, 미로, 글의 환상에 천착했던 보르헤스는 이제 땅에 내려와 자신을 해명하고 상찬하기보다는 깎아내리고 대신 그 자신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단테, 스티븐슨, 에밀리 디킨슨을 친절하게 이야기한다. 이미 위대해져 신화로 걸어들어가는 눈먼 작가는 소멸 앞에서 당당하고 겸손하고 성실하고 도덕적이고 회의한다. 바리톤의 그의 실제 목소리를 상상하며 때로 그를 도발하는 인터뷰어들의 여정에 동참하는 일은 그 자체로 보르헤스와 함께 사적인 만남을 갖는 듯한  환상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대중은 환상이고 각각의 개인으로 대면하고 있다는 보르헤스의 이야기는 진실일 것이다.

 

나는 울적할 때-간혹 울적한 기분에 빠져든답니다-죽음을 커다란 구원으로 생각하지요. 어쨌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일어나는 일이 도대체 뭐가 중요하겠어요? 나는 죽음을 희망으로, 완전히 소멸되고 지워지는 희망으로 생각하는데, 그 점이 의지가 되는 거예요. 내세는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두려워할 이유도 희망을 가질 이유도 없지요. 우리는 그저 사라질 뿐이고, 그래야 하는 거예요. 나는 불멸을 위협적인 것으로 여기는데, 사실 그건 허망한 생각이에요. 아무튼 나는 개인적으로 불멸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해요. 그리고 죽음은 행복일 거라고 여긴답니다. 망각보다, 잊히는 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이게 바로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이에요.

-p.160

 

1975년 크리스마스, 인터뷰어 윌리스 반스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민들의 시위 속에서 보르헤스와 만찬을 함께 하고 마리아 코다마를 먼저 보내고 난 후 노시인과 바람 부는 거리를 천천히 걷는다. 그들은 밤새 걸어 새벽에야 보르헤스의 아파트에 도착했다고 한다. 보르헤스와의 구체적인 기억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는 윌리스에게 노작가는 망각의 축복을 이야기한다.

 

2013년 윌리스는 이야기한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거나 그의 글을 읽은 사람은 평생 그를 기억할 것이다."라고. 이는 보르헤스의 소망에 전적으로 역행하는 일이다. 그는 철저하게 잊히기를, 완전히 소멸되고 지워지기를 희망했는데 끊임 없이 부활하고 있다. 그를 읽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를 인용하고 그를 계승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작가들에게 그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과거가 되었고 현재에 미끄러져 들어온다. 죽음에 대한 담담한 그의 이야기는 얼마간 위안이자 희망이 되지만 그의 미래에 대한 반어적인 예시가 되고 말았다.

 

모든 불가능과 한계에 대한 이야기. 모든 확신에 반문하고 회의하는 이야기. 해답은 없음을 전제하는 이야기. 구원은 없음을 수긍하는 이야기. 보르헤스다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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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9-03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늘 새겨 읽게되는 리뷰
반가워요. 보르헤스의 말, 담아갑니다. 가을이 와요. 이미 왔나요^^

blanca 2015-09-03 23:18   좋아요 0 | URL
덥다가도 문득 공기가 달라졌음을 느껴요. 유난히 힘든 일들이 많이 지나간 시간들이 이제는 그 만큼의 좋은 일들을 몰고 왔으면, 바라 봅니다.

AgalmA 2015-09-03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대부분의 작가는 ˝소멸˝을 원하는데, 그건 인생 때문일까, 글을 쓰면서 도달하게 되는 종국의 필연일까 늘 가늠하게 돼요.
작가는 언제나 글이 구원이길 바랐으나 매번 실패라고 생각해서 일까 싶고요. 타인의 열광과는 상관없이.
불가능과 한계....좋은 작품들에선 언제나 그게 문신처럼 보이더라는.
카프카는 사라지길 원했으면서 왜 브로트에게 유작의 처리를 맡겼는가 의견이 분분하죠. 저는 작가가 작품으로 자살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댓글이 심란한 점 죄송합니다;


blanca 2015-09-04 06:54   좋아요 0 | URL
보르헤스는 유명세가 자신의 실재와 많이 떨어져 있다고 스스로 판단했던 것 같아요. 아니면 그의 개인적 성향 때문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인간인 이상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각이 불멸의 욕구와 절대적으로 어긋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글은 영원히 남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썼다는 것은 남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이긴 해요.^^

yamoo 2015-09-1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당~~ㅎ


blanca 2015-09-12 15:02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아직 허룩하죠. ^^;;

희선 2015-09-20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잊히지 않기를 바라기도, 보르헤스는 사람들이 잊기를 바랐군요 라디오 방송에서 보르헤스가 책을 많이 읽어서 눈이 보이지 않게 됐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저는 그 말 듣고 무슨 병이 있었던 건 아닐까 했습니다 책 읽기 좋아하는 사람이 눈이 보이지 않게 돼서 힘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눈이 보이지 않아도 다른 것을 느꼈다고 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때 잘 들어뒀다면 좋았을 텐데...


희선

blanca 2015-09-20 22:36   좋아요 0 | URL
보르헤스의 실명이 유전적이었다는 건 아는데 정확히 어떤 질환에 의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죠, 듣기로 갈음한다 해도 한계가 엄연히 있으니까, 늙어 죽을 때까지 좋은 시력을 유지하는 것도 대단한 행운인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