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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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꿈 속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모가 나왔다. 이모는 꿈 속에서도 몸이 아팠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결한 숲에서 얼굴을 보여준 이모는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고 예뻤다.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문득 잠에서 깨니 역시 마음 한곳이 아려왔다. 이모에게 제대로 된 작별 인사, 감사를 전하지 못했다. 죽음 앞에서 생은 어찌 이다지 하찮고 허무하게 스러지고 마는 것인가. 죽고 나면 우리 같은 평범함은 때로 하찮음과 망각으로 치환되어 서럽다. 기억하는 사람이 남는다고 해서 생이 더 유의미해지고 무거워지는 것은 아닐진대 오늘이 영원할 것처럼 마치 발이 단단히 이 지구t상에 못박혀 있는 것처럼 일상 속의 사람들은 싸우고 끄달리고 욕망하고 붙잡는다.


"2017년 설", 작가의 사인은 힘찬데 어쩐지 조금 아릿하다. 내가 기억하는 김훈은 영원한 오십 대인데 작가는 벌써 칠십 대에 접어들었단다. 우연히 옆에 있던 딸아이가 작가의 후기를 읽다 "엄마, '늙기가 힘들어 허덕지덕하였대'."라고 뜻도 이해하지 못한 말을 슬며시 옮긴다. 작가보다 한참 어린 나인데 그 '허덕지덕'의 무게를 실감한다. 시간의 경과가 늙음과 동의어는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늙어지지만 늙음을 내면화하는 일은 별개의 일이다. 거죽은 풍화하는데 내면에 생의 기운과 젊음의 추억은 차곡차곡 쌓이니 그것들을 내칠 용기를 차마 내지 못한다. 어느 날 서 있을 초로의 여인과 나를 동일시하기란 쉽지 않다.


"마동수는 1979년 12월 20일 서울 서대문구 산외동 산18번지에서 죽었다."



이러한 첫문장으로 들어갈 때 이야기의 하중이 절로 다가와 다리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생으로 시작하지 않고 죽음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다시 그 사람의 삶으로 가는 역순환적 순서로 갈 것을 예고하는 것은 아니다. 마동수의 삶은 결국 그가 낳은 형제 마장세와 마차세를 이야기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기도 하고 그들의 이야기가 결국은 만날 접점이 되기도 하고 마침내 그들의 이야기가 종결될 복합적인 지점이다. 세상에 발붙이지 못한 부박한 아비의 삶은 결국 죽음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이자 출발, 도착점이 된다. 형제는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아 분투하지만 결국은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그의 삶을 닮게 되는 생존의 그 지엄하고 가혹한 본질에 가 닿는다.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미 늙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해했던 시간은 시간의 결을 따라 제대로 해석되고 때에 따라서는 나의 것이 되기도 한다.


"아버지가 죽어 홀가분했다."는 차남 마차세만의 문장이 아니었다. 형 마장세는 일치감치 베트남전의 참전을 로 빌미로 그의 던적스러운 삶에서 도망치려 하지만 결국 그가 타지에서 벌였던 불법적인 사업으로 인해 아버지 만큼 추락한다. 형과는 달리 동생 마차세는 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과 죽음을 지척에서 지켜보게 되지만 그 또한 신산하고 초라하고 때로 비겁한 그들의 생존에서 멀리 떨어지려 시도해도 결국은 다시 떨어지는 진자 추처럼 생으로 귀환한다.


억새꽃이 부풀었고, 가을빛이 자글거렸다. 시든 줄기가 바람에 끄달리면서 바람을 버티고 있었고 꽃씨들은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억새는 꽃이 아니라 꽃의 혼백처럼 보였다.

-p,311


전쟁통에 전남편과 젖먹이를 잃어야 했고 평생 방황하는 남편을 두고 형제를 키워내야 했고 말년은 치매로 요양원에서 보내야 했던 형제의 어머니를 화장하고 내려오는 길의 묘사는 눈부시다. 그것은 비단 어머니 김도순의 삶의 은유로만 해석될 것이 아니다. 누구나의 삶인들 이러지 아니할까. 충분히 나이든 김훈의 삶의 결을 간파해내는 문장들은 가슴의 결에 아로새겨질듯 간명하면서도 처절하다. 그의 문장은 끌로 판 듯 치열하고 또렷해서 차마 흘려보내지 못할 듯하다.


우리의 삶은 지극히 사적이지만 공적인 큰 파도 속에서 부유하며 그 사사로움을 잠식 당한다. 누군가의 삶도 결국 개인적인 서사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유다. 사사롭지만 사소하지 않은 그 모든 것들을 언어로 도열하면 삶의 지고하고 처절한 순간들이 드러난다. 개인과 사회와 역사, 욕망과 의지와 이상과 좌절의 겹쳐진 그 틈새를 간파한 작가의 필력은 그가 살아 낸 생의 기억들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늙고 사는 일을 실감한다. 무겁고 무섭지만 신비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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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3-06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따님이 문장을 또박또박 잘 읽는데요?
엄마를 닮아 글을 잘 쓰려나 봅니다.ㅎ
그 뜻이야 앞으로 살면서 문득문득 많이 떠오르겠죠.
김훈 작가의 그 문장 참 기가막히군요.
정말 앞으로 살면 살수록 허덕허덕할 때가 많겠죠?
살면 살수록 물 같으면 좋겠는데...

blanca 2017-03-07 09:28   좋아요 0 | URL
벌써 4학년인 걸요. 김훈 문장은 여전히 경이로운 대목이 많더라고요. 늙는 일은 절로 되는 게 아니라 너무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 같아요.

stella.K 2017-03-07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딸래미가 벌써 4학년이어요? 아니 언제에...ㅎㅎㅠ

blanca 2017-03-11 13:20   좋아요 0 | URL
저도 깜짝 놀라요. 제가 4학년이던 게 엊그제 같은데 --;;; (이건 좀 과장이죠? ㅋㅋ)
 
바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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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디에서 오는 길이었을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퇴근길이었을 낯선 아저씨는 가족에게 주려고 산 붕어빵 봉지에서 붕어빵을 하나 꺼내 낯선 아이에게 건네 주었다. 따뜻했다. 하늘의 달은 정말 신기하게도 집까지 따라와 주었다. "신들의 시절"이었을까? 세상도 우주도 한없이 광대한 시절,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신기한 것은 신비로 점철되던 시절, 유년. 서서히 장막은 걷히고 남에게 일어날 수 있었을 또는 있었던 모든 일들은 나의 안전한 지지대로도 파고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 시점, 나도 내가 사는 삶도 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단단하게 깨닫게 되는 그 시간, 어른은 소멸을 향해 늙어간다.


온화한 날씨 속에 한 해가 끝을 향해 이울어가고, 낙엽들이 허둥지둥 달려가고,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낮의 밝음이 희미해지고, 가로등이 매일 저녁 어제보다 약간 더 일찍 켜지는 때에. 그래, 이것이 내가 어른의 생활이라고 생각하던 것이다. 늦가을에 맞이한 기나긴 화창한 날씨 같은 것, 고요의 상태, 호기심이 사라진 차분한 상태. 견디기 힘들었던 유년의 날것 그대로의 직접성은 다 사라지고, 어렸을 때 곤혹스러워하던 것은 다 풀리고, 모든 수수께끼가 해결되고, 모든 질문에 답이 나오고, 순간순간에 물이 똑똑 듣듯이 거의 알아챌 수도 없이, 황금 방울처럼 똑똑, 마지막, 거의 알아챌 수도 없이 해방을 향해 흘러가는 상태,

-p.92


이 남자는 지금 이 시간을 상실과 더불어 통과하고 있다. "그들은, 신들은 떠났다."는 선언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이미 남자는 충분히 늙었다. 반 세기가 더 지나 돌아온 유년의 풍경은 화석처럼 보존되어 있었다. 오십 년의 시차는 같은 공간 안에서 경계를 허물고 서로 극복된다. 남자가 회상하는 자신의 세계 밖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관조적이다. 남자는 그 모든 시간을 직접 통과해 왔건만 번번히 불투명하게 관찰하는 시점에 자신을 고착화한다. 그렇다면 그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우리의 이야기로 응축되는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그 모든 것의 직접성은 비록 서사의 구체적인 결은 다르지만 이 남자의 음험한 짝사랑과 서툴지만 영롱했던 그 모든 처음이었던 것들과 겹친다. <바다>를 읽게 되면 그래서 멈칫멈칫하게 된다. 이것은 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도 되니까.


작가는 "세속적 표현의 순간"을 고대하는 이 남자의 목소리를 빌어 그의 소망을 실현했음을 들킨다. "나는 표현될 것이다."는 작중 화자의 고백으로 폄하되지 않는다. 그 뒤에 숨어 끊임없이 자신의 시선을 들키는 작가 본인의 것으로 의심되어도 충분할 것이다.


사는 일은 지난하지만 절실한 일이다. 상실과 필연적으로 만나는 것은 유한한 삶의 본질적 속성일 게다. 눈물 없이는 나아갈 수 없는 일이다. 상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일은 그래서 때로 진부해지지만 영원히 반복되는 삶의 이야기다. <바다>를 유영하는 일은 그러한 상실을 저마다 개별적인 지점에서 보편적인 곳으로까지 밀고 나가는 힘겹지만 의미 있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미 모두 모든 불가능한 것들의 발치를 쓸어가는 시간을 통과해 신들의 시간을 통과해서 다시 신들의 시간으로 갈 운명이다. 그 운명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바다>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 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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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애비뉴의 영장류 - 뉴욕 0.1% 최상류층의 특이 습성에 대한 인류학적 뒷담화
웬즈데이 마틴 지음, 신선해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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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지간 뚱뚱한 여자는 없었다. 못생긴 여자도 없었다. 아무도 가난하지 않았다.

-p.227

 

살면서 속물이 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장담할 일이 아니다. 내 안의 욕망, 시샘, 질투, 비교를 언어화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고결함만으로 설명되고 규정된다는 건 유달리 속물적 욕망을 드러내는 이를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속단하는 것만큼 한계에 갇힌 이야기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욕망 그 자체가 어떤 사람의 행동의 동인의 전부라 여기고 그 틀안에서 해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특히 아이를 가진 엄마는 참으로 복합적이고 다변적이고 언어화하기 힘든 섣불리 규정되기 힘든 존재가 아닌가 싶다. 이기심, 모성애, 이타성은 명확한 경계를 때로 불허한다.

 

어쩌면 내밀한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속물적인 이야기다. 인류학을 공부했지만 인류학자라고 스스로를 규정짓지 않는 저자 웬즈데이 마틴이 '맨해튼 엄마들의 세계' 속에 들어가 '동화'되어 완벽한 거리두기에는 실패한 상태에서 그들을 학문적으로 고찰하고자 시도한 이야기다. 그녀 자신이 거기에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그들만의 배타적인 세계에서 왕따도 당해보며 객관, 중립, 주관을 왕복하며 풀어내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아이의 놀이약속을 잡아보려다가 숱한 거절을 당한 체험, 마침내 우연한 기회로 그 집단에 받아들여졌을 때의 어쩌면 좀 속물적으로 보이는 환희, 소위 에르메스의 '버킨백'이 남성들의 고급 자동차처럼 작용하는 세계에서 그 가방을 어렵게 구하려고 분투하는 과정에 대한 솔직한 고백은 실제 그 세계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엄마로서  "협오스럽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한 정면 응시였다.

 

'생태학적으로 자유롭다'는 말의 의미는 기본적인 의식주의 안전성은 확보된 지 오래라 생존 그 자체의 문제로 분투할 필요가 없는 이 최고급 동네의 생래적 자유이기도 하고, 더불어 양가적인 구속이기도 하다. 물질적 제한에서 해방된 자리에는 극도의 불안, 질시, 경쟁이 게재된다. 최고의 자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파크애비뉴 70번대 가의 엄마들은 신경안정제를 먹고 술을 마시며 그 불안을 잠재운다. 저자는 내심 그러한 그녀들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때로 안쓰럽기도 하고 경멸스럽기도 하다. 최고급 학력을 지닌 이 동네의 많은 여자들은 직장을 다니며 일하지 않는다. 최고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지만 가정내에서의 위치에는 그녀들이 학창시절 누렸던 평등의 개념은 사변적으로 전락한다. 남편과 아내는 동등한 권리, 의무, 자유를 누리지 않는다. 가족 내에서 풍요로운 물질을 둘러싼 미묘한 불평등, 긴장이 팽배하다. 그러니 그녀들은 불안하다. "명예와 수치의 문화"는 "낯을 잃을까" 두렵게 만든다. 보이는 것들을 최고급으로 유지하는 데에 드는 에너지는 그녀들의 정체성을 공고화하는 게 아니라 그녀들의 정체성 자체를 타의적이고 모호한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실제 저자 자신이 아이를 잃는 경험을 하며 거만하고 도도해 보였던 그녀들의 호의, 연대를 경험하며 현대 사회의  "모성집약적인 양육 문화"가 어떻게 엄마들을 짓누르는지를 상기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최정점에서 실제 그녀들이 경험했던 숱한 남녀평등의 신화는 자의든 타의든, 반복되는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현실적인 문제들의 공격으로 무너진다. 그리고 그녀들의 에너지와 지성, 능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최고의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으로 그녀들을 한정하게 된다. 삶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숱한 긴장과 알력 관계는 이들을 박제화했던 것이다.

 

건설적이거나 절충적인 해법이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적 고찰은 관찰자가 그 집단에 동화됨으로써 수시로 기우뚱거린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이기도 하지만 결국 이 이야기의 미덕이자 매력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나'는 끊임없이 최고의 사교계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분투하지만 그러한 속물근성은 결국 고전이 되었다. 대단히 고결하고 대단히 이상적인 것은 지향이 될 수는 있지만 삶의 역동과는 때로 빗겨간다. 그렇다고 모든 속물적 욕망이 정당화되거나 이상시되는 것도 존재와 삶을 한 차원 전락시키는 것이 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러고 보면 모든 예술은 글쓰기를 포함해서 인간의 저급한 욕망과 고결한 이상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균형의 무게추를 찾는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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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메티가 사랑한 마지막 모델
프랑크 모베르 지음, 함유선 옮김 / 뮤진트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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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쩌다 우연히 처음 마주친 그날 오후, 벌써 삼십 년도 훨씬 전인 그해 여름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분명 논픽션을 표방하고 있는데 강렬한 단편 소설 같았다. 저자는 여자 친구와 헤어진 분한 마음으로 미술관의 전시실에서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을 초상화로 대면하고 그로부터 삼십 년도 훌쩍 지나서야 프랑스 니스의 영국인 산책로의 덜컹거리는 승강기를 타고야 올라갈 수 있는 작고 초라한 아파트에서 늙어버린  그 빛나던 소녀를 만나 이 이야기를 듣게되어  이렇게 쓰게 된다. 충실한 아내가 있고 이미 충분히 성공한 위대한 노년의 조각가와 거리의 소녀는 나이 차가 사십을 뛰어 넘는다. 어쩌면 아주 진부하고 비윤리적이고 신파조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가 그렇지 않게 된 데에는 저자의 자코메티의 예술에 대한 깊은 교감과 그의 어린 뮤즈였던 이 작고 나이 든 여자의 삶의 무게 그 자체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기능했다.

 

가랑비가 내리던 파리의 몽파르나스 거리의 밤을 자코메티와 까롤린은 팔짱을 끼고 걸어 다닌다. 자코메티는 자신이 전혀 지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예술에 대하여 가지는 모든 느낌, 생각을 이야기하고 여자는 그저 남자가 말하는 모든 것에 매혹되어 듣고 또 듣는다. 삼십 년도 더 뒤에 이 날을 회고하는 여자의 말은 그녀를 빌리지 않고 언어에 기대지도 않고 이미지로 떠오른다. 추적 추적 내리는 비. 여자는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 든 조각가의 곁에 서 있는 상황을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뮤즈, 모델이 된다. 작업실에 갇혀 있던 나날들 속에 여자는 "빛이 나게 해주었다."고 자코메티를 회고한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그 고단한 여로를 여자는 자신의 늙은 연인 덕분에 배우게 된다. 남자는 병들고 투병하고 아주 많이 살아야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자신이 죽고 남을 여자에게 이야기해준다.

 

"죽음이 나를 맞이하려고 준비하고 있어.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서 고생했는지 모르겠어."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어요."

 

2010년 소더비 경매에서 자코메티가 이야기한 그 "아무것도 아닌 것" 중 하나인 <걸어가는 남자1>이 천억이 넘는 가격에 낙찰되었다,고 한다.(옮긴이의 말 참조) 죽음은 얼마 안 되는 공평한 일 중 하나이고 자코메티의 말처럼 '항상 마침내 사물들을 제 자리에 갖다 놓는 것'이라지만 자신과 함께 세상 전체가 암전되어버리고 나면 생이 그려낸 모든 궤적은 언어로 그려내는 지도 속 어딘가에 어렴풋이 남으며 존재와 생과 반목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생 전체를 바쳤던 남자와 우연히 그 남자의 마지막을 동행하게 되었던 청춘을 회고하는 노년의 여자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언어로 옮기는 남자의 앙상블이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그러고 보면 그 누구에게도 '예외'란 없는 듯하다. 자신이 남긴 것들로 마침내 불멸의 성취를 이루어낸 남자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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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에 관하여
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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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낳고 나면 겁이 많아진다. 옛어른들의 "간이 바닥에 두 번은 떨어져야 아이를 키운다",는 말, "애간장을 녹인다",는 표현은 그 강도가 무시무시하지만 단순한 엄포나 거짓말이 아니었다. 특히 아이의 몸과 관련된 문제가 그랬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의 시누이 다리야가 안나에게 가는 길 마차에서 아이들과 관련된 상념에서 아이들의 건강과 관련된 끊임없는 불안을 떠올리는 대목은 모든 어머니들을 만나게 한다. 임신 중간중간 각종 검사들의 출발부터 "나의 아이는 당연히 건강하고 건강할 것이다."라는 기본 전제는 든든한 지지대를 잃기 시작한다. 현대 의술의 발달은 판단 지점이나 조력 지점이 미묘하지만 마음껏 불안할 수 있는 영역에 어머니들을 모이게 했다는 점에서 과거 그러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어머니들이 지녔던 근본적인 무기력의 무기와 겨룰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성은 불확실, 불안과 힘겨루기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기는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B형 간염 접종을 시작으로 무수히 많은 백신의 일정의 단계를 차곡차곡 밟아 간다. 아기를 안고 병원에 가서 그 일정을 따르는 일은 기계적으로 행해지다 어느 순간 때로 의문을 야기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도 이렇게 주사를 많이 맞았나? 이 예방주사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각종 보존, 첨가제, 부작용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충분히 부풀릴 만한 많은 확인되지 않은 근거, 사례들이 인터넷에 범람하며 나는 아이를 각종 전염병으로부터 보호한 게 아니라 오히려 각종 유독한 물질에 무방비로 내맡긴 듯한 죄책감에 혼란스러워진다. 보존제에 수은이 있다던데(이미 제거되고 생산된 지 오래다), MMR과 자폐증이 상관관계가 있다던데...제약회사도 이윤을 남겨야 하는 사기업인데 과연 백프로 선한 의도로 백신을 생산할까? 등, 끝이 없다. 그렇다고 필수접종을 건너뛸 용기는 없으니 슬그머니 선택 접종인 독감 예방 주사를 건너뛰기 시작한다. 그런데 마치 그런 의도를 간파하기라도 한 듯 독감 주사를 맞추지 않은 그 해에 A형 독감 광풍이 불었고 큰 아이는 육개월이 되지 않아 미처 독감 접종을 하지 못한 아기 동생까지 감염시켰다.

 

엄마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예방접종에 대한 의견 개진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다. 무조건적 거부도 선별적 거부도 또 그 거부 자체에 대한 반감도 대부분 아이를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문제이기에 어떤 논리의 대결 구도로 가면 모두가 상처 입는 논쟁이 되고 만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러한 접종의 문제를 공공의 문제로 인식하는 엄마들의 의견이 귀에 들어왔다. 단지 내 아이를 보호하고 보호하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공공의 면역을 형성함으로써 다른 아이들까지 함께 치명적인 질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하는 문제가 예방접종의 장으로 들어온 것이다. 실제 미국 상류층에서 자신의 아이에게 MMR을 맞추지 않음으로써 홍역 전염을 일으켰던 사례는 접종의 문제가 단순히 개인의 선택권으로만 수렴될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 책은 어린 아이를 키우며 예방접종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많은 의구심, 혼란, 불안에 대하여 실제 어린 아이를 키우며 저자 율라 비스가 가졌던 그 불확실성에 대한 천착, 때로 그것을 교묘하게 부추기고 이용하고는 책임감 없이 발을 빼는 집단에 대한 비판적 성찰들과 더불어 찬찬히 모색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아가 우리가 접종을 통하여 형성하게 되는 면역의 장이 공공의 장이라는 이야기는 모성이 사적인 공간 안에 고이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되는 일이 공공의 영역에 걸쳐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시인도 언론인도 아니고 그저 에세이스트이자 시민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오만하거나 감정적이나 지나치게 학구적이지 않아서 와닿는다. 자신에게서 끌어올리는 감정을 부정하지도 않지만 최선을 다해 사실 논거를 수집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최초의 종두법부터 최근의 수두파티, 홍역 파동, 제3세계의 백신 접종을 둘러싼 논란 등의 사례가 그렇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두려움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으로 무엇을 할까? 내게 이 질문은 시민이 된다는 것과 어머니가 된다는 것 둘 다에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처럼 느껴진다. 어머니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힘과 우리의 무력함을 조화시켜야만 한다. 우리는 아이를 어느 정도까지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전혀 취약하지 않게 만들 순 없는 것처럼, 아이도 전혀 취약하지 않게 만들 수 없다. 도나 해러웨이가 말했듯이, <인생이란 취약성의 기간이다>.

-p.231

 

저자는 진부한 은유에 대하여 경계하지만 덧붙여 언급한 "시민이 된다는 것"이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힘과 우리의 무력함을 조화시켜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시선을 잡아 끈다.

 

삶은 지극히 사적이지만 결국 공적인 공간을 넘나들며 전개된다. 그러니 우리는, 어머니는 연약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더불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아이들과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려는 숭고한 노력으로 강건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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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07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이란 취약성의 기간이다... 인생에 관한 여러 가지 정의들 중에서 가장 공감한 내용입니다.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르고, 질병의 고통을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이런 취약함을 잊으려고, 종교에 심취하거나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를 회피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합니다.

blanca 2016-12-07 19:13   좋아요 0 | URL
물 흐르듯이 평화롭게 살고 싶다, 하다가도 산다는 것 자체가 전투적 불안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때로 들어요.

GD 2017-01-2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남의 글을 읽고 글을 남겨보긴 처음입니다.제가 요사이 생각하는것과 무관하지않아서 주의깊게 읽게되었습니다.저는 일생이제까지살면서 나혼자만 잘산느것에 치중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글을 읽으면서 그렇게 살아왔다는데에 생각이 드네요 정말 난 한참 이기적인 인간이였구나하고말이죠 내이야기가 아니니 관심없던 나를 우리가족이야기가 아니니 무심했던 나를 반성하게 만드는 어머니의 힘이 대단합니다. 제가 어머니가 될수는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누가 어머니들을 욕보이지 말았으면 하는심정으로 고맙게읽은 글에 댓글을 남깁니다.좋은하루되세요

blanca 2017-01-23 10:24   좋아요 0 | URL
GD님 댓글은 저를 돌아보게 하네요. 항상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가진다는 건 큰 의미가 있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파가 왔는데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