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크애비뉴의 영장류 - 뉴욕 0.1% 최상류층의 특이 습성에 대한 인류학적 뒷담화
웬즈데이 마틴 지음, 신선해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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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지간 뚱뚱한 여자는 없었다. 못생긴 여자도 없었다. 아무도 가난하지 않았다.

-p.227

 

살면서 속물이 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장담할 일이 아니다. 내 안의 욕망, 시샘, 질투, 비교를 언어화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고결함만으로 설명되고 규정된다는 건 유달리 속물적 욕망을 드러내는 이를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속단하는 것만큼 한계에 갇힌 이야기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욕망 그 자체가 어떤 사람의 행동의 동인의 전부라 여기고 그 틀안에서 해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특히 아이를 가진 엄마는 참으로 복합적이고 다변적이고 언어화하기 힘든 섣불리 규정되기 힘든 존재가 아닌가 싶다. 이기심, 모성애, 이타성은 명확한 경계를 때로 불허한다.

 

어쩌면 내밀한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속물적인 이야기다. 인류학을 공부했지만 인류학자라고 스스로를 규정짓지 않는 저자 웬즈데이 마틴이 '맨해튼 엄마들의 세계' 속에 들어가 '동화'되어 완벽한 거리두기에는 실패한 상태에서 그들을 학문적으로 고찰하고자 시도한 이야기다. 그녀 자신이 거기에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그들만의 배타적인 세계에서 왕따도 당해보며 객관, 중립, 주관을 왕복하며 풀어내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아이의 놀이약속을 잡아보려다가 숱한 거절을 당한 체험, 마침내 우연한 기회로 그 집단에 받아들여졌을 때의 어쩌면 좀 속물적으로 보이는 환희, 소위 에르메스의 '버킨백'이 남성들의 고급 자동차처럼 작용하는 세계에서 그 가방을 어렵게 구하려고 분투하는 과정에 대한 솔직한 고백은 실제 그 세계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엄마로서  "협오스럽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한 정면 응시였다.

 

'생태학적으로 자유롭다'는 말의 의미는 기본적인 의식주의 안전성은 확보된 지 오래라 생존 그 자체의 문제로 분투할 필요가 없는 이 최고급 동네의 생래적 자유이기도 하고, 더불어 양가적인 구속이기도 하다. 물질적 제한에서 해방된 자리에는 극도의 불안, 질시, 경쟁이 게재된다. 최고의 자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파크애비뉴 70번대 가의 엄마들은 신경안정제를 먹고 술을 마시며 그 불안을 잠재운다. 저자는 내심 그러한 그녀들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때로 안쓰럽기도 하고 경멸스럽기도 하다. 최고급 학력을 지닌 이 동네의 많은 여자들은 직장을 다니며 일하지 않는다. 최고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지만 가정내에서의 위치에는 그녀들이 학창시절 누렸던 평등의 개념은 사변적으로 전락한다. 남편과 아내는 동등한 권리, 의무, 자유를 누리지 않는다. 가족 내에서 풍요로운 물질을 둘러싼 미묘한 불평등, 긴장이 팽배하다. 그러니 그녀들은 불안하다. "명예와 수치의 문화"는 "낯을 잃을까" 두렵게 만든다. 보이는 것들을 최고급으로 유지하는 데에 드는 에너지는 그녀들의 정체성을 공고화하는 게 아니라 그녀들의 정체성 자체를 타의적이고 모호한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실제 저자 자신이 아이를 잃는 경험을 하며 거만하고 도도해 보였던 그녀들의 호의, 연대를 경험하며 현대 사회의  "모성집약적인 양육 문화"가 어떻게 엄마들을 짓누르는지를 상기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최정점에서 실제 그녀들이 경험했던 숱한 남녀평등의 신화는 자의든 타의든, 반복되는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현실적인 문제들의 공격으로 무너진다. 그리고 그녀들의 에너지와 지성, 능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최고의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으로 그녀들을 한정하게 된다. 삶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숱한 긴장과 알력 관계는 이들을 박제화했던 것이다.

 

건설적이거나 절충적인 해법이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적 고찰은 관찰자가 그 집단에 동화됨으로써 수시로 기우뚱거린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이기도 하지만 결국 이 이야기의 미덕이자 매력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나'는 끊임없이 최고의 사교계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분투하지만 그러한 속물근성은 결국 고전이 되었다. 대단히 고결하고 대단히 이상적인 것은 지향이 될 수는 있지만 삶의 역동과는 때로 빗겨간다. 그렇다고 모든 속물적 욕망이 정당화되거나 이상시되는 것도 존재와 삶을 한 차원 전락시키는 것이 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러고 보면 모든 예술은 글쓰기를 포함해서 인간의 저급한 욕망과 고결한 이상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균형의 무게추를 찾는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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