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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메티가 사랑한 마지막 모델
프랑크 모베르 지음, 함유선 옮김 / 뮤진트리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우리가 어쩌다 우연히 처음 마주친 그날 오후, 벌써 삼십 년도 훨씬 전인 그해 여름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분명 논픽션을 표방하고 있는데 강렬한 단편 소설 같았다. 저자는 여자 친구와 헤어진 분한 마음으로 미술관의 전시실에서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을 초상화로 대면하고 그로부터 삼십 년도 훌쩍 지나서야 프랑스 니스의 영국인 산책로의 덜컹거리는 승강기를 타고야 올라갈 수 있는 작고 초라한 아파트에서 늙어버린 그 빛나던 소녀를 만나 이 이야기를 듣게되어 이렇게 쓰게 된다. 충실한 아내가 있고 이미 충분히 성공한 위대한 노년의 조각가와 거리의 소녀는 나이 차가 사십을 뛰어 넘는다. 어쩌면 아주 진부하고 비윤리적이고 신파조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가 그렇지 않게 된 데에는 저자의 자코메티의 예술에 대한 깊은 교감과 그의 어린 뮤즈였던 이 작고 나이 든 여자의 삶의 무게 그 자체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기능했다.
가랑비가 내리던 파리의 몽파르나스 거리의 밤을 자코메티와 까롤린은 팔짱을 끼고 걸어 다닌다. 자코메티는 자신이 전혀 지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예술에 대하여 가지는 모든 느낌, 생각을 이야기하고 여자는 그저 남자가 말하는 모든 것에 매혹되어 듣고 또 듣는다. 삼십 년도 더 뒤에 이 날을 회고하는 여자의 말은 그녀를 빌리지 않고 언어에 기대지도 않고 이미지로 떠오른다. 추적 추적 내리는 비. 여자는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 든 조각가의 곁에 서 있는 상황을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뮤즈, 모델이 된다. 작업실에 갇혀 있던 나날들 속에 여자는 "빛이 나게 해주었다."고 자코메티를 회고한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그 고단한 여로를 여자는 자신의 늙은 연인 덕분에 배우게 된다. 남자는 병들고 투병하고 아주 많이 살아야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자신이 죽고 남을 여자에게 이야기해준다.
"죽음이 나를 맞이하려고 준비하고 있어.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서 고생했는지 모르겠어."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어요."
2010년 소더비 경매에서 자코메티가 이야기한 그 "아무것도 아닌 것" 중 하나인 <걸어가는 남자1>이 천억이 넘는 가격에 낙찰되었다,고 한다.(옮긴이의 말 참조) 죽음은 얼마 안 되는 공평한 일 중 하나이고 자코메티의 말처럼 '항상 마침내 사물들을 제 자리에 갖다 놓는 것'이라지만 자신과 함께 세상 전체가 암전되어버리고 나면 생이 그려낸 모든 궤적은 언어로 그려내는 지도 속 어딘가에 어렴풋이 남으며 존재와 생과 반목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생 전체를 바쳤던 남자와 우연히 그 남자의 마지막을 동행하게 되었던 청춘을 회고하는 노년의 여자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언어로 옮기는 남자의 앙상블이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그러고 보면 그 누구에게도 '예외'란 없는 듯하다. 자신이 남긴 것들로 마침내 불멸의 성취를 이루어낸 남자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