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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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일은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때로는 어떤 대단한 층위에 있는 것도 같아 ‘어찌 감히 내가’라는 의심의 시험에 들 때가 있다. 무엇보다도 글 속의 ‘나’는 언어의 체로 이미 한번 걸러진 후라 가짜 같기도 하고 너무 진짜인 것도 같아 민망해질 때가 있다. ‘나’는 ‘나의 삶’은 언어로 대변되는 것이 아니라 그 틈새로 빠져나가는 많은 것들의 그 허룩한 지점에서 서성이는 것이라 ‘쓰는 일’은 때로 한없이 허무해지는 것이다. 쓰는 일은 용기와 더불어 선별과 선택과 포기와 체념을 전제로 하는 것 같다.

이런 대목에서 김중혁의 <무엇이든 쓰게 된다>는 어깨도 다독여주고 손도 잡아주는 따뜻함이 있다. 그는 읽고 쓰는 일을
함부로 과장하거나 미화하거나 폄하하지 않는다. 김중혁이 쓰기 위해 동원하는 사물과 그가 쓰기 위해 읽어낸 많은 것들이 그의 사람 좋아 보이는 언어를 통과하면 한결 가볍고 한층 실한 것들로 거듭나는 기분이다. 그가 사용하는 애플의 펜슬과 이미 내가 쓰고 있는 팔레르모의 블랙윙만 있다면 무언가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 같은 호기를 불러일으킨 책임을 작가에게 물어도 될까.

그가 애플 펜슬로 그린 그림과 수능문제 형식으로 빚어낸 독자들 대상의 창의력 테스트는 이미 완결된 텍스트를 이스트처럼 발효시켜 ‘읽는다’는 그 단순하고 수동적인 행위를 창의적인 즐거운 소통으로 업그레이드시킨다. 확실히 김중혁은 유쾌한 작가다. 꼭 쓰는 일이 아니라도 우울해지고 소심해지고 자괴감의 동굴로 파고들고 싶어질 때 ‘그’를 권한다. 사는 일의 무게가 덜어지지만 그 의미는 더욱 깊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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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7-12-29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 님이 그런 생각을 하실 때가 있다니,,,,겸손하세요.
제 아들 해든이 글을 올렸다가 님의 분홍공주 생각이 났어요. 어떻게 지내나요?? 의젓한 누나가 되었나요??? ㅎㅎㅎㅎㅎ 엄마 닮아서 글도 잘 쓰고 책도 많이 읽겠죠?^^

blanca 2017-12-29 08:08   좋아요 0 | URL
해든이와 분홍공주가 아마 동갑이지요? 동생과는 여섯 살 차이가 나는데도 어찌나 투닥거리는지 몰라요. ㅡㅡ 요즘 부쩍 어릴 때 모습이 많이 떠올라 기분이 참 묘해요. 벌써 사춘기 소녀 느낌이 나기 시작해요. 제가 분홍공주 나이 때도 기억이 생생한데... 해든이 큰 모습 사진도 보고 어찌나 쑤욱 컸던지 깜짝 놀랐어요.

라로 2017-12-29 16:49   좋아요 0 | URL
투닥거리고 할때가 좋은 때 같아요,,,ㅎㅎㅎㅎ
분홍공주 벌써 사춘기 느낌이 나는 군요!!!
가끔 아이들 얘기도 올려주시고 사진도 살짝 올려주세요~~~. 어떻게 컸나 궁금해요,,,해든이랑 동갑이라 더 궁금한가봐요~~~.^^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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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하늘, 이국의 언어. 분명 아름답고 찬란한 구석이 있지만 늙어버린 나는 뭔가 내내 불편하여 서성이게 된다. 그건 내가 들어갈 수 없는 '풍경'의 환시 같은 거다. 나는 구경꾼, 손님, 방랑자, 깍두기다. 나의 눈빛은 내내 불안정하고 숨결은 거칠다.

나는 아무래도 여기에서는 행복할 수가 없다.


내가 나온 곳으로부터 내가 결국 가 닿아야 하는 곳으로 오랜만에 이 책이 왔다. 모국어란 때로 참 엄정하다. 내가 무시하는 것들, 내가 지나친 것들을 적확하게 지적한다. 떨칠 수 없는 모정과도 닮았다. 늙은 엄마는 장성한 자식을 다르게 대하지 않는다. 학교 가방을 처음 메고 나간 아이처럼 하지 않아도 되는, 해도 별 수 없는 말들을 주워섬긴다. 아이는 다 흘려듣는 듯하지만 그 말들은 차곡차곡 쌓여 아이에게 무게를 더한다. 내가 그렇다. 그 어떤 내용이라도 이러한 모국어라면 나에게 결국 관통하여 들어와서 남고야 마는 완강함이 있다. 나는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다.


'지난봄, 우리는 영우를 잃었다.'는 문장은 <입동>을 시작하는 이야기가 아니면서 그 중심에서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다섯 번의 이사 끝에 부부가 당도한 곳은 안정적인 보금자리가 아닌 또 하나의 상실을 담보한 허공이었다. 차곡차곡 열심히 벌어 외부의 시선으로 볼 때 점점 그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여겼던 안도감은 어이없는 사고로 일거에 부서지고 만다. 시시하고 안온한 일상조차 기적이자 어마어마한 붕괴 지점을 눈가림하고 있는 허룩한 이음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이 평범한 부부의 이야기는 다리를 후들거리게 만든다. 누구나 이러한 상실과 이러한 상실을 경험했을 때의 타인들의 몰이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그 잔인한 현실에 대한 자각의 지점 때문일까? 담담한 문체가 뼈로 스민다. 부부는 그 상처로부터 나아갈 수 있을까?, 라고 묻는 지점에서 현실은 그리 허룩하지 않음을 작가는 넌지시 이야기한다. 시간이 모든 것을 이기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애란의 시선은 상실과 소외로 가 닿는데 그 뻗침이 작위적이거나 연민을 담보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속으로 스며 따뜻하게 이동하다 보니 그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어뜨려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다. 조손가정의 아이가 우연히 만나게 된 유기견과 함께 지내게 되며 그 개의 아픈 마지막을 동행하는 이야기 <노찬성과 에반>, 다문화 가정의 아이가  노인 폭행 사건의 방관자가 되는 이야기를 엄마의 시선으로 그린 <가리는 손>은 다 같이 아직 채 성장하지 않은 소외 계층의 아이들이 어떻게 소극적 악에 무감하게 되는지가 설득력 있게 그려져 있다. 우리는 무조건적 선을 기대하며 최소한의 선조차 제공해 주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자성을 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마냥 찬란해야 할 것만 같은 젊음을 누리지 못한 채 취업 시장의 어둑한 곳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음에 대한 작가의 천착은 여전히 유효한 듯 <건너편>에서는 공무원 시험 장수생이 가정을 이루고도 결국 자신이 지향했지만 한없이 거절당했던 그 지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 생생하다. 중년을 향해 가는 그 수많은 젊음들은 거기에서 그렇게 작가의 방식대로 늙고 성숙하고 살고 있어 정이 든다. 흔들리고 절망하고 그럼에도 그 기적적인 일상성에 매몰되지 않으려 애쓰는 그들이 기특하다.


그녀의 애도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어디로 가고 싶은신가요>에서 제자를 구하려다 떠난 남편에 대한 원망은 그 남편이 '죽음'으로 뛰어든 것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남편의 시선으로 비로소 진화하는 마지막 이야기다. 그것은 분명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은 언어로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시간성 안에 걸린 그 이야기는 끊임없이 환기되고 복기되고 다시 이해되며 그렇게 비로소 마침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니. 섣부른 치유와 화해와 이해를 강요하지 않는 담백함이 빛난다. 그녀의 이야기가 날아서 들어온 이유다.


나는 내일도 또 실망할 것이다. 탄생으로부터는 또 하루 더 멀어지고 죽음에 하루 더 가까이 가고 사람들의 거죽은 더욱 두꺼워지고 나의 거죽은 더욱 허룩해질 테니까. 그럼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있어 참 많은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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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8 2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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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9 0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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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9 03: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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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0 0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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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0 03: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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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은 노래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7
도리스 레싱 지음, 이태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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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좋아하는 영어권 작가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white'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왠지 모를 반감이 들기 시작했다. 미국드라마에서 보던 다인종이 한데 어우러져 서로 교감하는 장면은 사실 지나치게 이상적인 장면이기에 반드시 도식처럼 삽입된 것이라는 감정적인 해석도 함께 왔다. 아직도 우리는 인간이기에 다 같이 서로를 존중해 주기에는 너무나 욕심이 많다. 사는 일에 욕심이 게재되지 않고 생존이 영위되는 일이 가능할까? 다 같이 고결하고 다 같이 서로의 눈을 맞추며 함께 걸어가는 현실에서 삶이라는 이야기가 진행될 수는 없는 것일까? 미국의 대통령은 단지 태어날 때의 피부 색깔 하나로 자신들의 특권을 인정해 달라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에 짐승 같은 소리라고 일갈하는 대신 비난의 초점을 교묘하게 이동시킴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욕망과 편견을 드러냈다.


사회적 약자의 프레임에는 수많은 판단 기준이 혼재한다. 경제,성별, 인종, 가치관, 연령. 그러니 결국 그 누구라도 완벽한 승자가 되기란 절대적 패배자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항상 언제나 처절하게 지는 사람들이 한켠에 있다. 그럼에도 언제나 역겹게 끈질기게 이겨대는 그들이 있다. 욕심쟁이를 욕하는 이야기는 쉽다. 하지만 항상 지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조심스럽고 어렵기 그지없다.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는 그러한 지는 자들에 대한 성찰이다. 지고 마는 자들에 대한 연민이다. 그리고 연가다. 아름답고 처절하기 그지없는 절창에 한동안 아연해졌다.


남아프리카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백인 여성인 메리는 자신이 속한 사회적 계층, 인종에 대하여 큰 자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운이 지독히도 나쁜 농장주 리처드를 만나 늦게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불행하고 힘든 유년이었지만 비교적 순탄한 처녀 시절을 누린다.  그러나 흑인노예들의 노동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농장주의 아내가 되며 그녀는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상황의 안온하고 안전한 상황에서 누렸던 자신의 삶의 연약한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며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인종을 의식하고 자신이 부리는 흑인 노예들에 감정적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그녀는 외부와 단절된 시골에 갇혀 흑인 노예들에게 자신의 무력감을 해소하며 말 그래도 인간으로서도 여성으로서도 점점 나빠져 간다. 메리에게 아니 그 나라의 그 사회의 그 시간에서의 백인들에게 이미 자신들이 오기 전에 그 땅에서 살고 있었던 흑인인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과는 도저히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메리는 전형적인 백인 여성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노예를 무시하고 괴롭히고 수족처럼 부리려 드는 모습은 지금 여기에서 그 모습을 상상하는 우리를 심히 역겹게 하지만 그녀를 전적으로 미워할 수는 없는 그 무엇이 있다. 도리스 레싱은 메리를 적나라하게 그리지만 메리 안의 '그 무엇'의 이물감이 독자를 밀어내지 않도록 주도면밀하게 그녀의 모습을 조종한다. 그녀의 살갗에는 우리의 못난 모습이 새겨져 있어 그러한 것일까? 과연 그러한 사회적 압력과 제도하에서 그것에 반역할 용기와 신념이 시대와 사회의 프레임 안에 개인을 가두었을 때 쉬운 일일까?


그녀가 결혼 제도 안에서 자본주의의 열패 안에서 추락해 가며 또다른 의미에서의 약자를 하대하고 괴롭히는 모습은 분명 낯선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복합성과 모순은 생의 의지 안에 잠복되어 있어 언제 그 추한 외형을 드러낼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어제는 거액을 기부하고 오늘은 식당이나 가게의 직원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는 모순은 바로 한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다.


메리가 흑인 노예 모세에게 느끼는 설명하기 힘든 이끌림과 거부감은 도리스 레싱의 모호하지만 아름다운 언어로 상당 부분 해석을 독자에게 맡겨버리고 만다.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메리가 모세를 증오했는지 사랑했는지 아니면 그 둘다였는지를. 비참한 최후 앞에서 자신을 결박해버린 그 처참한 배경마처 아름답게 관조해버리는 그녀의 시선은 그 자체로 모순의 결정체다. 이도 저도 아니지만 그 자체로 그게 삶이 되어버리는...삶은 언제나 언어 저 너머까지 날아가 버려 도저히 말로써 담아낼 수 없다. 언제나 저기까지 언어로 밀고 나가려하지만 그 언어의 마침표는 삶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만다.


노예 모세가 자신을 인간으로 취급해 달라는 그 당연한 요구로 그녀를 굴복시켜버렸듯 메리 또한 남편과 사회에 그 자신을 결혼 제도 안의 양순한 아내가 아닌 욕망과 꿈을 가진 인간으로 취급해달라는 그 기본적이고 쉬워보이지만 한없이 어려운 요구를 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떨구어 놓고 가버리고 만다.


그냥 머물러 있는 것. 그러다 그냥 쓸려가는 것. 메리의 슬픈 삶이 모세의 비참한 최후와 오버랩되어 잔상이 오래도록 남는 이야기에 오래도록 서성거리게 된다. 뒷맛이 씁쓸하면서도 장대한 이야기에 압도당하게 된다. 과연 오늘날은 메리의 시대에서 얼마만큼 진보되었는 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교양과 사회적 가면으로 위장하고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억압을 자행하고 자행당하며 오늘을 소비하고 있는 것인지를 성찰하지 않고는 반드시 어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지 않을까. 나도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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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7-08-21 0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선 너무 반가와요~~~~부비부비! 저 나비, 비비아롬나비모리입니다. 제가 모처럼 온 건데 어째 블랑카 님이 그렇게 된 듯한??ㅎㅎㅎ

암튼 이 책은 못 읽겠네요. 너무 화나고 슬프고 그럴까봐. 요즘 언급하신대로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인종주의에 더 불을 지피고 있는 현실이라~~~ㅠㅠ 뭐 세상이 이렇게 거꾸로도 돌아가는 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휴

blanca 2017-08-22 02:43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나비님 생각했었는데 왜 이리 뜸하셨어요! 막내도 많이 컸지요? 저도 요즘은 좀 뜸하게 됩니다. 시간이 참 빠르죠? 알라딘에 온 게 어언 십 년 전이라 생각하니...참 기분이 묘해요. 이 책은 강력 추천합니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첫작품이라네요. 원서로 읽으면 더 절창일 것 같아요.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 - 피아니스트의 아흔 해 인생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시모어 번스타인.앤드루 하비 지음, 장호연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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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면 그 때의 그 어떤 날을, 어떤 사람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일주일 내내 행복해질 수 있었던 그 설레는 느낌은 다시 맛보기 어렵다. 생일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은 이제 그 때 내가 챙겨야 할 사람들, 준비해야 하는 일들로 채워진다. 나이가 들면 그 때의 내 앞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은 시간과 공간은 간데 없다. 대신 여기 내가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이 나를 포박한다. 나이가 들면 이제, '절대', '정말', 같은 부사앞에서는 잠시 멈칫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 분명 잃게 되는 다시는 찾기 어려운 것들이 생긴다.


나이가 들면 이제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말로 내 생활 전반이 흔들리거나 누군가가 나를 부정했다고 해서 내 전존재를 무의미하게 느끼게 되거나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그대로 무릎 꺾여 다시는 일어나기 힘든 경우는 그 전보다 줄어든다. 어떤 이론이나 논리로 상황을 깔끔하게 재단하거나 일어날 일을 예견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섣부른 믿음은 저만치 뒤로 밀려난다. 지혜나 깨달음의 축적이나 경험을 통한 학습된 효과로만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물론 나의 삶을 구성하기는 하지만 그것들만으로 내 전존재나 내 삶 전체를 조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어렴풋한 자각에서도 비롯되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나이듦과 노인이 된다는 것, 죽음이라는 그 확연한 예정된 종말로 서서히 다가서는 일, 그리고 삶.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설명하기 힘든 힘, 섭리. 그래서 아흔이 가까운 거장 피아니스트와 환갑이 넘은 시인이 나누는 <말>을 듣는 과정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을 선망으로 물들였던 <스탠 바이 미>의 그 배우 에단 호크에게 헌정된 인터뷰집이라니...


배우 에단 호크와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타인의 친분은 에단 호크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게 되면서 비롯된다. 둘은 할리우드와 클래식 음악계, 적지 않은 나이차를 건너 뛰어 자신의 재능과 삶을 통합하려는 그 고단하지만 의미 있는 여정에서 만나 진한 공감을 나누게 된다. 자기 분야에서 남다른 재능과 노력, 열정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그것에 안주하거나 그것의 부산물들을 절제 없이 향유하는 대신 더 거대한 생의 과제와 영혼의 탐사, 성숙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며 나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세속적 견지에서 보는 '성공'이라는 열매는 때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치거나 그들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나가는 데에 오히려 거대한 난관으로 작용했는지 수많은 예가 있지 않은가.


여든여덟 살의 노인이 30년간 은퇴했다가 다시 나와서 독주회를 열고 계속해서 가르치고 삶과 죽음, 우주를 둘러싼 그 수많은 답해지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독선적으로 자신의 논리나 아집을 강요하는 대신 겸허하게 "나는 대답이 없어도 됩니다."라고 자인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깊은 가르침을 주는 울림을 준다.


잘 늙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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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7-18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직접 겪어보면 알 수 없는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대답이 없어도 됩니다˝라는 번스타인의 말이 비트겐슈타인의 격언(˝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과 일맥상통합니다.

blanca 2017-07-19 06:45   좋아요 0 | URL
비트겐슈타인이 그런 말을 했군요. 비트겐슈타인은 꼭 도전해 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있어요. 철학도 삶도 흥미롭더라고요.
 
엄마의 골목 - 진해 걸어본다 11
김탁환 지음 / 난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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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직 칠십이 되지 않았고 나와 단 둘이 여행을 간 적이 없다. 엄마의 고향은 부산이지만 엄마의 소녀 시절, 처녀 시절을 함께 더듬어 갈 기회는 아직 없었다. 엄마와 딸과의 관계는 엄마와 아들과의 그것과는 또 다른 것 같다. 수많은 일상들이, 구체성이 그 어떤 추상성을, 개요를, 일반화를 내리눌러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정작 나누어야 하는 그것과는 멀어지는 경우가 많아 아쉽다. 대화가 많다고 해도 그것의 대부분은 생활 그 자체에 가 닿아 있어 그 사람의 본질을 오히려 멀어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김탁환 작가가 어머니와 동행하며 어머니가 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작가로서의 배아가 싹 튼 진해의 골목 골목을 누비며 나눈 그 어머니와의 진짜 대화가 눈물겹게 부러웠다.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버지와도.


진해는 나에게 낯선 지명이다. 벚꽃이 피면 수많은 상춘객들이 일부러 그 허무하게 저버릴 것만 같은 무게를 이고 빛나는 찰나를 보기 위하여 내려간다는 그곳을 아직 보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하고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 가보고 싶은 곳이 남아 있다는 건 어쩐지 좀 덜 채워져서 조금 더 욕심을 내어도 무방할 것 같아 안심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도로가 좁은 2차선인 탓에 벚나무 가지들이 허공에서 서로 만나 벚꽃터널을 이룬다. 그 하얀 터널 아래로 걸어 내려가면, 인구 10만 명에 불과한 이 작은 도시의 특별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이토록 새하얀 봄길을 걸어본 사람은 인생의 정갈함이 무엇인지 안다.

-p,124



그곳은 칠십 대 중반이 된 작가의 어머니가 무려 칠십 년을 보내며 이웃의 삼대의 가족과 소통한 공간이다. 작가를 낳고 키우고 단련시켜 훨훨 날려보낸 바로 그곳이다. 아들의 글을 어머니는 다 정독했다. 아들은 글 쓰는 이야기를 노모와 나눈다. 어머니는 함부로 간섭하거나 단정하거나 조언하는 대신 묵묵히 아들을 지지한다. 백석의 시집을 읽고 그 시집에 나온 음식을 직접 요리해 보는 어머니라니... 일찍 남편과 사별했지만 여인은 아들과 함께 걸으며 누빌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을 잘 여며 두어 행복하다. 하모니카를 불며 자신이 다 없애 버린 사진 속의 젊은 남편과 어린 아들들을 추억하는 나이 든 여인은 너무 멀리 보지 말고 하루 하루를 잘 살라고 이야기한다. 이제 사라질 것임을 알고 인정하고 수긍한 겸허함이 서글프지만 눈부시다.


이 이야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개인적이거나 감상적이거나 가볍거나 통속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 균형은 작가 자신의 글 그 자체보다는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에서 나오는 것 같다. 사회 전체의 애도로 감당하기 벅찼던 이야기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형상화하는 작가는 어머니의 격려를 지고 있다. 세상에 나오기 전에 우리는 어머니의 몸과 마음을 빌리지 않았던가. 결국 우리의 이야기는 어머니로부터 이어지는 생래적 한계를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개별성을 넘어선 어떤 공통의 공동의 영역이라 어머니와의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 같지만 대단히 공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진해를 가본 적도 없는 내가 그 모자의 답사에 간접적으로 행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던 이유다.


표지는 보랏빛. 어둠을 뚫고 형형히 빛나는 벚꽃에는 사실 빛이 없을진대 그것은 어둠을 뚫고 나올 듯하다. 아름다움은 그러한 것이다. 이미 고정된 고착화된 모든 한계를 스미고 나오는 것. 그것은 생의 본질이기도 할 것이다. 이미 스러질 것임을 안다 해도 그것이 무의미와 동의어가 아닌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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