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일은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때로는 어떤 대단한 층위에 있는 것도 같아 ‘어찌 감히 내가’라는 의심의 시험에 들 때가 있다. 무엇보다도 글 속의 ‘나’는 언어의 체로 이미 한번 걸러진 후라 가짜 같기도 하고 너무 진짜인 것도 같아 민망해질 때가 있다. ‘나’는 ‘나의 삶’은 언어로 대변되는 것이 아니라 그 틈새로 빠져나가는 많은 것들의 그 허룩한 지점에서 서성이는 것이라 ‘쓰는 일’은 때로 한없이 허무해지는 것이다. 쓰는 일은 용기와 더불어 선별과 선택과 포기와 체념을 전제로 하는 것 같다. 이런 대목에서 김중혁의 <무엇이든 쓰게 된다>는 어깨도 다독여주고 손도 잡아주는 따뜻함이 있다. 그는 읽고 쓰는 일을함부로 과장하거나 미화하거나 폄하하지 않는다. 김중혁이 쓰기 위해 동원하는 사물과 그가 쓰기 위해 읽어낸 많은 것들이 그의 사람 좋아 보이는 언어를 통과하면 한결 가볍고 한층 실한 것들로 거듭나는 기분이다. 그가 사용하는 애플의 펜슬과 이미 내가 쓰고 있는 팔레르모의 블랙윙만 있다면 무언가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 같은 호기를 불러일으킨 책임을 작가에게 물어도 될까. 그가 애플 펜슬로 그린 그림과 수능문제 형식으로 빚어낸 독자들 대상의 창의력 테스트는 이미 완결된 텍스트를 이스트처럼 발효시켜 ‘읽는다’는 그 단순하고 수동적인 행위를 창의적인 즐거운 소통으로 업그레이드시킨다. 확실히 김중혁은 유쾌한 작가다. 꼭 쓰는 일이 아니라도 우울해지고 소심해지고 자괴감의 동굴로 파고들고 싶어질 때 ‘그’를 권한다. 사는 일의 무게가 덜어지지만 그 의미는 더욱 깊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