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다시 치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이지 피아노를 치기 싫어했다. 시골에서 넉넉하지 못한 집의 장녀로 태어난 엄마는 피아노를 그렇게나 배우고 싶었는데 그 꿈은 한참이나 어린 막내 동생 때에나 가서야 이루어질 만한 것이었다. 그러니 엄마가 스물 다섯 구월에 낳은 나는 여섯 살이 되자마자 피아노 의자에 앉게 되었다. 어쩌면 가장 안 좋은 예체능 교육의 동기였는 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 당시로 여유 있는 집도 아니었는데 조기 음악 교육의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사를 가면 동네의 가정식 피아노집에 등록하는 일이 엄마에게는 가장 급선무였다. 당시 방음이라는 개념도 없었을 텐데 이십 평도 안 되는 아파트의 방방마다 피아노를 넣고 뚱땅거려도 주민들은 용케 참아 주었나 보다. 친구도 이웃들과의 안면도 갈등도 분란도 다 그런 피아노 학원 안방에서 비롯되었다. 의자에 앉으면 페달에 발도 닿지 않는 체구의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는 사진은 대견해 보이기보다 좀 안쓰러워 보인다. 고달프고 지루했던 기억들이다. 어찌 어찌 콩쿨까지 나가 예선에서 보란듯이 김칫국을 마시고 나서야 엄마는 나에게 피아노에 대한 소질도 열정도 없음을 어느 정도 수긍했나 보다. 그 이후 1년을 못 채우고 그만두어 버렸으니.
중학교 때 음악 실기 시험에 긴요하게 써 먹고서는 언제나 꼬부랑 할머니였던 나의 할머니가 쌈짓돈을 모으고 모아 사 주신 피아노도 좁은 집에 짐이 된다는 이유로 팔아 버리고는
이제서야 다시 피아노를 치고 있다. 이제는 하농의 그 단조롭고도 규칙적인 선율의 중독성도 체르니의 연습곡이 때로는 그럴 듯한 작품처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것임도 소곡집의 그 유치하지만 아이에게 꼭 들려 주고 싶은 동요 연주의 즐거움도 알겠는데 말이다.
이미 빈약한 대우를 받으며 멀리 떠나가 버린 나의 그 피아노도 다시 들여놓고 싶고 옆에서 매의 눈으로 나의 연습 상황을 감시했던 그 엄격한 피아노 선생님도 곁에서 나를 다시 채근해 주었으면 싶고 좋은 성적표보다 이선희의 'J에게'를 안 틀리고 치면 더 감격해 했던 엄마의 그 음악 교육에 대한 열정도 다시 찾고 싶다. 자식에게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 되고 싶었던 모습을 투영하는 것은 언제나 시행 착오를 거쳐야 교정될 수밖에 없는 실수이고 자식은 또 그 엄마 나이가 되면 엄마의 실수가 이기심과 착각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그것도 또 하나의 성장의 과정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같다.
이 영화를 제대로 처음부터 보았는 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아이들이 이 영화 속 미소년들에 열광했고 키팅 선생이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학교를 떠나게 되었을 때 학생들이 시위하듯 책상 위에 모두 올라갔던 장면만은 무언가 뭉클하고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남아 있다.
원작이 소설이 아니라 이 작품 자체가 아마 영화를 기반으로 다시 소설 형식으로 쓰여진 것 같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영화 대본을 읽는 현장감이 있다. 풍경이나 인간의 내면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없는 것이 아쉽기도 하고 다행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저 내내 나는 다시 그 자그맙고 추운 교실로 다시 돌아가 아이들과 끊임없이 흥분하고 이야기하고 졸던 나날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만 같은 느낌. 소설이란, 영화란 참 대단한 것같다. 과거를 소환한다. 그 내용과 크게 관련이 없어도 그것을 처음 만났던 당시의 정경들이 뚜벅뚜벅 걸어들어온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키팅 선생이 지금의 나보다 젊었다는 것. 모든 것을 깨닫고 인생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 보이는 그가 삼십 대 초반에 불과했다는 것. 키팅 선생도 아니고 여전히 난 죽은 시인의 사회 서클의 회원들 정도의 정신 연령인 것 같은데 이제 삼십 대 중반에서도 밀려나려고 준비중이라는 것.
그. 리. 고. 저도 모르게 벌써 아이에게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하는 것들의 청사진을 그려 보이려 한다는 것.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벌써 제명당하고도 남을 만큼 이 만큼 와 버렸다는 것. 지금 이 순간을, 꿈을,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소비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또다시 하고 있다는 것.
설거지를 하는데 요새 한창 '나가수'에 흠뻑 빠져 있는 딸아이가 "엄마, 난 가수가 될래"라고 한다. 나는 "음...그것보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하며 멈칫한다. 닐은 연극을 하고 싶어했다. 아버지는 그러한 닐의 꿈을 폄하하고 짓밟는다. 그러한 아버지에게도 키팅 선생의 얘기처럼 꿈을 꾸던 닐과 비슷한 나날들을 보냈던 소년기가 있었을 터이다. 나이가 들고 사는 데에 부대끼게 되면서 우리는 절대 저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모습을 닮아간다.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러나고 닐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아버지 말을 처음으로 거역했던 닐이 자신의 열정이 단순한 치기에 불과하다는 아버지의 얘기와 아버지가 차곡차곡 그려 놓은 소위 엘리트 코스의 청사진을 보고는 절망했던 모습. 열일곱. 그 영향받기 쉬운 나이. 폄하되기 쉬운 열정, 소망.
아이는 어른의 훈육과 말로 자라지 않는다. 모든 깨달음은 결국 몸으로 부딪혀야 공명한다. 서른 다섯이 넘어서야 비로소 피아노를 치는 즐거움을 알았듯이 여섯 살 때에는 열 여섯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까먹지 말아야겠다. 이것은 나에게 하는 전언이다. 언젠가는 사춘기가 될 아이에게 실수하고 싶지 않다. 아이의 꿈을 내가 재단하지 않으려면 이 페이퍼를 꼭 기록해 두어야 한다. 그러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나이듦은 반드시 성장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너에겐 나에겐 다시는 오지 않을 이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