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브 공작부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9
라파예트 부인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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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게 삶의 전부가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때로는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사랑이 전존재를 좌지우지하는, 그런 아주 호사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읽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다. 이렇게 시작한다.

 

 성대함과 정중함이 앙리2세 치세 말년 만큼 프랑스에 눈부시게 나타난 적은 없었다. 왕은 우아하고 친절하고 다정했다. 디안 드 푸아티에, 그러니까 발랑티누아 공작부인을 향한 왕의 열정은 이십 년 전에 시작되었지만, 그때보다 덜 열렬하지도 덜 눈부시지도 않았다.
-p.9

 

 이 소설은 사람을 주어로 시작하지 않는다. 인간의 고결한 자질, 나약하지만 강렬한 정념은 인물들보다 더 강력하게 소설을 휘젓고 다닌다. 성대함과 정중함이 눈부시게 나타나는 시대에 나타난 열정. 이 필연적 모순에서 이야기는 시작하고 사랑은 눈을 뜨고 이야기는 끝나고 사랑은 숨어버린다. 가장 저급한 사랑도 가장 고급한 사랑도 가장 자라기 쉬운 토양인 궁정 이야기는 그 자체로 매혹적이다. 전투처럼 노동의 전장에 달려나가야 하는 생존에 대한 얘기는 한번이라도 더 연인의 눈길을 받기 위해 과장하고 위장하고 연기하는 무리들과, 깔고 앉은 권력과 재물을 거머쥐기 위해 벌이는 암투들로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저쪽이 삶이기도 하도 이쪽이 삶이기도 하다. 저것이 전부라고 여기며 살게 되어지기도 하고 이게 전부라고 여기며 살다 죽게 되기도 한다.

 

 야망과 연애, 이것이 궁정의 정신이었고 사내들이건 여자들이건 하나같이 그 일에 전념했다. 숱한 이해관계와 각기 다른 파벌이 있었고, 거기에 여자들도 깊이 관여했다. 사랑은 항상 사업과 뒤섞였고, 사업은 항상 사랑과 뒤섞였다. 가만히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무관심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더 올라가기를, 누구의 마음에 들기를, 누구를 떠받들기를, 누구를 해치기를 염원했다. 권태도 몰랐고 여유도 몰랐다. 쾌락에 혹은 밀통에 바빴다.

-p.23

 

소위 지배층이라는 자들의 모습. 이 묘사는 낯설지 않다. 정치라는 것이 민중과 유리되어 개인적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에 놓이는 모습은 역겹기도 하고 사실적이기도 하다. 더 올라가기를, 누구의 마음에 들기를, 누구를 떠받들기를, 누구를 해치기를 염원하는 모습. 17세기는 21세기에도 파편화되어 복기된다.

 

이러한 곳에서의 사랑. 궁정의 소문난 바람둥이 귀족 느무르 공과 도덕적인 정열이 대체로 불가능함을 알고 끊임없이 정숙하고자 스스로를 괴롭히는 클레브 공작부인의 사랑은 고도의 심리전과 위장술로 다층적으로 펼쳐진다.  이 시대의 사랑은 비도덕적이기도 하면서 정숙한 겉모습을 위장하기를 바라고 한없는 정열을 바라면서도 진중한 이성이 감침질하기를 기대하는 모순의 결정체로 보인다. 정략적인 결혼이 태반을 이루고 나머지 부수적인 정념들은 각자가 알아서 내밀하게 해결하는 것을 쉬쉬하며 용인하는 모습.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그 상황 자체가 기이한 열정, 욕구 불만 등을 애타는 사랑으로 오해하기 십상으로 만들곤 했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그 미세한 균열을 감지하는 예리한 촉수를 가졌다. 매력적인 미혼남이 자신에게 바치는 애정은 기실 불가능과 가능의 경계의 그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몸을 흔들 때 느끼는 짜릿한 전율에서 더 배가되는 것임을 안다. 사랑이 자신을 인도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눈을 멀게 하지는 않는다는 고백은 정작 자신이 눈멀지 않기 위한 필사의 노력의 몸짓이다.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 분)가 남편과 동승한 차 안에서 자신의 연인의 모습을 보고 뛰어 내리지 않기 위해 고통스럽게 참는 모습은 흡사 병마에 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사투를 벌이는 병자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아가페적 사랑은 지향점이고 에로스적 사랑은 현실로 발목을 붙잡으려 한다. 클레브 공작부인, 프란체스카는 아마도 이 금기의 열정을 경험한 이후 돌아가려고 했던 이전의 자신들의 모습을 완벽하게 기억해 내지 못할 것이다. 덧없고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해도 우리가 이미 칼라 영상을 보고 나서는 흑백 영상에 적응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까.

 

 그런 이야기. 사랑을 쾌락과 애써 분리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쾌락으로 폄하하지도 않고 고결하고 완전한 것으로 숭배하지도 않고 그것의 한계, 모순을 보여주며 있는 그대로 그것이 피어오르고 스러지는 그 모든 과정에 대한 아름답고 섬세하고 낭만적인 묘사. 사랑만을 이야기해 보려 했지만 사랑 그 이상을 묘파해 낸 매혹적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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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
    from Value Investing 2012-01-14 16:20 
    blanca님의 멋진 서평글을 다 읽고 나니, 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떠오릅니다. * * *연정은 겉보기에는 별나라 같아도, 사실은 성욕이라는 본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니, 이 본능이 특수화된 것이며 개체화된 것이다.이 점을 염두에 두고 사랑이 희곡이나 소설에서뿐 아니라 실제 사회에서(거기서는 자기보존 본능과 함께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며, 모든 동작 중에서 가장 활동적이다) 연출하는 중
 
 
아이리시스 2012-01-12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영국소설인가요, 블랑카님? 공작부인이라니까 그렇게 생각해봤어요. 첫줄은 완전 공감이구요. 블랑카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도 재밌어요. 읽기에는 좀 힘들 것도 같은데.. 에로스는 타나토스와도 닮아 있대요. 3초의 희열이요. 예전에 쾌락이 사랑의 전부인 것마냥 묘사하면 좀 거부감이 들고 그랬는데 나이를 먹으니(?) 그것도 이해가 돼요. 사랑이 아주 낭만적이고 섬세하지 않아도 매혹적일 수 있다는 것이요.

blanca 2012-01-12 22:20   좋아요 0 | URL
프랑스 소설이랍니다. 작가도 라파예트 부인이라고 귀족 부인이고. 그 시대의 로맨스물격인 것 같아요. 아, 분량도 적고 의외로 잘 읽힌답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도 이러한 것이다, 단정지을 수 없을 것 같아요.

dreamout 2012-01-12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이 책에 대해서 누군가 리뷰를 쓰긴 쓰는 사람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더랬는데... 역시 있으시네요. ^^

blanca 2012-01-12 22:22   좋아요 0 | URL
^^;; 다른 분들이 읽고 더 좋은 리뷰를 써 주기를 바랍니다.

2012-01-12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13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2-01-12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국에서는 워낙에 유명한 소설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거 같아요.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버지니아 울프 이외에는 국내에서 외국 여성작가의 영향력이 미미하니까요.
이 작품이 문학동네 전집 일부로 출간되었군요, 블랑카님 글 덕분에 알게 되었네요.
저도 이 책 읽어볼께요 ^^

blanca 2012-01-13 22:20   좋아요 0 | URL
아, 이게 프랑스에서는 공무원 시험에도 나오는 책이라고 하더라고요. 반사르코지의 아이콘 같은 책이기도 하다네요. 저는 몰랐어요. 예, 한번 읽어 보시고 저와는 또다른 감상을 들려주세요.

비로그인 2012-01-13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럴 때 차에서 바로 내립니다.

blanca 2012-01-13 22:27   좋아요 0 | URL
쥬드님, 처음에 무슨 얘기인가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