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 보려고요?

그럼 이걸로 봐요.

 

글자가 내 손톱의 반만한 활자로 그득차 있고 종이도 이미 누렇게 변해버린 <김약국의 딸들>을 내밀자 사서는 분주해진다. 바로 자리를 찾아 글자 크기는 두배요, 분량은 반에 삽화까지 있는 또다른 <김약국의 딸들>을 내민다.

 

원래 내가 읽으려고 했던 책은 이 책이었다.

 

 

 

 

 

 

 

 

 

 

 

 

 

 

결국 내가 빌린 것은 이 책이다.

무언가를 강력하게 권유해 주는 사람 앞에서 매몰차게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망설이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나는 교과서 한국문학 시리즈 <김약국의 딸들>을 읽게 되었다. 사실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다. 지금 이 나이까지 와서 축약본을 읽는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고전들의 엉터리 축약본으로 허비한 시간들이 더없이 안타까운 터였다.

 

원래 책은 인물들도 서로 헷갈리고 조금 지루하기도 하고. 이건 재미있어요.

 

재미있었다. 축약본이라도 나의 저질 기억력으로 인물들은 여전히 헷갈렸다. 용숙, 용빈, 용란, 용옥, 용혜. 어떻게 안 헷갈릴 수가 있을까. 묘사나 설명은 사건의 긴박한 전개 뒤로 숨는다. 지루할 새도 없고 물론 음미할 여유도 없다. 장단이 있었지만 어렸을 때 나의 사념은 뒤로 하고 그저 이야기에만 한껏 열중할 수 있었던 독특한 즐거움이 돌아왔다. 부담스럽지 않게 무겁지 않게. 나는 <김약국의 딸들>을 읽었다고 스스로에게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딸아이는 태어난 지 만 4년이 되었다. 딸아이가 젖먹이 때부터 함께 한 친구와 영화관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팝콘을 사고 콜라를 얻어 먹고 돌덩이 같은 소세지를 넣은 핫도그를 우겨 넣으며 당당하게 영화관에 입성했다. 물론 주어는 '나'다.

 

<작은  것들의 신>에서 여덟 살의 라헬은 접혀 있는 시트와 등받이 사이에서 샌드위치처럼 끼여 다리 사이로 영화를 보았다,고 했다. 그러니 고작 만 네 살의 아이는 아무리 노력하고 다리를 버둥거려도 계속 시트와 등받이 사이에 끼일 수밖에. 어린이용 쿠션을 올려 주어도 무게 중심이 안잡혀 아이의 의자는 수시로 접혔다. 반복적으로 오른손으로 의자를 눌러 주어야 했다. 여하튼 엄마는 신이 났다. 팝콘을 마시고 콜라를 들이부으며 아이들보다 더 웃어댔다. 크리스마스. 여섯 살 정도까지 믿었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에 선물이 있었던 기억은 없었지만.

 

엘프들을 거느리고 최첨단으로 무장한 선물 배달 시스템에서 누락된 한 아이에게 선물을 제때에 전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아더의 이야기. 결국 아더는 이미 은퇴하고 퇴물 취급을 받는 할아버지 산타의 도움을 받아 미션 성공. 놓친 것들은 결국 다시 찾아야 한다고 한다.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다시 여섯 살이 된 걸까? 옆에는 이제 그 나이가 될 딸애가 짧은 다리를 버둥대며 정말 웃겨서 웃는 것인지 그저 친구와 영화관에 왔다는 사실에 감격한 것인지 신나게 웃고 있는데.

 

나도 누락되었던 한 아이 같은데. 긁적 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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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2-09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축약본, 정말 싫은데....
지루하고 늘어져도 원본 그래도, 작가의 향기를 맡고 싶은데, 아마 블랑카님도 그러시겠죠?
그런데 말씀을 못 하셨단 말이죠, 아아 못살아.

아더 크리스마스 보셨어요? 블랑카님, 저는 겨울 방학 계획 신나게 세웠어요.
1월에 `장화신은 고양이` 개봉한다는데, 슈렉에 나온 그녀석이네요.
꼭 보러가야겠어요, 예고편 봤는데 그 초롱한 눈망울로 하는 앙큼한 짓이란!

blanca 2011-12-09 20:57   좋아요 0 | URL
마고님, 이 영화는 크리스마스 기분 한껏 느낄 수 있어요. 코알라양은 이제 진짜 친구처럼 함께 다니실 수 있어 공연도 보실 수 있겠고 여행도 같이 갈 수 있고. 겨울이 외롭지 않으시겠어요. 그런데 슈렉에 나온 그 눈망울 포스 짱인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라는 거예요? 갑자기 그 고양이가 두 발 모으며 반짝반짝 눈 빛내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ㅋㅋㅋ

아이리시스 2011-12-09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10년전에 산 윗책 있는데, 어딘가에 박혀 있는데, 예전에 아침연속극으로 했을 때는 딸의 이름이 안헷갈렸거든요. 이젠 헷갈릴 것 같아요.

정말 웃겨서 웃는 것인지ㅋㅋㅋ 만 사년이면 생일이잖아요. 공주님께 생일추카 전해주세요.^^

blanca 2011-12-09 20:58   좋아요 0 | URL
저는 이제 모든 소설의 주인공들과 주변 인물들 이름이 헷갈려요. 심각합니다.--;; 등장인물이 많으면 정신을 못 차리겠어요. 차라리 대하소설 같은 경우는 워낙 반복해서 나오니 더 기억이 잘 나는 것 같고요. 드라마로도 했었군요!

순오기 2011-12-10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약국의 딸들은 님이 보시려던 그 책으로 보셔야 해요.ㅜㅜ
다섯 딸들이 쫒는 것이 확실히 구별되는데도 이름은 헷갈리는군요.ㅋㅋ
돌림자 이름의 폐해라고 생각돼요.^^

분홍공주가 이제 다섯 살이 되었군요, 늦었지만 생일 축하!!
누락된 아이~~~~~~~ 왠지 공감되는 느낌!^^

blanca 2011-12-10 21:50   좋아요 0 | URL
아, 축약본으로 읽어버리니 원전을 다시 읽게 될까 난망시됩니다. 이런 게 폐해군요. 요새 저는 인물이 많은 소설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도무지 쫓아갈 수가 없답니다. 분홍공주는 만 네 돌을 넘은지 한달이면 여섯 살이 되는 억울한 12월생이랍니다. 감사드려요^^

노이에자이트 2011-12-11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남에서 나온 것은 가로줄이라서 읽기 불편할 정도는 아닐 겁니다.다시 한 번 도전해 보세요.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세로줄에 나남 것보다 활자가 더 작은 걸요.

그리고 이 소설이 상상 외로 막장 드라마 같은 장면이 많아서 청소년용 삭제판으로는 그 맛을 느낄 수 없어요.

blanca 2011-12-11 22:32   좋아요 0 | URL
노자님, 맞아요. 이 소설이 오싹한 장면들이 많더라고요. 살해 장면도 있고. 청소년용으로 개작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게다가 중학생 대상책이었고요--;; 세로줄로 읽으셨다고요? 노자님은 우리 문학도 거의 다 섭렵하신 것 같아요. 대단합니다. 그리고 다 기억하신다는 것도요. 저는 제가 읽은 책도 제가 읽었는지도 모르는 지경이랍니다.

프레이야 2011-12-12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를 언제까지 믿느냐 하는 걸로 사람의 순수성을 좀 가늠해볼 수도 있을까요? ㅎㅎ
남중학생 조카는 아직도 믿는대요. 제 엄마와 암묵적으로 믿는 척하며 온기를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요.^^
늘 느끼는 거지만 만 4살이 된 분홍공주는 무척 영리한 아이일 것 같다는 느낌이에요.
큰딸도 연말에 태어났는데 이번 생일은 좀 특별할 것 같기도하고 뭐 그래요.^^

blanca 2011-12-12 21:59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님 따님도 연말에 태어났군요. 지금은 엄청 손해보는 것 같기도 하고 친구들이 다 언니, 오빠들 같아서 아쉬울 때도 있지만 크면 상관없어지겠죠?^^ 크리스마스를 아직 믿는 중학생. 부러운걸요. 믿는 체로 그렇게 엄마랑 공모, 교감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저도 믿고 싶어요^^

노이에자이트 2011-12-13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낙 극단적이고 자극적이라서 기억하고 있어요.박경리 소설 중 히스테리칼한 분위기가 가장 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처음엔 이상했지만 참으면서 읽으니 세로줄도 읽을 수 있게 되었어요.

blanca 2011-12-13 23:40   좋아요 0 | URL
사건 위주로 축약하면 더 분위기가 음산해지더라고요. 저는 세로줄은 긴 막대 자 없으면 못 읽어요^^;;

잘잘라 2011-12-1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분명히 저기 맨 위에 나남 가로줄 사서 읽었는데, 영풍문고 종로점에서 현금 주고 사서 읽었는데, 아... 내용이 전혀 기억이 안나요. 기억력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듯.. ㅠㅠ 아아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정말 사긴 샀던가? 읽긴 읽었던가?` 헤깔리기 시작했어요. 『보이지 않는 고릴라』 부작용인듯합니다요. 에구.. (찾아보니 책은 있어요. 제 책도 누~렇게^^;;)

기억에서 누락된 김약국의 딸들, 음, 다시 읽어볼까요? 긁적-

blanca 2011-12-15 19:54   좋아요 0 | URL
저는 요새 책을 읽고 돌아서면 아니 뒷부분에만 가도 앞부분 내용이 가물가물하답니다.--;; 아무리 고운 책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속지가 누렇게 변해서 속상해요.

2011-12-15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5 1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1-12-17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들릅니다. 아더 크리스마스 재미있나요?

blanca 2011-12-19 09:21   좋아요 0 | URL
saint236님 딱 크리스마스 주간에 봐주셔야 해요^^ 동심으로 돌아가 산타클로스에 대한 꿈을 마구 꿀 수 있답니다. 재미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