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9
패니 플래그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에벌린은 차를 세우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설움에 복받쳐 흐느끼면서. 왜 사람은 늙고 죽어야먄 하는 걸까. 
p.500

사람은 늙고 죽는다. 이 명제는 언제나 '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명제를 자주 잊어 버리고 자신은 예외라고 착각하고 이따금 떠올리고 그러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가 바스라지고 소멸된다고 항상 떠올리며 숨을 쉰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어느 정도 잔인하고 가혹하다. 아름다운 것들, 소중한 것들이 퇴락하고 사라지는 시간을 무방비 상태로 체험하게 된다. 벌써 2011년을 보내고 있는 우리는 1980년대의 시간에서 되짚는 1930년대의 얘기를 듣게 된다. 근시로 살았던 관성 덕택에 갑자기 높은 곳에서 조망하게 되는 삶의 정경에 멀미가 날런지도 모른다. 삶과 사람들을 내려다 보는 위치는 언제나 허락되는 게 아니다. 모르는 체로 때로는 알면서도 기만하며 살아가는 게 생이니까. 

여든 여섯 살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그게 난 어떤 차이도 느끼지 못해요. 전에도 말한 것처럼 그건 아주 살금살금 다가오죠. 어떤 날엔 젊었는데 다음 날엔 가슴과 턱이 처지고 어느 샌가 고무 거들을 입고 있어요.
-p.293 

나보다 열 살이 넘게 어린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식당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없었다. 정말 걔들은 '아이'처럼 보였다. 스무 살이었던 스물두 살이었던 나의 모습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여든여섯 살이 될 것이고 지금의 모습을 한 여자를 아이라고 느낄까? 육십 후반의 할머니가 오십 중반의 아줌마를 보고 "젊어서 좋겠다"고 부러워하던 정경이 떠올랐다. 여기저기서 튀어 나오는 과거의 나의 모습들은 각자 다른 독립된 개체들처럼 와글거린다. 지금 살고 있는 게 삶인 건지,과거의 그 통제 안되던 정열과 순정 들이 진짜 삶인 건지 도통 구분이 안 간다.  

끊임없이 남들의 시선, 단것들, 무력감들, 굴욕, 체념에 시달리는 중년의 여자 에벌린은 시어머니가 있는 요양 병원에서 여든 여섯 살이 된다는 것의 느낌을 기탄없이 얘기해 줄 수 있던 니니를 만나 그녀가 얘기해 주는 휘슬스톱 까페의 두 여주인 이지와 루스의 삶을 듣게 된다. 휘슬스톱 까페에서는 남녀의 차이, 흑백 인종의 차별, 빈부의 격차, 연령의 구분 등 모든 인위적인 대단찮은 경계가 모호해진다. 배고픈 사람, 상실감과 상처로 마음이 다친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의 사연을 경청하는 그곳은 작가가 '나의 사람들' '나의 고향'이라 지칭했던 곳의 은유이기도 하다.   

여자와 흑인과 노인과 부랑자들에 대한 얘기. 서로 토닥이며 전진하는 그 여정에 대한 복기. 들여다 보면서 몇 번이고 설움이 복받쳐 흐느끼지 않을 수 없는 우리들. 왜 사람은 늙고 죽어야만 하는 걸까. 영원히 물음표로 남을 질문을 가슴에 품고 마침표를 찍고 말 것을 알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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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5-03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아주 살금살금 다가오죠. 정말요. 아... 너무나도 딱 맞는 '살금살금'
이것보세요. 전 이거 영화로 봤는데 기억이 하나도 안나잖아요. ㅜㅜ
어떤 나이는 살금살금 다가오고, 어떤 기억은 연기처럼 날아가고..
그러니까 어떤 기억은 사라지지 않도록 자꾸 얘기하고 또 얘기해서 언제고 얘기할 수 있도록 잘 가꿔야겠다는 생각하면서 오늘 밤은 blanca님께 굿나잇~ 인사하고 물러갑니다.

blanca 2011-05-03 10:19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케시베이츠가 무언가를 막 먹으면서 니니 할머니의 얘기를 듣던 그 장면 정도가 기억에 남네요. 굿모닝 인사 해야 시점에서 메리포핀스 님의 굿나잇 인사를 들으니 재미있네요^^ 오늘은 황사가 좀 걷혔으면 좋겠어요.

oren 2011-05-03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록 영화속의 얘기일지는 몰라도) 주인공 '이지'를 보면, 비록 쇠락과 소멸을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며 요양병원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 80대의 노인일지라도, '달콤한 벌꿀을 위해 겂없이 벌집을 건드리는' 20대 젊은이의 활기 속에서 얼마든지 삶을 살아갈 수도 있겠다는 희망도 품어보게 됩니다. 비록 그 나이에 그렇게 젊게 산다는 건 그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 * *

최악의 경우 세계가 단 하나의 출구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출구와 그것을 통해 세계를 벗어나는 것의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문이 방의 일부이듯이, 세계를 벗어나는 것도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이다.

우리는 마치 궤도가 이미 결정되어 있는 탄환처럼 실존 속에 발사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이 세계 - 세계는 항상 여기 지금의 세계다 - 에 떨어질 때 짊어진 운명은 그와 정반대다. 우리에게 부과된 것은 하나의 궤도가 아니라 여러 개의 궤도이며, 따라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얼마나 놀라운 조건인가! 산다는 것은 우리가 자유를 행사하고 우리의 위치를 이 세계 속에서 선택하도록 운명적으로 강요받았음을 느끼는 것이다. 한 순간도 우리의 선택 행위를 쉬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낙담하여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에 빠진 경우조차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선택을 한 것이다.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대중의 반역』中에서

blanca 2011-05-03 10:20   좋아요 0 | URL
아, 이 글 너무너무 좋아요.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이름도 무지 길고 어렵네요^^;; 근사한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저한테 꼭 필요한 얘기이군요.

turnleft 2011-05-03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페이지 수가 만만치 않네요. 이젠 나이가 들어서(쿨럭;;) 그런지 300 페이지 넘어가면 힘에 부친다는 기분이 들더군요..;;

blanca 2011-05-03 10:23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저도 그래요. 막상 받아보고 완전 쫄았었잖아요. 저도 두꺼운 책은 이제 힘에 부쳐서요. 하지만 이 책은 두꺼울 수밖에 없겠더라구요. 찬찬히 그냥 곁에 두고 야금야금 읽다 보면 그 시간의 흐름과 공간을 이렇게 형상화할 수밖에 없었겠다, 싶은 생각이...

턴레프트님, 그 ireaditnow 어플 메일로 백업할 때 별점과 읽은 기간은 안 되는 게 넘 아쉬워요. (자꾸 부담 드려 죄송합니다.^^;;)

비로그인 2011-05-03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늙는다는 일이 서러운 것은, 늙음 그 자체가 아닐 거라 생각했어요. 겉과 따로 노는 마음이 더 슬플 거라고.
이렇게 늙어도 지혜롭지 못하고, 주변에서는 지혜를 바라고, 마음은 여전히 젊은 어느 자락에 머물러 있는 것이 비극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 글을 읽으니 그럴 것 같아요. 늙음은 그 자체로 슬픕니다. 그게 아무리 자연의 일이라도.

blanca 2011-05-03 10:25   좋아요 0 | URL
저는 나이 드는 게 좋다,고 얘기하는 연예인들 얘기를 별로 신뢰할 수 없어요. 물론 저도 나이 들면서 성숙한 면도 있고 그 때의 그 좌충우돌과 넘치는 열정, 오만이 희석되어 좀 편안하기도 하지만 그게 과연 좋다,고 뭉뚱그려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들어요. 맞아요. 저는 그래도 젊음이 좋아요. 죽음을 기다리고 나의 인생을 돌아보며 충만감을 느낄 정말 멋진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싶어서요. 죽는 건 항상 두렵잖아요. 결국 이별이니까요.

마녀고양이 2011-05-03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이 책 너무 좋아하잖아요.
10여년도 전에 이 책 사서, 다섯번은 읽은 것 같아요. 첫 페이지의 휫슬 스톱 카페 메뉴가 너무 좋아요.
이상하게 향수를 느끼죠, 이 책을 읽다보면. 나도 그렇게 사람과 지지고 볶고 살고 싶다는 환상도 가지게 되고.

영화도 좋아해요.
아마......... 그런 진정한 관계가 부러운가봐요.

blanca 2011-05-03 23:17   좋아요 0 | URL
다섯 번이나요? 이 두꺼운 책을요! 마고님 앞에 넙죽 엎드립니다.^^;; 아, 저도 그래요. 저도 그런 관계가 부러워요. 영화도 한 번 봤는데 너무 뇌리에 깊이 박혀 있어요. 니니 역을 맡았던 할머니는 아주 예전에 돌아가셨더라구요. 괜히 또 한 번 더 짠했어요.

반딧불이 2011-05-03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로 본 것 같은데 책도 있군요. 나이 든다는 거, 참 생각도 많아지고 할 말도 많은 그런 말이에요.

blanca 2011-05-03 23:17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맞아요. 무언가를 점점 더 알아가는 건지 잃어버리는 건지 감도 못 잡겠구요. 저는 이따금씩 늙어 죽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답니다.

2011-05-06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6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5-06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방송에서 이 영화를 종종 볼 수 있었죠.그 할머니 역 맡은 제시카 탠디는 1994년 타계했군요.

blanca 2011-05-06 22:01   좋아요 0 | URL
노자님, 저도 안 그래도 찾아 봤어요. 그 할머니 참 고왔죠.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라는 영화에도 나왔었어요.

노이에자이트 2011-05-07 15:06   좋아요 0 | URL
미스 데이지 역으로 역대 최고령 아카데미 주연상을 탔더군요.

비로그인 2011-05-19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음표 마침표가 또 이렇게 바뀌어 blanca님 얘기를 풀어주네요.
물음표 마침표.
이 간단한 부호가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쓰인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같은 책은 아니더라도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 방 구석에 몇 권 있는 것 같은데 좀 들춰봐야겠습니다.

blanca 2011-05-19 11:17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이게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인 줄도 모르고 손에 쥐었었어요. 길고 참 저릿한 소설이었답니다. 이런 시간과 공간을 길게 마구 늘인 것 같은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삶과 생,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잠시 멈추고 곱씹어 볼 수 있어 참 좋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