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추장스럽다고 오래된 스피커를 내다 버린 후 컴퓨터가 시위하듯 입을 닫았다. 오디오 드라이버도 다시 깔고 다른 스피커도 연결해 보며 낑낑대던 남편은 손을 들어 버렸다. 갑자기 들어야 하고 듣고 싶은 것들이 산처럼 쌓였다. 순한 학생처럼 네이넘의 지식인에서 하라는 대로 다 해봐도 묵묵부답이다. 연두색 출력 단자. 이거 맞는데. 갑자기 본체 컴컴한 뒷편에도 연두색 출력 단자가 있나 찾아 본다. 있다! 이어폰 꽂는 데에다 떡하니 연결해 놓고 소리 안 나온다고 주변에 호소하고 다녔다. 도와준다고 약속했던 제부가 왔으면 거하게 망신살 뻗칠 뻔 했다. 기본 중의 기본도 제대로 모르고 놓치고 마는 것들. 이런 것들이 아찔하다. 바보 같다. 

그리고 정말 보고 싶었는데 볼 수 없었던 영화 <시>의 초입부를 보기 시작했다. 벌써 새벽 한 시. 전날에도 <유령작가>를 새벽 세 시까지 보고 연달아 달린다. 영화관에 가 본 지가 사 년이다. 주위에서 <아바타>로 들썩일 때는 소외감을 느꼈다. 다들 알고 얘기하고 즐거워하는 것들에서 물러나는 것은 우울하고 쓸쓸한 일이다. 아이를 가지고 낳고 키우며 영화관을 가지 못하고 가지 않은 것은 게으름과 귀찮음을 숨기기 위한 변명거리일지도 모른다.  

 

시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힘든 시대다. 시를 읽는 사람들이 귀해진 시대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국어 수업 시간, 소설가였던 선생님은 윤동주의 시를 적어주시곤 했다. 아이들은 마치 가수에게 노래를 조르듯 수업 시작 전 시를 조르는 습관을 들였다. 화석 같은 정경이다. 이 영화에는 시를 조르는 할머니가 나온다. 같은 학교 여학생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고도 무감각한 외손자를 돌보고 반신불수 노인을 목욕시키러 다니는 미자 할머니. 자꾸 명사에서 미끄러져도 금새 작은 수첩에 시상을 메모하고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응시하느라 걷던 길을 멈추는 주책맞은 몽상가. 빛나고 생기어린 아름다움은 주름살 골에 희미하게 박혀 미끄러지고 있지만 가느다랗고 투명한 음색으로 종달새처럼 지저귀는 대배우의 넘치지 않는 연기와 아름답게 시간과 타협하는 법을 배워가는 듯한 모습은 절절하게 예뻤다.  

문화원에서 시작 강의를 받는 나이든 늦깎이 학생들의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회고하는 장면은 잊혀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유행가가사를 짚어가며 가르쳐 줬던 손녀는 할머니의 부재 앞에서 오열한다.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다,고 덤덤해했던 초로의 사내는 갑자기 지하에 살다 이천의 임대 아파트에 들어왔던 그 해방의 소박한 순간을 기억하며 전율한다. 봄에 비죽비죽 솟아 나오는 새순이 너무 이뻐서 쓰다듬어 주며 나이듦을 체감한다는 중년의 여인네는 누구와 닮아 있다. 내가 두고 갈 것들과 내가 가도 남을 것들은 순간을 더 고양시키고 서럽게 만든다. 소위 불륜에 빠져 아름답지만 너무 힘든 사랑을 하고 있다는 아주머니는 너무 아프다고 울먹인다. 

일상이 너무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그때는 몰랐다. 잠깐이라도 멈추고 싶은데 기착지의 막간은 너무나 짧다. 차창 뒤로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들이 애달프다. 가질 수 있는 것도 없고 영원한 것이 없음을 머리로는 아는데 자꾸 사소한 것들에 끄달린다. 매일 매일이 어리석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 같다.  

마지막 시작 강의 시간. 미자 할머니는 강사와의 약속을 지킨다. '아네스의 노래'라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하고 떠난다. 윤정희의 낭송은 갑자기 어린 소녀의 것으로 바뀐다. 죽은 그 아이다. 소녀와 할머니. 꿈 같은 만남. 아찔한 거리감. 사실 누구나 소녀였고 누구나 할머니로 죽는다. 어렸을 때 나는 우리 할머니가 할머니로 태어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할머니로 영원히 내 곁에 계실 거라고 참으로 지겹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가고 난 다음에서야 할머니도 소녀였다고 정말 그랬다고 그리고 나도 할머니가 되는 거라고 결국 그러고 말거라고, 지금 나를 미친듯이 사랑하는 이 어린 딸아이는 언젠가 그 시간들마저 다 잊어 버리는 때가 올 거라는 걸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엄마, 정말이지 세상에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들뿐이네요.'-사노 요코 <나의 엄마 시즈코상> 

어쩔 도리 없는 일들. 그리고 너무 이쁜 풍경들. 봄이 되면 더하겠지. 환장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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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2-06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성이 풍부한 소녀스럽고, 고운 할머니인데 현실이 참 팍팍하네요.
보면서 가슴 한 구석이 답답했습니다.
나이들수록 말을 아껴야 겠다는, 실없이 웃지 말아야 겠다는 생뚱맞은 생각을 했습니다.

blanca 2011-02-07 21:38   좋아요 0 | URL
세실님, 정말 그랬어요. 글구 아이가 나를 보고 웃어줄 때 그리고 나를 계속 부를 때 더 열심히 응해주리라고 결심도 했구요. 서글퍼지는 대목이 많더라구요. 제가 할머니한테 했던 행동들도 생각나고. 몇 번이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2-06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육방송 일요일 밤 11시 한국영화걸작선을 보면 정말 윤정희 씨 영화가 많음을 알 수 있어요.모두 젊은 시절 영화지요.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그런 영화를 꽤 보았답니다.특히 신성일과 주연한...그런데 저 영화 포스터...정말 많이 늙었군요.엉엉엉...미녀가 나이들면 더 슬퍼 보여요...구하라 누나도 늙겠지요.

blanca 2011-02-07 21:39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노자님, 정윤희 아세요? 저 하도 어른들한테 그녀 이쁘다,는 얘기 많이 들어 어제 검색해 보고 정말 반했답니다. 최고더라구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영화도 찾아 보고 싶었는데 EBS에서 해 줄 때 열심히 볼걸,하는 아쉬움이 남더라구요. 이쁜 사람들이 할머니가 되면 이목구비가 큼직하니까 더 확연히 늙어 보이는 것 맞는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1-02-07 21:43   좋아요 0 | URL
수애 씨가 정윤희 씨 비슷하다고 하지요.교육방송에서도 안성기 정윤희 주연의 안개마을을 가끔 방영합니다.제가 이 프로그램 덕에 60~80년대 영화를 좍 끼고 있지요.

비로그인 2011-02-07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령작가>는 저도 그 시간에 보았는데, <시>가 방영되었는지는 몰랐네요.
영화관에서 크레딧이 올라갈 때 모두들 야단 맞은 학생처럼 조용히 앉아 있던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호되게 야단 맞은 기분이었죠. 정말 좋은 영화입니다^^

blanca 2011-02-07 21:40   좋아요 0 | URL
후와님, 저 이틀 연속 새벽 세 시에 잤답니다.--;; <유령 작가>, <시> 둘 다 삶의 무자비한 잔혹성을 보여주는 영화였어요. 보고 나면 꼭 우울해지는.... 호되게 야단 맞은 기분... 맞아요.

마녀고양이 2011-02-07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힘든 시기라는 문구 절대 공감.

어느 시대나 그렇긴 하겠지만, 요즘은 특히 예술이 금전과 연결되어 힘든 시기죠.
대중에게 영합해야 하고, 하기사.. 인정받는다는 자체가 대중 인기 영합일까요? ㅠㅠ

순수한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정녕 힘든 시기인 요즘이지만, 그만큼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양면성도 바라봅니다. 아, 곧 봄이 되나요? 통영 다녀오면서, 통영의 봄빛을 맞으며, 그 생각했어요, 베란다 손질 좀 해야게따 하구.

blanca 2011-02-07 21:42   좋아요 0 | URL
시인들이 특히나 더 힘든 것 같더라구요. 인터뷰 기사 같은 것 읽으면. 이런 풍토에서는 대시인이 다시 나오기는 힘들겠지요. 통영의 봄빛,이라는 말이 하나의 시어 같아요. 너무 이쁘네요. 베란다. 생각하니 심란해지네요. 여긴 곰팡이가 멋지게 춤추고 있어서 락스로 뿌려 놓고 닫아 놓고 산답니다.--;;

2011-02-07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7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잘라 2011-02-07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조르는 할머니,,, 누구에게요?
결국 자기 자신에게요?
궁금해요.

봄, 오지 말라고 조르면 봄이 안 올까요.
봄, 어서 오라고 조르면 봄이 어서 와 줄까요.

blanca 2011-02-07 21:45   좋아요 0 | URL
미자 할머니는 시인을 보고도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냐고, 조르고 자기 자신에게도 끊임없이 조르다 한 편을 남기고 떠나요. 죽음을 암시하는 라스트 신이랍니다. 저는 올해부터 봄이 정말 정신 잃을 정도로 기다려지기도 하고 그래요. 이제 정말 좋은 줄을 알겠어요. 신기해요.

비로그인 2011-02-07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궁창 속에 발붙이고 서서, 무지개를 보더라.

-영화를 보신 저희 모친이 하신 말씀. 전 못봤습니다. 저 대신 보고 저 대신 허무하고 후련해 하셔서, 이러한 감상만을 빌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아직 안봤지요.

blanca 2011-02-07 21:46   좋아요 0 | URL
쥬드님의 언어감각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군요. 시궁창 속에 발붙이고 서서, 무지개를 보더라! 이 영화 보고 나면 참 쓸쓸해져요. 나라서 쓸쓸한 게 아니라 그냥 인간인 게 쓸쓸해져요. 다 불쌍하고 슬퍼요. 나이들고 죽음을 앞두고 망각으로 가면 결국 다 사라지고 마는건데 현생은 끊임없이 집착과 끄달림을 부르네요.

2011-02-07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7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02-0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우리딸이 말해줘서 꼭 보고 싶었는데 깜박했어요.ㅜㅜ
이상하게 '시'와 인연이 안 닿네요.
우리동네 극장에선 안했는데, 작년에 인천갔을 때 내가 다니던 극장에 걸려서 볼려고 했는데
그걸 보면 내가 뵙고 와야 될 분은 못 만나게 되고.... 갈등하다가 영화를 접고 그분을 뵙고 왔어요.
그래도 시를 본 것보다 그분을 뵙고 오기를 잘했다고 스스로 토닥여줬는데...

나도 시를 써본다고 우리동네 대학교사회교육원 시창작반에 디니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blanca 2011-02-08 21:18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꼭 보셔야 해요. 순오기님도 참 좋아하실 것 같아요. 시창작반에 다니셨어요? 우아, 그럼 더욱 더 보셔야겠어요. 시창작반 수강생들의 자기 삶 고백 장면은 정말 뭉클하더라구요.

카스피 2011-02-07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좋은 영화를 노쳤군요.신문을 안봐선지 요즘 통 TV에서 무슨 영화를 하는지 당최 알수 없어요ㅡ.ㅜ

blanca 2011-02-08 21:19   좋아요 0 | URL
저도 신문도 안 보고 티비도 잘 안 봐서 중요한 것들을 자꾸 놓쳐서 영화는 챙겨 보려고 해요. 안그러면 극장을 가야 하는데 쉽지 않아서요. '아프리카의 눈물' 같은 프로도 너무 좋더라구요.

꿈꾸는섬 2011-02-10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를 이번에 TV에서 보았어요. 애들 다 보내놓고 한가하게 영화구경해야하는데도 그게 잘 안되더라구요.
이 영화보고 정말 너무 좋았어요. 역시 이창동 감독이다 싶기도 했구요.

blanca 2011-02-10 13:42   좋아요 0 | URL
이창동 감독이 소설가 출신인 걸 몰랐어요. 정말 한 편의 시 같은 영화더라구요. 윤정희의 연기도 참 좋았구요. 구십 살까지 연기하겠다는 꿈 이루어질 것 같아요. 저는 갑자기 이 시대의 배우들한테 필받아서 다 검색해 보고 그랬잖아요^^ 저는 지금 <블랙스완> 기대하고 있어요. 아이 유치원 가고 나면 저 사 년만에 처음으로 보는 영화가 된답니다!^^

꿈꾸는섬 2011-02-11 23:18   좋아요 0 | URL
이창동 감독의 소설도 전 참 좋았어요. 그동안 만들었던 작품들도 모두 좋았구요.
윤정희님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죠. 그 절제된 표정과 소녀같은 모습, 정말 멋졌어요.
아이 보내놓고 블랑카님의 자유를 만끽하시길...그런데 아이들 올 시간은 또 어찌 그리 빨리 오는지 모른답니다.ㅎㅎ

후애(厚愛) 2011-02-17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기회가 오면 영화 <시>를 보려고 합니다.^^
잘 지내시죠?

blanca 2011-02-17 23:05   좋아요 0 | URL
후애님도 참 좋아하실 거예요. 꼭 보실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잘 지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