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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무도 - 왜 우리는 호러 문화에 열광하는가
스티븐 킹 지음, 조재형 옮김 / 황금가지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제니퍼~ 제니퍼..."
초등학교 저학년 때 TV에서 방영된 한 편의 공포 영화로 나는 몇 날 며칠을 앓아야 했다. 가족이 함께 차를 타고 외출했던 길 두 동생이 장난으로 잠든 언니의 운동화 끈을 서로 묶어 둔 것이 차량 사고로 인해 차체에서 불이 나고 혼자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게 되는 사고로 이어진다. 그 후 그녀의 유령이 집안에서 출몰하는 괴괴한 영화였는데 침대 밑에서 동생 이름을 부르는 그 오싹한 목소리와 사악한 웃음이 내내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나의 눈과 귀에 달라 붙었다. 한 마디로 죽을 노릇이었다. 잠자리에서 몸을 뒤챌 때 내가 내는 소리마저 외부에서 들려오는 무시무시한 사각거림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나는 공포 영화를 더욱 찾아 보며 의도적으로 그 음습한 두려움을 불러오는 악순환에 빠져 버렸다. 무서운데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성인이 된 이후로도 그러한 경향은 계속되었다. 전문적으로 공포,환상 영화, 소설의 계보를 꿸 정도로 제대로 된 장르팬이 아니라 중구난방으로 극렬한 두려움을 줄 수 있는 영화를 찾아 헤매는 한 마디로 속수무책의 괴이한 관람자였다. 그러던 것이 공포 영화를 단칼에 끊게 된 계기가 공수창 감독의 <알포인트>였다.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그 영화는 공포를 일으키는 실체를 슬쩍 숨기고 병사들의 공포감 자체를 영상 안에 가두는 방식으로 관객의 심리적 급소를 누르고 있었다. 사라지는 병사들. 남은 병사들이 느끼는 공포와 고립감 등이 절정에 치닫다 모호하고 열린 결말을 남긴 채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던 그 스크린에서는 금방이라도 그 두려움의 실체들이 뛰어나와 내 몸에 엉길 것 같았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후 일주일을 나는 엄마와 함께 잤다.
이 책은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나의 과거를 다른 전문가로부터 해명받기를 원하는 마음 반, 스티븐 킹이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범퍼가 없을 것 같은 기발한 재치, 익살의 직설화법에 대한 기대 반으로 출발했다. 그러니까 내가 왜 그런 공포 영화들을 불편한 감정임에도 끊임없이 찾아 헤매었으며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장르에 열광하고 있나,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조금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이미 맛보았던 그의 명쾌하고 유머러스한 화법은 은근 중독성이 있다. 게다가 그가 그런 가벼운 입담에만 의지하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여러 작품으로 증빙된 바 있지 않은가. <스탠 바이 미> 같은 자전적 유년 회고담 같은 소설은 그가 책을 너무 많이 팔아서 되레 적절한 문학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작이다. 사고로 죽은 아이의 시체를 찾아 떠나는 소년들의 좀 영악해 봬기도 하는 탐험기는 묘하게 이 책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
<죽음의 무도>는 공포스러운 것을 찾아 헤매는 우리들의 그 심리적 유인을 탐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미국의 공포 장르의 계보를 스티븐 킹의 안내로 따라가 보는 여정에 더 가깝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공포 장르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다면(사실 있어도 제대로 계보를 꿰고 있기는 해야 한다) 그 수많은 공포 환상 소설 작가군들과 그들의 생소한 작품들, 미국 TV 시리즈물, 영화들의 고유 명사에 질식해 버릴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다분히 전문적이고 장르적이라는 것을 알고 들어가야 갑자기 중반부에서 미로에서 길을 잃고 만 것 같은 망연함에 맞닦뜨리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길을 잃었다. 그것도 여러 번. 그럼에도 스티븐 킹의 간명한 직설화법과 독설은 길 잃은 양을 채근질해 목적지로 데려다 놓지 않고는 못 배길 만한 것이었다. 덧붙여 스티븐 킹은 결국 이 책에서 공포 장르에 시시때때로 쏟아지는 도덕성 논란에 대한 해명과 공포 장르가 가지는 독자적 가치에 대한 강변에 목소리를 돋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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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괴물스러움이라는 개념을 사랑하고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열망하는 질서의 재확인인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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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영화를 보고 공포 장르 책을 읽는 것은 그 가상의 체험을 통해 우리의 디오니소스적 면면에 대한 해방과 괴이한 상처를 절개함으로써 일상에서 더욱더 건강해지는 것이다,라는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조할 수는 없지만 무서운 이야기에 열광하는 우리들의 심리에 일견 변명거리를 안겨다 주는 면도 있다. 그러나 군데 군데 드러나는 그의 보수적인 정치 논객으로서의 면면과(베트남전을 선한 의도에서 나온 전쟁이라고 언급, 이란 지도자를 줄곧 조롱하는 대목 등) 팍스 아메리카나의 우월감을 묘하게 흘려놓는 모습은 거부감이 일었다. 게다가 코드가 맞지 않거나 스스로의 기준에 함량 미달이라고 생각되는 다른 작가군들을 신랄하게 욕하고 비평가들에게 악담을 반복하여 퍼붓는 모습은 불편하기조차 했다. 호불호가 확 갈리는 성향인 듯 <화성연대기>의 레이 브레드버리는 신이 그를 창조하고 거푸집을 부서뜨려 버렸다고 극찬하고, 시드니 셀던 같은 작가는 똥멸치 피자와 균형 잡힌 피자의 차이점도 모른다고 비아냥거린다. (더한 얘기도 많다)
공포 이야기의 최대 관객은 어린이라는 그의 얘기는 그 두렵고 무서운 것들에 이끌려 상상과 실재를 뒤섞어 버리는 유년 시절에 대한 향수로 이어진다. 이 책은 공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우리 내면의 어린 아이가 주도했던 그 환상의 세계에 대한 복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어우러짐이 이 책의 미덕이기도 하다. <스탠 바이 미>의 소년들은 이 책에서도 뛰놀고 있는 것이다. 상상력의 근육이 나날이 굳어가는 어른인 우리는 스티븐 킹한테 끝장이라는 독설을 들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펀치를 한 대 얻어 맞아도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의 저력이기도 하다. 욕쟁이 할머니의 식당에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모습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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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내가 작별 키스 대신 당신에게 남기고 싶은 것이 바로 그 단어인 것 같다. 어린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우러러 보는 그 단어. 어른이 된 우리들이 이야기 속에서만...... 그리고 꿈속에서만 참된 의미를 재발견하는 그 단어.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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