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절대적으로 사랑해 준 사람이 있다. 허리가 기역자로 굽고 빙그레 웃으면 입 주변의 주름이 동심원처럼 몇 겹의 파문으로 번지던 그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할머니는 하필 내가 스무 살 오월이 되던 해 생을 마감하셨다. 

나는 당시 한 사람에게 흠뻑 빠져 있었고 그 달뜬 마음이 할머니의 상실을 눌러 버렸다. 가없는 내리사랑의 스러짐은 그런 식으로 폄하되었다. 말기암 치매까지 온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목욕시켜드리던 날 할머니는 또렷하게 나를 바라보시며 고맙다, 고 되뇌셨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마지막은 그렇게 뒤집힌 고마움의 인사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결혼하여 할머니가 고장난 녹음테이프처럼 아쉬워하며 끊임없이 재생하던 그 서너 살 무렵의 사랑스러움을 딸을 통해 경험하고 있다. 나는 거꾸로 가고 있다. 하루 하루가 갈수록 할머니에 대한 절절한 추억의 무게와 애착의 깊이는 더해만 간다. 또 복기하고 또 복기하며 나는 나와 할머니를 다시 읽는다. 때로는 초등학생의 나와 할머니로, 여섯 일곱 살 무렵의 그 모습으로 끊임없이 손녀와 할머니의 해후는 반복된다. 그리고 말줄임표. 그럼에도  할머니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의 허망함은 그런 식으로 허리가 동강 잘린다. 할머니는 이제 안 계신다. 내 곁에.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가없는 고마움과 미안함의 표현을 되돌려 줄 상대는 가버리고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다 떠난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 존재의 필멸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 '내'가 '너'가 죽는다는 것. 그리고 철저하게 죽음의 피동으로 먹인다는 것. 몸부림치며 결국 그렇게 허무하게 스러지고 말것이라는 것. 이런 참혹하고 무의미한 결말이 어디 있는가. 이 단순명료한 명제에 맞닥뜨리면 결국 무의미와 화해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얼마나 가혹한 과정인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죽음과 화해하지 못한 작가들의 얘기다. 이 책 두 권은 죽음 앞에서 얼마나 인간이 철저하게 무기력하고 무방비인지를 저릿하게 응시하게 된다. 유명 작가들은 삶의 비밀을 범인들보다 더 예리하게 해독했다,고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허무와 무의미를 더욱 적너라하게 파헤치고 죽음과 화해할 수 있을듯 한데 도리어 역설적으로 더욱더 죽음에 후달린다. '나'는 '특별하다'는 느낌이 '무의미'와 조우할 수 있는 지점은 망상이자 착각인 것 같다. 삶에 관조적인 모습들이 삶에 대한 집착과 반드시 유리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어쩌면 유달리 삶에 관조적인 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생의 절실함의 근거로 끌어 와 쓰는 것이 아니라 생의 허무감과 욕망의 충족을 정당화하는 데에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한 대가는 가혹하다. 그들은 대부분 죽는 순간까지 납득하지 못했다. 죽음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자살을 한 방편으로 택하더라도 결국 인간은 죽음 앞에 영원히 피동적이다,는 예시의 제물로 바쳐지기도 한다.

 

죽음을 통제한 유일한 사례로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콧 니어링이 곡기를 스스로 끊고 죽어가며 마지막에 뱉은 말은 "좋-아."였다. 삶이 아무리 고해라도 그것을 함부로 취급하는 것은 거부감이 든다. 우리는 생의 숨결을 받은 이상 사려깊고 소중하게 그것을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소중히 대우하고 근시안적 욕망의 충족을 절제하며 죽어가는 과정까지 배우려 했던 스콧 니어링의 삶은 우리가 죽음을 기쁘게 맞이할 수도 있는 가능성의 통로를 열어준다. 반드시 비참하게 무기력하게 안끌려가려 발버둥치며 죽음의 손아귀에 우리 목덜미를 쥐어주지 않아도 되는 행운은 바로 그것의 일란성 쌍둥이인 삶을 대접하는 자세를 통해 주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때늦은 애도는 평론가 신형철의 글을 읽으며 위로 받았다. 마치 나를 향해 돌아앉아 토닥토닥 나의 뒤늦은 애도를 도닥여 주는 느낌이었다. 끝나지 않은 슬픔은 병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이라고, 덧붙여가며. 그리고 그의 이 문장은 내 가슴의 생채기에 날아와 박혔다.  

   
 

한 사람의 죽음을 가장 충실하게 애도하는 길은 그 죽음 이전으로 더이상 돌아갈 수 없도록 나 자신의 삶을 바꾸는 데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누구도 너무 많이 애도할 수는 없다> 중 

 
   

나는 바뀔 것이다. 가슴으로 끊임없이 할머니에 대한 회한을 간직한 채로. 사랑한다,는 고맙다, 는 말은 언제나 해도 모자라고 늦다. 서둘러 많이 하고 볼 일이다. 생을 열심히 긍정하며 살아 가련다. 그것이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나 보낸 그 분과 나에게 뚜벅뚜벅 천천히 걸어 오고 있는 죽음에 대한 진정한 예우일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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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27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이라는 것이 삶의 의지를 더 불태울 수 있져, 아이러니하지만~
ㅎㅎ아이고 아름다워라, 페이퍼가!

blanca 2010-09-28 21:45   좋아요 0 | URL
마기님 그새 퍼스나콘이 또 바뀌었어요. 사랑스러운 소녀...예, 그래서 결국 죽음을 정말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진정한 긍정론자가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비관주의에 이끌렸는데 이제는 해가 갈수록 더 낙천적이 되고 싶어져요. 나잇살이 주는 긍정의 에너지도 있나 봐요^^;;

양철나무꾼 2010-09-27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대접할 건 어쩜 죽음만이 아닐지도 몰라요~
삶도 따박따박 눌러살 듯,꼭꼭 씹어 삼키듯 대접해줘야 할지도 몰라요~

전 친할머니 밑에서,할머니 치마폭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제 걱정하시느라,쉬이 눈을 못 감으셨어요.

어쩜,전 할머니 때문에라도 따박따박 사는지도 모르겠어요.

글이 제 마음의 빗장을 툭 하고 벗겨 냈어요.
눈물을 좀 흘리겠지만,
한동안 좀 아프겠지만,
나쁘지 않네요~~~^^

blanca 2010-09-28 21:46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할머니 얘기는 언제나 저를 아프게 합니다. 친할머니 아래 계셨다면 양철나무꾼님은 더욱더 그러시겠어요. 그럼요. 결국 오늘의 나를 거슬러 올라가면 또 할머니와 만날 수밖에 없어요. 열심히 행복하게 사는 게 진정한 애도인 것 같아요.

2010-09-28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8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0-09-28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에 대한 예우, 좋은 페이퍼에 생각이 깊어지는 밤이에요.
블랑카님, 내리사랑은 참 크고 깊은 것 같아요.
제 첫딸이 생후 2개월될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제가 아이를 낳았다고 참 신기해하며 안쓰러워하셨던 분이에요.
사춘기시절, 대학생 시절, 제 깃털같은 성정이 몸서리치게 힘들 때면 할머니집 아랫목이 기어들어가
뜨근하게 이불 쓰고 한숨 자고 나면 풀리곤 했지요. 그리워라.
된장찌게랑 밥한그릇 차려주시며 무조건 내편이 되어주던 분. 아무 말씀 없이도요.

blanca 2010-09-28 21:4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그리워라. 이 말 콧잔등이 시큰해져요. 워라. 저희 할머니도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셨어요. 정말 너무 많이 늙으셨던 할머니라 더 애잔해요. 손녀의 타박을 다 받아주시고 마지막까지 고맙다, 하고 가신 분. 저는 이 생에서 할머니에 대한 빚을 다 갚지 못할듯 싶어요.

마녀고양이 2010-09-28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까 블랑카님. 언니같은 '나'를 만나러 시간을 빨랑 내란 말이예요! ㅋㅋ

참 좋은 페이퍼예요. 죽음이란 항상 생각을 깊어지게 만들죠.
제대로 된 삶을 살아야, 죽음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죽음에 연연하여, 질질 끌려간 삶을 살면 더욱 회한과 분노가 일지도.

스콧 니어링의 이야기를 읽으니, 문득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이 생각나요.
큰 스님 돌아가시는 장면이.
얼마 전부터 DVD로 사려고 찾는 중인데, 절판이네요. ㅠ

blanca 2010-09-28 21:50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ㅋㅋㅋ 올해 안에는 꼭 뵈요!! 껌딱지를 좀 간수해 달라고 옆지기나 친정엄마를 좀 구워삶아서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저 티비에서 중간부터 봤던 듯해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큰 스님 돌아가시는 장면이 있군요. 다시 제대로 보고 싶어져요. 아마 다시 티비나 케이블에서 상영해 주기를 기다려 봐야 할 듯해요.

마녀고양이 2010-09-29 11:36   좋아요 0 | URL
나는 그 이쁜 '껌딱지' 같이 나와도 괜찮은뎅! ^^

2010-09-28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8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10-09-28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가 농사를 지으셨나봐요. 기역자로 구부러지셨다고 하니.

저는 할머니의 사랑을 님처럼 그렇게 못 받고 자랐어요. 고부간의 갈등이 말도 못했거든요. 하핫, 고부간의 갈등이야기하라고 하면 말 그대로 앤드리스에요. 저의 할머니가 94세로 돌아가실 때 임종을 저의 손녀들이 했어요. 엄마가 할머니한테 당한 것이 많아 병상에 누워있는 할머니의 얼굴조차 보기 싫어했거든요. 돌아가실 무렵에 점차 몸이 차가워 지더라구요. 그래서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기는 했는데....떠나보내면서 어떤 말을 해 드려야할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저의 할머니는 오기와 고집이 대단해서 저의 엄마한테 절대 안 지려고 했어요. 그래서 딸들인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할머니에게 다정한 말 조차 하기가 힘들었거든요. 몸이 서서히 차가워진다는 것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떤 예우를 해 드려야할지.... 그걸 잘 몰랐어요.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차가운 몸을 어루만지며 눈을 감겨 들였는데......전 할머니 차라리 엄마한테 구박받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참...이상한게 할머니한테 연민의 정을 느껴 잘 해드리고 싶었지만....아, 지금 블랑카님의 페이퍼를 읽으니 그 때 할머니의 차가운 몸을 어루만졌던 생각이 나네요. 그게 저의 최대한의 할머니 죽음에 대한 예우였어요. 꼭 그렇게 해 드리고 싶더라구요.

blanca 2010-09-28 21:54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추석은 잘 쇠셨어요? 안그래도 서재 뜸하셔서 생각했더랬어요. 저희 어머니와 할머니도 풀지 못하고 헤어지셨답니다. 딜레마는...할머니는 날 사랑하는데 엄마와는 그렇지 못하다는 거. 그 사이에서 저는 할머니의 사랑을 폄하했었어요.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난 후 그 대목에서 저는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겪은 사람들이 참 많더라구요. 지금도 진행중인 집도 봤군요. 한국사회에서 고부간의 갈등은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 같아요.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 같은 아이들도 계속 나올지 모르겠어요.

기억의 집님의 댓글을 읽으니 괜시리 마음이 시려요. 잘하셨어요. 저는 못했어요. 임종을 다른 곳에서 하셔서....저는 차마 용기가 안나 그렇게 못해드렸을 것 같아요. 시간을 되돌린다면 할머니를 꼬옥 껴안아 드릴텐데......

穀雨(곡우) 2010-09-28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 섬뜩하다고 이해할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관념입니다. 그 너머의 공간이 무엇인지를 알길이 없기에 매번 죽음의 관념을 떠올리면 섬뜩해지는 보편적 관성에 젖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중심에 존재의 상실이 함께 겹친다면 아픔이 오래도록 퍼질 것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더 이상 시간의 기능을 상실하는 시점. 신형철님의 글과 블랑카님의 반듯한 생각이 겹쳐집니다.

blanca 2010-09-29 22:31   좋아요 0 | URL
곡우님, 죽음은 아주 가끔 그것도 생의 의지와 순간의 무게 정도를 깨닫기 위해 떠올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너무 자주 생각하면 자꾸 이 생이 허무하다는 쪽으로 젖어들게 되어서요.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그런 죽음을 목격하고 어쩔 수 없이 수긍해 나가는 쪽으로 가야 하는 과정인 것도 같아요....

2010-09-29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30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