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고입 연합고사가 끝난 후의 시원하고 안온한 기분 속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 밤 아홉 시경 이광수의 <단종애사>를 읽기 시작했다. 그 날 밤을 잊지 못한다. 생에 있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들이 있다. 바로 그런 날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장소이동을 했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거사를 꾸미고, 또 거기에 반해 정통왕권을 보위하겠다고 일을 도모했던 사육신과의 한판대결이 벌어지는 장면, 사육신이 그 끔찍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선왕에 대한 의리와 약속을 지키고 타협과 굴복 대신 장렬하게 죽어가는 장면들에서 나는 그 자리에 서성이고 있었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졌다. 그 피비린내 나는 고문의 현장에서 눈을 질끔 감아 버리고 서로 시조를 주고 받으며  형장으로 끌려가는 장면에서는 수많은 구경꾼들 틈에 끼여 눈물을 훔쳤다. 새벽 네 시경 마침내 단종의 죽음이 임박하자 나는 광분한 독자가 되어 있었다. 책 속을 뚫고 들어가듯이 노려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던 그녀는 마침내 단종이 죽은 시체로 떠오르자 눈물범벅으로 그대로 쓰러져 잠들고 말았다. 

나는 사춘기 후반 이후로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전에 터득한 것들은 여전히 유효한데, 나머지는 사소하거나, 없어도 그만이거나, 기껏해야 주석 정도에 불과한 것 같다.
                                                                                                                                         -p.74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삼십 대 중반으로 걸어들어 와 있었다. 이따금 나는 그 열여섯 살 겨울밤을 서성거린다. 돌아갈 때마다 그곳은 조금씩 퇴색되어 있다. 그 감동을, 그 순정한 몰입을 가두어 놓고 싶지만 그것은 세월의 무게에 자꾸만 가라앉는다. 젊음을, 미성숙을, 어린 시절을 만져보고자 하는 마음은 항상 그렇게 기약없는 배회 같이 되어 버린다. 지금 다시 친일 행적의 미묘한 지점에서 엇갈리는 평가의 가운데에 있는 그가 하필 유교적 이념과 명분에 목숨을 버린 이들을 추켜 세우는 그 역사 소설을 읽는다 해도 그때의 그 감동과 그 몰입은 요원할 것이다. 독서일기는 그래서 내 자서전이 될 수도 있다. 그때 읽은 책들을 지금 다시 읽고 느끼는 감상은 확연히 달라 있을 수밖에 없다. 활자들은 그대로인데 나의 복기는 시간의 더께에 눌린다. 고정불변의 사물에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인간의 감정의 덮개를 씌우는 행위는 독서가 유일할 것이다. 

눈이 멀어버린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주었던 망구엘은 그저 책 읽어주는 남자가 아니었다. 저명한 작가이자 비평가였다는 작가 소개란은 차라리 사족 같다. 이 책을 집어들면 그가 쉰세 번째 생일을 맞아 좋아했던 책들을 한 달에 한 권씩 읽으며 끼적인 글들은 한 편 한 편이 그의 소개 같다. 감탄 또 감탄이다. 소개된 책들 중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한 내가 감탄하고 눈을 반짝이며 그의 얘기를 따라갔으니 이 책들을 읽었다면 눈부신 조응의 순간을 경험할 것 같다. 사실 몰라도 괜찮다. 책을 소개하며 그는 자신의 삶의 얘기, 철학,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신랄한 비판 같은 시사적 이야기들로 스스로를 펼쳐 보여준다. 

그는 작가이지만 이 책에서 철저히 독자로서 자리한다. 또한 독자들의 권리와 권한에 대해 사려깊은 존중을 보여준다. 사실 작가가 서평을 쓴다는 것은 평범한 독자들과 더 멀어지기 위한 한 방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쪼개고 분석하고 덧붙인다. 우리는 모르는 수많은 관점과 인용이 난무한다. 그리고 우리는 결심하게 된다. 나는 안되겠다, 이 책은. 하지만 그가 소개하는 그 생소한 책들은 그 어떤 책일지라도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호기심을 비켜가지 못하게 된다. 더없이 고리타분할 것 같은 괴테에 대한 이런 상찬. 죽은 괴테가 활짝 미소지을 일이다. 

이 노인네에 대한 나의 애정은 힘과 섬세함의 이런 불안정한 결합에서 나오는 것 같다. 단정하고 적절한 조개껍질 같은 그의 문장이 그 속에 감추고 있는 어둠으로 나를 눈물짓게 할 때가 있다.
                                                                                                                                                    -p.145 

항상 이성적이고 논리 정연한 생각이 방 안 가득한 양파 튀김 냄새처럼 스며들어 있다. 등장인물의 단순하기 그지없는 동작도 어느것 하나 놓치지 않는 이 작은 신의 눈에 포착되면 뭔가 생각할 거리가 생긴다.
                                                                                                                                                    -p.148 

이 작은 신, 이성적이고 논리 정연한 생각을 양파 튀김 냄새처럼 방 안 가득 흩뜨려 놓는 노인네! 괴테가 이런 식으로 소개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아마 괴테 책이 당시 광고를 탔다면 이 멘트가 화제가 되었을 듯싶다.  

이 책이 단순히 지리멸렬한 서평으로 전락하지 않은 데에는 작가 자신의 사회적 불의에 대한 예리한 감수성이 한 몫 한다. 이런 책에서 이런 구절들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다. 

오래된 이치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것, 모든 권력은 악용된다는 것. 광신은 어떤 것이든 이성의 적이라는 것. 선동은 불의에 맞서는 힘을 규합할 목적이라도 여전히 선동이라는 것. 전쟁은 신이 더 막강한 군대의 편이라고 믿는 승자의 눈에만 영광으로 비친다는 것.
                                                                                                                     -p.88 

찬물세수가 필요할 때가 있다. 병든 닭처럼 졸며 관성에 젖어 삶을 소진하고 있을 때 우리는 벌떡 일어나 찬물세수를 해야 한다. 그런 책이다.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한 얘기로 정신이 번쩍 뜨이기는 또 처음이다. 이 찰나에 깃든 생에 절절하게 매달려서 활자를 하나 하나 흔들어 깨운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나는 늙어 있을 것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되어 또 지금 이 순간을 연상시키는 책의 한 구절에 호들갑을 떨게 될지 모른다. 그런 풍경을 그려 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망구엘...고마워요. 


책들은 흩어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한 부분을 이루었던 것, 아무리 작고 하찮더라도 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별들 아래 제자리를 지키며 영원히 머물 것이다.  

그리고 돌을 쪼아내는 석공의 시각처럼,
우리의 부재로 전체는 한결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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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7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7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0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0-08-27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여,눈이 멀어버린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줬다는 부분에서는 보르헤스가 되고 싶었고,
쉰 셋부터는 책을 한달에 한권씩 읽었다는 부분에선,한달만 그의 책이 되고 싶어 했었죠.

이런 감각적인 리뷰라니,
저도 찬물세수가 필요하겠는걸여~^^

blanca 2010-08-27 13:48   좋아요 0 | URL
우아. 망구엘 좋아하시는군요. 저는 보르헤스에게 발탁^^;;되었다고 해서 그냥 책이나 읽어 주는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글 읽고 깜짝 놀랐어요. 정말 글을 너무 잘 쓰더라구요. 지루할 줄 알았는데 책장도 넘 잘 넘어가고 제가 읽어봤던 책에 대한 얘기였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대체 책 속의 C가 누군지 참 궁긍하더라구요. 아내도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맨날 사소한 것들이 궁금해져서^^;; 큰일이에요.

마녀고양이 2010-08-27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봐도,, 블랑카 님은 단편 소설을 쓰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되요.
아마 짜릿할거야. 입에 착 달라붙고.
국내 여류 작가 소설을 잘 안 읽지만, 블랑카님이 쓰신다면 단번에,,, 서점으로 달려가겠습니다. ^^

blanca 2010-08-27 22:12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한테는 참 사람 참 기분 좋게 만드시는 재주가 있어요^^ 제가 그런 영광을 가지게 된다면 마녀고양이님이 서점에 안가셔도 되도록 당연히 만들어 드려야 하지요^^;;

yamoo 2010-08-27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합고사 세대시군요^^

멋진 리뷰 잘 감상했습니다. 망구엘은 이름만 들어봤는데...이런 리뷰에 추천을 안하면 알라디너가 아니죠~^^

blanca 2010-08-28 21:15   좋아요 0 | URL
yamoo님 대문사진 보면 베니스에서 죽다,가 생각나요. 미소년 이미지. 연합고사 세대라고 하니깐 갑자기 되게 늙은 기분인 것 있죠--;; 수능 세대이기도 해요 ㅋㅋㅋ

비로그인 2010-08-28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 님을 궁금하게 하려면 사소한 것을 잔뜩 늘어놓아야 하겠군요 ㅋㅋ
그 전에 유명인이 되어야 하는걸까요?.. (긁적) ㅋㅋ


blanca 2010-08-28 21:16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음 댓글이 약간 어려워요^^;; 제가 워낙 단순해서 무신 말씀이신지 긁적긁적--;;

비로그인 2010-08-28 22:48   좋아요 0 | URL
음. 제가 약간 어떻게 보면 기분 상하실만한 그런..댓글을 달았네요.
혹 기분이 좀 좋지 않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올리신 글 가운데 비슷한 느낌의, blanca님의 관심을 끌만한 내용들(본문에서 말씀하신 내용의 뜻을 담은 "사소한 것")을 말씀드린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햇빛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보이고 사방으로 쏟아지지만, 쏟아져 없어지지는 않는다. 이러한 쏟아짐은 일종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햇살은 '확장되다' 란 말에서 유래하여 '확장자들'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 숲, 천병희 역 p.145-146


예술이 고상한 정신을 앙양시키기 위해서나 자신감을 제공하기 위해 고안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예술은 브래지어가 아니다. 적어도 영어의 의미에서는 아니다. 그러나 브래지어가 프랑스어로 구명복임을 잊지 마라 - 줄리언 반즈 <플로베르의 앵무새> / 열린책들, 신재길 역 p.171


어떤 내용(사소한 것)을 어딘가에 끄적일때 이런 유명인의 구절을 인용하면 blanca 님을 더 궁금하고, 흥미있게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미였습니다.

다음부턴 좀 더 오해를 하지 않으시도록 뭔가 흔적을 남기도록 할게요^^ :D

세실 2010-08-29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삼십 대 중반으로 걸어들어 와 있었다" 표현이 참 좋아요.
저는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사십 대 초반으로 걸어들어 아 있었다" 이렇게 되네요. 하~~~

blanca 2010-08-30 14:45   좋아요 0 | URL
미모의 사서님이 오셨군요^^ 저는 사십 대 초반 여성이 은근 매력있더라구요. 영화에서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고. 삼십 대 중반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것 같아요^^;;

세실 2010-08-30 23:30   좋아요 0 | URL
ㅎㅎㅎ 감사합니다. 음 제가 매력적이라 이거죠?

blanca 2010-09-01 00:08   좋아요 0 | URL
당근이죠!!

비로그인 2010-08-30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망고향기가 나는 이름을 가진 남자...ㅋㅋ
예전에 읽다가 김현 님의 행복한 책읽기로 갈아탔었는데...

blanca 2010-08-30 14:44   좋아요 0 | URL
마기님!! 어어, 대문사진이. 가서 다시 확인해 볼게요. 망고향기가 나는 이름이라니! 넘 멋진 표현이에요. 첨에 무슨 말인가 했어요. 망구엘 아저씨가도 분명 좋아할 묘사일 것 같은데요. 그 유명한 김현의 책은 한 권도 못 읽어 봤어요..

기억의집 2010-08-30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첫 문단 너무 매력적이에요. 저는 첫 문단 읽으면서 순간적으로 중학교 2학교 시절 책을 좋아하는 친구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야기 했던 것이 기억나요. 스냅사진의 순간처럼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속에만 존재하는 그런 순간이요.
망구엘의 독서일기는 저는 첨엔 좋았는데 후반에 갈수록 졸렸어요.^^

blanca 2010-08-30 14:46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그럼 그때 카라마조프를 읽으셨에요?!! 오, 마이 갓. 기억의집님의 여중생 모습이 궁금해져요. 망구엘의 책의 문제는 제가 읽은 책이 한 권도 없었다는 거예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