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까지 커피를 하루에 서너 잔 마셨다. 그 이전에는 아침을 먹지 않고 믹스커피로 하루를 열기도 했다. 속이 이따금 쓰리기는 했지만 큰 이상이 없었고 카페인이 들어가면 그 정신이 찡해지는 청량감이 너무 좋아 거의 중독 수준으로 커피에 집착했던 것 같다. 이것에 제동이 걸린 건 건강검진 덕분이다. 만성 위염에 빈혈이 왔다. 오후 커피는 수면을 방해했다. 그래서 가까스로 줄인 게 하루 한 잔이었지만 이것조차 매일 마시니 주기적으로 역류성 식도염, 만성두통이 왔다. 커피를 다시 끊어보기로 했다. 하루, 이틀 거의 몸에 이상이 온 수준으로 근육통, 구역감, 두통으로 고생했다. 그러다 사흘이 되던 날 커피 마시기 전보다 오히려 몸이 덜 피곤한 기이한 경험을 했다. 


이건 비단 커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몇 년 전부터 내가 마음껏 탐닉하던 간식류들을 먹고 싶은 대로 마음껏 먹으면 공복혈당이 정상치 경계까지 오르는 경험도 하고 있다. 난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내 몸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그 이름은 노화다. 젊었을 때와 똑같이 하면 내 몸은 저항했다. 하고 싶은 것들보다 해야만 하는 것들의 목록에 순응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가는 건가 싶었다. 나만 특별할 리 없었는데, 내심 나는 안 늙을 줄 알았다니...내 앞에 어느 날 갑자기 중학생의 아이가 뚝 떨어진 게 아니듯이 내 몸도 영원히 청춘일 리 없다. 그러나 이 단순하고 명약관화한 명제를 받아들이는 건 말처럼 간단치 않다. 나이듦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노년내과 의사가 쓴 노화에 관련한 책이다. 굉장히 좋은 책이다. 강력 추천한다. 우리나라에서 노년을 맞이하는 일에 대한 의료적, 사회적 측면에서의 의미와 현실, 제도적 보완책, 개인이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노력이 가감없이 서술된 책이다. 노화 지연을 위한 "내재 역량을 잘 보존하는 방법"으로서 무언가를 더하는 대신 빼는 일에 대한 진지한 고찰도 와닿는다. 혀끝에 감기는 과당 음식들의 범람, 성과를 내라고 강요하는 사회, 오감을 자극하는 SNS 속에서 조금 덜 먹고 더 움직이고 마음챙김을 기억하기란 말처럼 쉽지만은 않지만 실제 이런 작은 노력들이 쌓여 결국 우리의 노년의 모습을 만들어가게 될 거라는 예언은 가벼이 넘길 일만은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환자가 바로 분과 전문의를 만날 수 있는 편리한 의료 시스템이 노인들이 여러 분과를 전전하며 통합 관리를 받지 못하고 중복 처방을 받거나 서로 각종 예기치 않은 상호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약들을 한꺼번에 복용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지적은 노인 환자의 특수한 상황인 노쇠를 간과한 치료가 그 노쇠를 더 가속화 시키고 있다는 통찰로 이어진다.  우리는 늙음이라는 상황을 직시하지 않음으로써 노인의 전반적인 삶의 질을 개선함으로써 일상을 건강하게 자립적으로 꾸려나가는 데 때로는 더 방해가 되는 의료적 처치나 처방, 치료를 남발함으로써 노인을 그저 젊은 세대들이 부양해야 하거나 돌봄노동을 해야 하는 성가진 존재로 만들어 버린게 아닐까. 


누구나 결국 나이가 든다. 나는 노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예외주의적 사고는 머지않아 나에게 차별로 돌아올 것이다. -<지속가능한 나이듦> 정희원


늙음에 대한 오롯한 사유의 문장화는 박완서의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중년의 여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모시고 있는 치매 시어머니를 통해 그 늙음의 현실화를 목도하고 충격 받는다. 그것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처럼 자연스럽지도 곰삭은 아취가 있지도 않았다. 적나라했고 원시적이었다.


그 여자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늙음과 그 여자에게 실제로 맡겨진 늙음과는 너무도 판이했다.

-<살아 있는 날의 시작> 박완서


자신이 실제로 늙음을 통과하며 그 늙음의 말로의 모습을 목격하며 그 부담을 홀로 떠안아야 하는 중년 여인의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것은 가부장제를 통과한 효라는 미덕으로 포장되고 강요된다. 이것은 오늘날도 여전히 나이듦을 포용하고 지원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서 더 은밀하고 교묘하게 자행되고 있는지 모른다. 


가을이 가고 있다. 따라서 나도 나이 들고 부모님도 늙고 아이들도 크고 있다. 이 시간의 무정함은 시시각각 또 다른 모습의 책임과 어려운 과제를 던져준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22-10-28 20: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희원 저자의 저 문장은 선고와도 같네요
아찔해집니다. 정신차려야겠어요 ^^

blanca 2022-10-29 08:52   좋아요 1 | URL
저는 저자가 너무 늙음에 대한 이해가 깊어서 꽤 나이가 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젊어서 놀랐고요. 군데군데 제가 요새 느끼는 지점들을 명확히 설명하거나 해석한 부분이 있어 정말 반가웠어요.

햇살과함께 2022-10-29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려고 찜해둔 책인데 강력 추천하시니 꼭 읽어봐야겠네요~

blanca 2022-10-29 08:53   좋아요 1 | URL
햇살과함께님 저도 여기에서 추천하신 분이 있어 읽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았습니다. 특히 약물이 서로 다른 분과에서 처방되어 때로 서로가 방해, 간섭,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대목은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이라 꼭 기억해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coolcat329 2022-10-29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에게도 필요한 책이네요.
저는 아직까지는 커피를 마시지만 만나면 같이 커피를 즐길 친구가 하나둘씩 사라져 순간 슬퍼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들도 하나같이 커피 끊으니 삶의 질이 달라졌다는 말들을 해요. 그러니 하루 한 잔은 괜찮다고 꼬시지도 못합니다. ㅎㅎ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친구들에게 추천해야겠어요.

blanca 2022-10-29 16:27   좋아요 1 | URL
맞아요. 커피도 커피지만 커피를 마시며 나누었던 교감이 참 그리워요. 오후에도 한 잔 같이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던 시간들이 참 그립네요.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게 참 스산해지는 가을날입니다.

테레사 2022-10-29 1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라딘 블노그를 끊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죠.좋은 책을 추천해 주는 이웃들 때문에ㅎ

blanca 2022-10-29 16:27   좋아요 0 | URL
테레사님 오래오래 여기 계셔야죠.

라로 2022-10-29 1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만 안 늙은 줄 알았다는 문장 읽고 깨달았어요.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하구요. 😅
약처방에 대한 건 저희 간호학에서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어요. 그리고 여긴 이미 노인학을 전공하게 되지 꽤 되었어요. 어쨌든 그래서 노인들이 약국을 하나로 정하고 약국에서 능동적으로 관리하는 경향이랍니다. 여긴. 어쨌든 이 책 저고 읽어봐야겠어요. 늘 좋은 책 소개 감사해요.

blanca 2022-10-29 16:30   좋아요 0 | URL
라로님, 한국이 주치의 제도가 도입되기 전에 바로 의료분과 전문의를 만나볼 수 있는게 편의성 측면에서는 좋은데 노인분들처럼 복합처방 많고 여러 질환이 겹쳐져 있는 경우는 부작용이 발생한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은 실제 노인을 전문으로 보는 전문의 자체도 많지 않답니다. 미국은 이미 그런 것들이 관리되고 있었다 하니 한국도 이제 점차 노인 환자를 그 입장에서 더 적극 케어하는 방향으로 가서 우리가 곧 맞이하게 될 노년 건강 관리가 더 나아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다락방 2022-11-05 13: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안그래도 매일 노화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살고 있어요. 받아들이려고 하면서도 툭 튕겨져 나오곤 합니다. 제가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네요. 좋은 글 입니다, 블랑카 님. 언제나처럼.

blanca 2022-11-05 19:03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가끔씩 아니 자주 내 나이를 실감 못해요. 그리고 예전에 우리 다 젊었을 때 알라딘 기억나세요? 그 북적북적하던 날들, 그날들도 그립고요. 그래도 이렇게 다락방님과 같이 늙어가는 것도 좋아요. 사실 제일 슬픈 건 서서히 진행되는 노안이에요...이건 깊이 생각하면 정말이지 너무 슬퍼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