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클락의 1953년작 공상과학 소설 <유년기의 종말>은 흥미로운 소설이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어느 날 오버로드라 불리는 외계인들이 지구를 점령하고 그들의 우세한 기술력과 군사력을 이용, 지구를 식민지화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버로드가 지구를 점령한 이래로 국가간의 분쟁도 사라지고 지구는 모처럼 평화를 누리지만, 전쟁을 억제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요구사항이 없는 오버로드의 동기는 수상쩍기 짝이 없다. 인간들을 평화롭게 살게 하려는 목적으로 먼 우주를 건너 지구까지 왔단 말인가? 오버로드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의심은 오직 부풀려지기만 할 뿐이다. 이 소설이 인상적으로 읽히는 이유는 아서 클락이 인류라는 종이 물리적 신체와 각 인간을 구별시키는 개인성을 상실하고 우주정신(!)이랄까 뭐 우주에 편재하는 정신력에 통합되는 방향으로 진화할 거라는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서 아주 공상과학스럽고 또 인류의 근본적 상상력에 부합하는 (불교나 힌두교를 생각해 볼 때) 줄거리를 펼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열심히 읽고 있으면 추상주의자 몬드리안의 "바다"가 자꾸만 떠오른다. 그런데 나는 그다지 이런 소설의 소재 설정에는 오히려 별로 관심이 가지 않고, 주인공 잰 로드릭의 흥미진진하다기 보다는 무용하고 서글프게 허무한 인생역정에 가슴이 찢어졌다. 잰 로드릭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고 무슨 기술력을 가졌는지도 이해할 수 없는 거의 전능해보이는 오버로드들의 정체를 알아내겠다는 일념으로 오버로드들의 행성으로 발사되는 우주선 안에 몰래 숨어든다. 오버로드들의 행성에서 그는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는데, 그건 우주의 많은 종들이 저마다 결국엔 우주정신에 편입되는 진화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오버로드들은 전능하기는 커녕 사실은 이 우주정신에 복속되어 노예생활을 하는 슬픈 족속, 우주정신으로 진화하지 못한 채 도태된 열등한 종으로 우주정신의 뜻에 따라 다른 우주의 종들의 진화과정을 돕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 신세일 뿐이다. 오버로드들은 로드릭에게 마침내 인간 종의 진화가 시작되었다며 이제 지구로 돌아갈 때라고 말한다. 로드릭에게는 오직 몇 달 걸린 여정이었지만 지구에서는 몇 백년이 흐른 후라 돌아온 고향 행성에서 그가 발견하는 것은 벌거벗은 채 언어를 모르고 한 대륙에 뭉쳐 순수 정신이 되어가는, 신체를 지닌 인류의 마지막 후예인 아이들이다. 로드릭은 인류의 마지막 진화가 완성되는 시점에 홀로 남은 태고적 인간으로 누가 읽을지 모르는 인류 최후의 진화과정을 기록한다. 혼자서 아무도 없는 텅빈 지구에서. 내가 읽은 그 어떤 소설에도 이보다 더한 고독은 없었다. 아무리 사람 사이에서 경험하는 외로움이 혼자 있을 때의 고독보다 더하다 해도 인간 종 자체가 사라진 텅 빈 행성의 마지막 인간의 그것에 비할 바 있으랴. 고독의 최절정, 호기심에 가득차 목숨을 걸고 모험을 감행한 물리학자 로드릭을 기다린 운명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