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누가 내게 마법의 램프에서 지니가 나와 3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면 무슨 소원을 빌겠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주저없이 내가 내세운 소원 세 가지는 (1)비행기 한 대를 갖는 것, (2)비행기 조종하는 법을 곧바로 아는 것, 그리고 (3)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시력을 얻는 것이었다. 정작 질문을 던진 사람은 뜨아해 했지만 나로서는 그 이상으로 완벽한 3가지 소원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나는 비행기 조종사라는 직업에 대해 엄청난 환상과 부러움을 갖고 있다. 

아마 그건 중학교 때 쌩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를 읽은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가 창공에서 바라보는 지상의 불빛들을 묘사하고, 비행사로서의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진짜 지도 위에는 국경이나 나라/수도 이름 대신 몇마리 양들의 때, 작은 마을의 불빛들, 우물의 위치가 박혀 있다고 할 때, 감수성이 예민하던 사춘기의 나는 그만 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비행조종사로 일한 경험이 있는 소설가를 한 명 더 만났을 때 나는 그의 팬이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로알드 달이었다. <Going Solo>는 로알드 달이 아프리카로 취직을 해서 떠나 있던 동안 (제국주의 시대 취직의 문은 당연히 훨씬 넓었다~~) 그리고 이후 2차대전 중에 영국공군조종사로 복무하며 어머니에게 보냈던 엽서를 모은 책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키가 겅중하고 얼굴이 긴 이 젊은이가 좁디좁은 비행기 조종칸에 다리를 구겨 밀어넣으면서라도 비행기조종사가 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간결하면서도 위트있고 흥미로운 그의 엽서에 등장하는 아프리카의 이야기들과 전쟁의 이야기들을 전해듣게 된다. 어머니에게 쓴 엽서인만큼 문체는 아주 정감이 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이 책을 읽었던 것은 아주 오래 전, 아마 육칠년 전쯤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로알드 달은 국내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를 오직 동화집 <James and the Giant Peach>의 작가로만 알고 있었다. (이 동화책은 적극 추천이다; 영화는 그러나 NO.) 지금 한국에서 그가 누리는 유명세를 생각하면 상당한 격세지감이 있다 아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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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7-06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가지 소원이 정말 멋집니다.
그런데 욕심 없는 소원인 것 같아도 엄청나게 비싼 소원들이네요.
비행기 한 대...이것만 팔아도 평생 먹고살 듯.
비행기 조종 기술...이 기술만 가져도 평생 취직 걱정 안해도 되잖습네까.
좋은 시력...생각해 보세요. 시력을 돈으로 살 수 있나!
전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 DVD 샀어요.
그런데 별로인가요? 정녕?^^

검둥개 2005-07-06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렇게는 생각 안해봤는데, 로드무비님의 말씀이 정녕 맞습니다. 저에게 소원을 통해 생활고를 타파하고자 하는 무의식이 있었군요. 예리하셔요 ^^;;; 디비디를 사셨군요. 저는 영화에 동화의 등장인물들이 뾰족뾰족하게 나오는 것이 좀 맘에 안 들었어요. 그리고 바다괴물 같은 것들이 원작과는 좀 다르게 다소 sci-fi적으로 처리된 것도 불만이었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제가 뾰족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 (반면 원작동화의 삽화는 상당히 둥글둥글해서 제가 좋아했었거든요.) 그러니 저의 생각은 가볍게 무시하셔도 될 듯 합니다 :)
 

너는 누구일까 (정현종)

너를 보면 취한다
피와 기대에 취하고
性 적 향기에 그 아지랑이에
취하고, 참 희한한 때도 있느니
세상 걱정이 없다
너는 누구일까

너는 바람을 넣는다
땅과 그 위의 길들에 바람을 넣고
심장과 발바닥에
그게 헤엄쳐 가는 시간에
바람을 넣는다
너는 넘치는 현재
너는 누구일까

(제도의 公認(공인)으로 무죄를 비는 거야말로 외설이지
과습에 기댄 자기 기만이야말로 외설이지)
저 자연을 보렴
저 찰랑대는 放心(방심)을 보렴
INNOCENCE
너는 넘치는 현재
너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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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 뉴스 (장정일)

 

봄날,

나무벤치 위에 우두커니 앉아

<Job 뉴스>를 본다.

 

왜 푸른 하늘 흰 구름을 보며 휘파람 부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호수의 비단잉어에게 도시락을 덜어주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소풍온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놀리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비둘기떼의 종종걸음을 가만히 따라가 보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나뭇잎 사이로 저며드는 햇빛에 눈을 상하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나무벤치에 길게 다리 뻗고 누워 수염을 기르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이런 것들이 40억 인류의 Job이 될 수는 없을까?

----------------------------------------------------------------

시를 읽은 나의 답변))  왜 정말 그럴 수 없을까요? 시인님?

 

장정일 시인의 시는 별로 읽은 것이 없었는데, 오늘 보니 이것도 좋길래 올린다.

아 정말 왜 이런 것들은 잡이 안 되는 거지? 인류의 수는 많은데 잡의 수는 형편없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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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당 문고 (장정일)

 

열 다섯 살,

하면 금새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먹은 삼중당 문고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간 삼중당 문고

급우들이 신기해하는 것을 으쓱거리며 읽었던 삼중당 문고

표지에 현대미술 작품을 많이 사용한 삼중당 문고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삼중당 문고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 문고

쉬는 시간에 10분마다 속독으로 읽어내려간 삼중당 문고

방학 중에 쌓아 놓고 읽었던 삼중당 문고

일주일에 세 번 여호와의 증인 집회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퇴학시키겠다던 엄포를 듣고 와서 펼친 삼중당 문고

교련문제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을 때 곁에 있던 삼중당 문고

건달이 되어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쓰다듬던 삼중당 문고

용돈을 가지고 대구에 갈 때마다 무더기로 사 온 삼중당 문고

책장에 빼곡히 꽂힌 삼중당 문고

싸움질을 하고 피에 묻은 칼을 씻고 나서 뛰는 가슴으로 읽은 삼중당 문고

처음 파출소에 갔다왔을 때 모두 불태우겠다고 어머니가 마당에 팽개친 삼중당 문고

흙 묻은 채로 등산배낭에 처넣어 친구집에 숨겨둔 삼중당 문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다 읽지 못한 채 두고 온 때문에 안타까웠던 삼중당 문고

어머니께 차압해 달래서 읽은 삼중당 문고

고참들의 눈치보며 읽은 삼중당 문고

빠다맞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읽은 삼중당 문고

머리칼이 길어질 때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읽은 삼중당 문고

삼성전자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문흥서림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레코드점 차려놓고 사장이 되어 읽은 삼중당 문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고시공부 때려 치우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공부를 하면서 읽은 삼중당 문고

데뷔하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영물물교환센터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박기영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

계대 불문과 용숙이와 연애하며 읽지 않은 삼중당 문고

쫄랑쫄랑 그녀의 강의실로 쫓아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여관 가서 읽은 삼중당 문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와 짜장면집 식탁 위에 올라 읽던 삼중당 문고

앞산 공원 무궁화 휴게실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파란만장한 삼중당 문고

너무 오래되어 곰팡내를 풍기는 삼중당 문고

어느덧 이 작은 책은 이스트를 넣은 빵 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네

집채만해진 삼중당 문고

우주같이 신비로운 삼중당 문고

그러다 나 죽으면

시커먼 뱃대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나가고

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

삼중당 문고만한 관 속에 들어가

붉은 흙 뒤집어쓰고 평안한 무덤이 되겠지

----------------------------------------------------------

"요리사와 단식가"를 올린 김에 장정일 시인의 시를 하나 더 올립니다. 에휴, 행이 많다보니 일일이 치느라고 팔이 다 아프네요. 그러면서도 한 행이라도 혹여 빼먹을까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답니다.

삼중당 문고 저도 어렸을 적에 범우사 문고판과 함께 열심히 읽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시인은 저보다 훨씬 파란만장한 삶을 삼중당 문고와 함께 했던 것 같아요. 또 시인은 저보다 윗세대의 사람이라 그런지 삼중당문고의 가격도 상당히 저렴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네요. ^^

책읽어 사람이 머리 부풀었다가도 죽어선 그 머리 부풀린 문고판 판형만큼 작은 관에 들어간다는 건, 신선하고 약간 슬프고 그래도 정직한 아이디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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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 2005-06-26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시집을 확인해본 결과 '피에 묻은 칼'이 맞습니다
전 어린이답게 지경사나 파름문고를 열심히 읽었다는 ^^

검둥개 2005-06-26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드랍님 시집이 없는 저를 위해 열심히 확인해주시고 감사감사입니다 ^^
흠, 지경사나 파름문고는 근데 도통 모르겠군요 :)

인터라겐 2005-06-26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잖아도 이번에 방송국 갔을때 장정일의 삼중당문고에 관한 시 얘기가 나왔었어요... 장정일씨는 책을 보기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나서야 책을 본다고 해요... 항상 책은 초판으로 사구요... 초판과 재판은 그 느낌이 다르다고 하면서요..

검둥개 2005-06-26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먹으면서 책보는 저에게는 너무나 찔리는 이야기군요. 저는 막 필 꽂히면 책에 줄도 직직 긋는데 시인이 보면 맞겠는데요. ㅎㅎ (다행히 시집에 그런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근데 어디 가면 인터라겐님 나오는 거 볼 수 있어요? 제가 컴맹에 나와 살다보니 사정에 좀 어둡고만요 ^^;;; (혹 링크라도 달아주시면 담 이벤트할 때 제가 꼭 ㅎㅎㅎㅎㅎ)

인터라겐 2005-06-26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아직 방송안나왔어요... 헉 너무 소문을 많이 낸것 같아요.. 제가 보고 나서 흉하게 나오지 않으면 알려드릴께요...ㅠ.ㅠ

히나 2005-06-26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검정개님, 지경사에서 나온 소녀명랑소설 시리즈와 동광출판사에서 나온 파름문고 시리즈를 정녕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80년대 후반에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 대부분은 아는데 저보다 윗 세대? ㅎㅎ 지경사는 초딩용 학원명랑소설, 동광출판사 파름문고는 중딩용 하이틴 로맨스라고 할 수 있죠~

지경사 소녀명랑소설 중에서 외동딸 엘리자베스, 발랄한 신입생 다렐르 등등,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흑흑흑.. 암튼 영국 기숙사가 나오는 E. 블라이튼 소설을 동경하며 푹 빠져 살았어요. 제가 처음으로 읽은 '키다리 아저씨'도 지경사 판이었죠. 일러스트도 참 예뻤는데..

동광출판사에서 나온 파름문고 시리즈는 나일강의 소녀, 남녀공학, 브라이튼 고교 그런 책들이 널리 읽혔는데 나름대로 그 시절에는 하이틴 로맨스였다는 ㅍㅍ~

딸기엄마 2005-06-26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독서토론회 할 때 읽었던 마당문고가 생각나요. 한 권에 990원이었는지 900원이었는지 기억이 아삼삼한데 주머니 가벼운 학생들이 읽긴 딱이었지요. 용돈으로 한 권 두 권 사서 모았던 그 책들 이사할 때 다 잃어버린게 정말 아깝네요....
추억이 생각나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검정개님~

검둥개 2005-06-26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 기대하고 있을께요. 흉하게 나올 수가 없죠 ^^ 대학생으로도 보이시는 용모잖아요!!!

스노드랍님 잘못했어요. ㅠ.ㅠ 용서해주세요. 그런데 정녕 시리즈 이름이 기억이 안나는 걸요. ㅎㅎ 80년대 후반에 저는 이미 국민학교를 졸업한지 오래. 분명 교실에서 수업시간에 돌던 할리퀸 로맨스를 무릎에 얹고 속독으로 숨어 읽고 있었을 거라 사료됩니다. 스노드랍님도 그건 읽으셨겠지요? ^^

지우개님 감사는요, 문고판은 정말 그 몇백원 하는 가격이 유혹적이었어요. 그죠? 마당문고는 저도 기억이 날듯말듯 한걸요. 지우개님도 저처럼 스노드랍님보다는 약간 윗세대이신가 봐요 ^^

잉크냄새 2005-06-26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중당 문고는 저도 기억나네요. 몇권 읽은 표지가 아른아른하네요.

검둥개 2005-06-26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가 소장하고 있던 (지금은 다 멀리 있지만) 삼중당 문고 표지들은 대충 기억이 나요. 그런데 시인이 말하듯 현대 미술작품이 많이 쓰였던 것 같지는 않은 걸요... 하지만 하기야 제가 그 때 알고 있던 현대 미술 작품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역시 그래서 자신이 없기는 해요 ^^;;;

히나 2005-06-26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선 제가 또 한참 아랫세대네요 좋아요 ㅎㅎ 물론 저는 할리퀸 로맨스도 열심히 읽었답니다 사실 제일 열심히 읽은 책이죠.. 삼중당에서 나온 하이틴 로맨스부터 신영미디어의 전신인 IPS에서 나온 할리퀸 로맨스까지 왠만한 건 다 읽었어요.. 그런데 왜 연애는 못 하냐 ㅡ_ㅡ;;;

검둥개 2005-06-26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할리퀸을 읽고 연애를 잘 하냐, 그게 저는 더 궁금한걸요 ^^ (주인공은 달라도 스토리는 하나잖아요) 거참 신영미디어는 모르겠어도 IPS는 뿅하고 기억이 잘도 나는군요. 역시 나는 늙었으... ㅠ.ㅠ

딸기엄마 2005-06-2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정개님 제 서재로 오시면 할 일이 있으실텐데요~ 전 이만 물러가렵니다...

marine 2005-06-2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드랍님, 전 지경사 알아요 저도 영국 기숙학원 얘기, 지겹도록 읽고 한술 더떠서 직접 소설까지 썼답니다 ^^ (저만 쓴 게 아니라 우리 반에 아예 유행이었음) 그 때는 기숙학원 얘기가 어쩜 그렇게 귀족적으로 들리는지, 동경의 대상이었죠 지경사, 지금도 있을까요??

파란여우 2005-06-26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50원짜리 삼중당 문고 저도 기억합니다.
범우사 문고판도 200원하고 그랬었죠. 민음사 시집 한 권에 300원짜리 하던걸
전 아직 가지고 있어요.

검둥개 2005-06-27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우개님, 할 일 끝냈어요 ^^ 다정하신 마음 잘 받을께요!!!

나나님과 스노드랍님 제게 소외감을 느끼게 하시고 있는 거 아세요? (ㅋㅋ 농담임다 ^^*)

파란여우님, 장정일 시인의 시를 읽으며 가장 그럴법한 추억이 떠오르실 것 같아요. 근데 300원짜리 민음사 시집 언제 함 서재에 사진으로 올려주세요. 넘 궁금하고 보고싶어요 ^^~*
 

요리사와 단식가 (장정일)

1

301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요리사다. 아침마다 그녀의 주방은 수퍼마켓에서 배달된 과일과 채소 또는 육류와 생선으로 가득 찬다. 그녀는 그것들을 굽거나 삶는다. 그녀는 외롭고, 포만한 위장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잠시 잊게 해준다. 하므로 그녀는 쉬지 않고 요리를 하거나 쉴 새 없이 먹어대는데, 보통은 그 두가지를 한꺼번에 한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해 먹을까? 그녀의 책장은 각종 요리사전으로 가득하고, 외로움은 늘 새로운 요리를 탐닉하게 한다. 언제나 그녀의 주방은 뭉실뭉실 연기를 내뿜고, 그녀는 방금 자신이 실험한 요리에다 멋진 이름을 지어 붙인다. 그리고 그것들 쟁반에 덜어 302호의 여자에게 끊임없이 갖다 준다.

2

302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단식가다. 그녀는 방금 301호가 건네준 음식을 비닐봉지에 싸서 버리거나 냉장고 속에서 딱딱하게 굳도록 버려둔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먹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외롭고, 숨이 귾어질듯한 허기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약간 상쇄시켜 주는 것 같다. 어떻하면 한모금의 물마저 단신할 수 있을까? 그녀의 서가는 단식에 대한 연구서와 체험기로 가득하고, 그녀는 방바닥에 탈진한 채 드러누워 자신의 외로움에 대하여 쓰기를 즐긴다. 흔히 그녀는 단식과 저술을 한꺼번에 하며, 한번도 채택되지 않을 원고들을 끊임없이 문예지와 신문에 투고한다.

3

어느날, 세상 요리를 모두 맛본 301호의 외로움은 인육에게까지 미친다. 그래서 바싹 마른 302호를 잡아 스플레를 해 먹는다. 물론 외로움에 지친 302호는 쾌히 301호의 재료가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외로움이 모두 끝난 것일까? 아직도 301호는 외롭다. 그러므로 301호의 피와 살이 된 302호도 여전히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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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 2005-06-26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제목이 '요리사와 단식가'였죠 영화때문에 늘 '301 302'로 먼저 기억하게 돼요.. 요즘 시에 필~ 받으신 거 같아요 ^^

검둥개 2005-06-26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에 필 받기는요, 시 베껴다 쳐넣는 것만 해도 딸린답니다.
스노드랍님의 멋진 리뷰에 필 받은 거라니까요 ^^

marine 2005-06-26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에 혹시 황신혜와 방은진 나오지 않았나요? 내가 "산부인과" 와 헷갈리나?

히나 2005-06-26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나님, 그 영화 맞아요 얼마전에 극장에서도 다시 하더라구요.
열음사 대표 딸 이서군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었죠.
흠.. 이서군 감독은 요즘 뭐하나..

검둥개 2005-06-26 0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그러고보니 301:302에랑 산부인과에 동일배우들이 나왔네요. 맞죠? ^^

딸기엄마 2005-06-2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바보 도트는 소리) 그 영화가 이 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거였군요. 세상은 넓고 몰랐던 건 지천에 널렸어요 정말~

검둥개 2005-06-26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그치만 인생도 꽤 긴 편이니 그래도 천천히 배우면 되죠. ㅎㅎㅎ 대부분은 또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