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중당 문고 (장정일)

 

열 다섯 살,

하면 금새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먹은 삼중당 문고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간 삼중당 문고

급우들이 신기해하는 것을 으쓱거리며 읽었던 삼중당 문고

표지에 현대미술 작품을 많이 사용한 삼중당 문고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삼중당 문고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 문고

쉬는 시간에 10분마다 속독으로 읽어내려간 삼중당 문고

방학 중에 쌓아 놓고 읽었던 삼중당 문고

일주일에 세 번 여호와의 증인 집회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퇴학시키겠다던 엄포를 듣고 와서 펼친 삼중당 문고

교련문제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을 때 곁에 있던 삼중당 문고

건달이 되어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쓰다듬던 삼중당 문고

용돈을 가지고 대구에 갈 때마다 무더기로 사 온 삼중당 문고

책장에 빼곡히 꽂힌 삼중당 문고

싸움질을 하고 피에 묻은 칼을 씻고 나서 뛰는 가슴으로 읽은 삼중당 문고

처음 파출소에 갔다왔을 때 모두 불태우겠다고 어머니가 마당에 팽개친 삼중당 문고

흙 묻은 채로 등산배낭에 처넣어 친구집에 숨겨둔 삼중당 문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다 읽지 못한 채 두고 온 때문에 안타까웠던 삼중당 문고

어머니께 차압해 달래서 읽은 삼중당 문고

고참들의 눈치보며 읽은 삼중당 문고

빠다맞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읽은 삼중당 문고

머리칼이 길어질 때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읽은 삼중당 문고

삼성전자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문흥서림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레코드점 차려놓고 사장이 되어 읽은 삼중당 문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고시공부 때려 치우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공부를 하면서 읽은 삼중당 문고

데뷔하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영물물교환센터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박기영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

계대 불문과 용숙이와 연애하며 읽지 않은 삼중당 문고

쫄랑쫄랑 그녀의 강의실로 쫓아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여관 가서 읽은 삼중당 문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와 짜장면집 식탁 위에 올라 읽던 삼중당 문고

앞산 공원 무궁화 휴게실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파란만장한 삼중당 문고

너무 오래되어 곰팡내를 풍기는 삼중당 문고

어느덧 이 작은 책은 이스트를 넣은 빵 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네

집채만해진 삼중당 문고

우주같이 신비로운 삼중당 문고

그러다 나 죽으면

시커먼 뱃대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나가고

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

삼중당 문고만한 관 속에 들어가

붉은 흙 뒤집어쓰고 평안한 무덤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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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와 단식가"를 올린 김에 장정일 시인의 시를 하나 더 올립니다. 에휴, 행이 많다보니 일일이 치느라고 팔이 다 아프네요. 그러면서도 한 행이라도 혹여 빼먹을까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답니다.

삼중당 문고 저도 어렸을 적에 범우사 문고판과 함께 열심히 읽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시인은 저보다 훨씬 파란만장한 삶을 삼중당 문고와 함께 했던 것 같아요. 또 시인은 저보다 윗세대의 사람이라 그런지 삼중당문고의 가격도 상당히 저렴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네요. ^^

책읽어 사람이 머리 부풀었다가도 죽어선 그 머리 부풀린 문고판 판형만큼 작은 관에 들어간다는 건, 신선하고 약간 슬프고 그래도 정직한 아이디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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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 2005-06-26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시집을 확인해본 결과 '피에 묻은 칼'이 맞습니다
전 어린이답게 지경사나 파름문고를 열심히 읽었다는 ^^

검둥개 2005-06-26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드랍님 시집이 없는 저를 위해 열심히 확인해주시고 감사감사입니다 ^^
흠, 지경사나 파름문고는 근데 도통 모르겠군요 :)

인터라겐 2005-06-26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잖아도 이번에 방송국 갔을때 장정일의 삼중당문고에 관한 시 얘기가 나왔었어요... 장정일씨는 책을 보기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나서야 책을 본다고 해요... 항상 책은 초판으로 사구요... 초판과 재판은 그 느낌이 다르다고 하면서요..

검둥개 2005-06-26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먹으면서 책보는 저에게는 너무나 찔리는 이야기군요. 저는 막 필 꽂히면 책에 줄도 직직 긋는데 시인이 보면 맞겠는데요. ㅎㅎ (다행히 시집에 그런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근데 어디 가면 인터라겐님 나오는 거 볼 수 있어요? 제가 컴맹에 나와 살다보니 사정에 좀 어둡고만요 ^^;;; (혹 링크라도 달아주시면 담 이벤트할 때 제가 꼭 ㅎㅎㅎㅎㅎ)

인터라겐 2005-06-26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아직 방송안나왔어요... 헉 너무 소문을 많이 낸것 같아요.. 제가 보고 나서 흉하게 나오지 않으면 알려드릴께요...ㅠ.ㅠ

히나 2005-06-26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검정개님, 지경사에서 나온 소녀명랑소설 시리즈와 동광출판사에서 나온 파름문고 시리즈를 정녕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80년대 후반에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 대부분은 아는데 저보다 윗 세대? ㅎㅎ 지경사는 초딩용 학원명랑소설, 동광출판사 파름문고는 중딩용 하이틴 로맨스라고 할 수 있죠~

지경사 소녀명랑소설 중에서 외동딸 엘리자베스, 발랄한 신입생 다렐르 등등,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흑흑흑.. 암튼 영국 기숙사가 나오는 E. 블라이튼 소설을 동경하며 푹 빠져 살았어요. 제가 처음으로 읽은 '키다리 아저씨'도 지경사 판이었죠. 일러스트도 참 예뻤는데..

동광출판사에서 나온 파름문고 시리즈는 나일강의 소녀, 남녀공학, 브라이튼 고교 그런 책들이 널리 읽혔는데 나름대로 그 시절에는 하이틴 로맨스였다는 ㅍㅍ~

딸기엄마 2005-06-26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독서토론회 할 때 읽었던 마당문고가 생각나요. 한 권에 990원이었는지 900원이었는지 기억이 아삼삼한데 주머니 가벼운 학생들이 읽긴 딱이었지요. 용돈으로 한 권 두 권 사서 모았던 그 책들 이사할 때 다 잃어버린게 정말 아깝네요....
추억이 생각나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검정개님~

검둥개 2005-06-26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 기대하고 있을께요. 흉하게 나올 수가 없죠 ^^ 대학생으로도 보이시는 용모잖아요!!!

스노드랍님 잘못했어요. ㅠ.ㅠ 용서해주세요. 그런데 정녕 시리즈 이름이 기억이 안나는 걸요. ㅎㅎ 80년대 후반에 저는 이미 국민학교를 졸업한지 오래. 분명 교실에서 수업시간에 돌던 할리퀸 로맨스를 무릎에 얹고 속독으로 숨어 읽고 있었을 거라 사료됩니다. 스노드랍님도 그건 읽으셨겠지요? ^^

지우개님 감사는요, 문고판은 정말 그 몇백원 하는 가격이 유혹적이었어요. 그죠? 마당문고는 저도 기억이 날듯말듯 한걸요. 지우개님도 저처럼 스노드랍님보다는 약간 윗세대이신가 봐요 ^^

잉크냄새 2005-06-26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중당 문고는 저도 기억나네요. 몇권 읽은 표지가 아른아른하네요.

검둥개 2005-06-26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가 소장하고 있던 (지금은 다 멀리 있지만) 삼중당 문고 표지들은 대충 기억이 나요. 그런데 시인이 말하듯 현대 미술작품이 많이 쓰였던 것 같지는 않은 걸요... 하지만 하기야 제가 그 때 알고 있던 현대 미술 작품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역시 그래서 자신이 없기는 해요 ^^;;;

히나 2005-06-26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선 제가 또 한참 아랫세대네요 좋아요 ㅎㅎ 물론 저는 할리퀸 로맨스도 열심히 읽었답니다 사실 제일 열심히 읽은 책이죠.. 삼중당에서 나온 하이틴 로맨스부터 신영미디어의 전신인 IPS에서 나온 할리퀸 로맨스까지 왠만한 건 다 읽었어요.. 그런데 왜 연애는 못 하냐 ㅡ_ㅡ;;;

검둥개 2005-06-26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할리퀸을 읽고 연애를 잘 하냐, 그게 저는 더 궁금한걸요 ^^ (주인공은 달라도 스토리는 하나잖아요) 거참 신영미디어는 모르겠어도 IPS는 뿅하고 기억이 잘도 나는군요. 역시 나는 늙었으... ㅠ.ㅠ

딸기엄마 2005-06-2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정개님 제 서재로 오시면 할 일이 있으실텐데요~ 전 이만 물러가렵니다...

marine 2005-06-2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드랍님, 전 지경사 알아요 저도 영국 기숙학원 얘기, 지겹도록 읽고 한술 더떠서 직접 소설까지 썼답니다 ^^ (저만 쓴 게 아니라 우리 반에 아예 유행이었음) 그 때는 기숙학원 얘기가 어쩜 그렇게 귀족적으로 들리는지, 동경의 대상이었죠 지경사, 지금도 있을까요??

파란여우 2005-06-26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50원짜리 삼중당 문고 저도 기억합니다.
범우사 문고판도 200원하고 그랬었죠. 민음사 시집 한 권에 300원짜리 하던걸
전 아직 가지고 있어요.

검둥개 2005-06-27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우개님, 할 일 끝냈어요 ^^ 다정하신 마음 잘 받을께요!!!

나나님과 스노드랍님 제게 소외감을 느끼게 하시고 있는 거 아세요? (ㅋㅋ 농담임다 ^^*)

파란여우님, 장정일 시인의 시를 읽으며 가장 그럴법한 추억이 떠오르실 것 같아요. 근데 300원짜리 민음사 시집 언제 함 서재에 사진으로 올려주세요. 넘 궁금하고 보고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