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가수 --뽕짝의 꿈  (허수경)

 

나 오래 전 병아리를 키웠다네

이 놈이 닭이 되면 내버리려고

다 되면 버리는 재미

그게 바로 남창 아닌가, 아무데서나 무너져내리는 거

 

반짝이는 거

반짝이면서 슬픈 거

현 없이도 우는 거

인생을 너무 일찍 누설하여 시시쿠나

 

그게 바로 창녀 아닌가, 제 갈 길 너무 빤해 우는 거

 

닭은 왜 키우나 내버리려고

꽃은 피면 왜 다리를 벌리나 꽃에겐 씨앗의

꿈이란 없다네 아름다움에

뭐, 꿈이 있을 턱이

 

돌아오고 싶니? 내 노래야

내 목젖이 꽃잎 열 듯 밸개지던 그 시절

노래야, 시간 있니? 다시 돌아올 시간,

나 어느 모퉁이에서 운다네

나 버려진 거 같아 나한테마저도 ......

 

내일의 노래란 있는 것인가

정처없이 물으며 나 운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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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의 시를 읽으면 나는 '절창'이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 것만 같다. 대학시절 '정든 병'이라는 시를 읽고 나는 허수경 시인에 홀딱 반했다. 어떻게 그렇게 구슬프게 노래를 하는지, 어떻게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헤집어놓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젊은 시인이 그토록 절절한 시를 읊어 올리는지 나는 지금도 모르겠다. 시인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타고나는 거라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시들이다. 말들이 그냥 곧바로 노래가 되는 시들. 오래전 혼자서 여러 번 읽었던 이 시인의 시집이 오늘따라 무척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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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의 밤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폴 오스터는 오래 전 한 때 내가 무척 좋아했던 작가였다.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아마 그의 수필집 <굶기의 예술>이 시인 최승자의 번역으로 나오면서부터였지 싶다. 시인이 번역한 책들에 나는 특별한 애착을 보이는 경향이 있는 데다가, <굶기의 예술>이라는 그 제목은 정말이지 그 당시의 나에게는 너무나 멋지구리하게 들렸다. 게다가 그는 내가 좋아하는 오스트레일리아 배우 하비 케이틀이  나오는 <스모크>라는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을 한 작가이기도 했다.

<뉴욕삼부작>을 읽고 나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이 책이 제공하는 모든 것이 내게는 너무나 새로왔다. 그래서 대학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전부 빌려 읽고 심지어 당시에 번역되어 있지 않던 책들은 영어본으로까지 읽었다. <리바이어던>이 그렇게 읽었던 책인데, 딸리는 영어실력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결말이 궁금하던지 거의 날새다시피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읽은 폴 오스터의 책들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 찾아보니까, <달의 궁전>, <우연의 음악>, <팀벅투 (동행)>, <미스터 버티고 (공중곡예사)>, 까지 소설은 도합 7권을 읽었고 (<신탁의 밤> 포함), 에세이집도 <빵굽는 타자기>와 <고독의 발명>까지 모두 다 읽었다. [지금 보니 정말 무식하게 읽어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신나게 읽으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이 작가에 대해 품었던 나의 경외감은 사그러들었다. 너무 단시간에 그의 작품들을 많이 읽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가 흥미위주의 극단적인 소재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실 소재가 선정적이네 어쩌네 하며 독자가 작가에 대해 트집을 잡을 때 독자가 하고싶어하는 말은, 재밌는 소재도 반복되니 지겹다는 게 아니라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 그 메세지에 비해 소재가 과장되고 허풍스럽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즉, 하려는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풀어놓는 매체인 소재가 딱 맞아 떨어지지 않고 겉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폴 오스터는 딱 한 가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우연과 우연이 바꾸어놓는 사람들의 삶; 우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들; 그 속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행동과 그들의 생각. <신탁의 밤>에서는 여기에다가 소설쓰기에 대한 성찰이 덧붙여진다. (대개의 포스트모던 소설들과 비슷한 길을 그도 가는 것이다.) 

소설가는 평생 단 한 가지 이야기를 한다는 말도 있으니까, 한 가지 주제를 탐구하는 게 폴 오스터의 잘못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 가지 주제를 밀고나간다면 최소한 그에 대한 작가의 성찰도 비례해서 깊어지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기대가 아닐까? 폴 오스터가 나를 실망시키는 것은 바로 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 머리를 쓰는 것을 싫어한다. 머리를 써야 하더라도 나로 하여금 그걸 즐기면서 자발적으로 해주도록 하는 작가를 좋아한다. 주석이 덕지덕지 붙은 이 소설은 그래서 처음부터 나에게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내 물론 보르헤스를 존경해마지 않지만, 보르헤스도 주석을 이런 식으로 남용하지는 않았다. (결국 중간에 나는 주석 읽기를 중단했다!) 이게 무슨 포모식 글쓰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대체 아무렇게나 늘어놓고 안 닫히는 이야기만 무성하게 내버려두는 것은 나에게는 작가의 무성의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안다, 이게 작가가 그토록 건드리고 싶어하는 우연 어쩌고와 관련이 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래서 작가는 이 구성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나에게 비규범적 소설구성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내가 그 구성에 빨려들어가서 확 속아넘어가느냐 아니냐에 달렸다, 그리고 그 구성을 만드는 데 작가가 들여야 했을 공력이 얼마 정도였을까 하는 데 대한 약간의 고려 정도. 물론 오스터에 대면 대작가기는 하지만 예를 들어 보르헤스의 단편들은 얼마나 짧으면서도 간명하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가. 거기다 대면 무지하게 길고, 반면 생각할 꺼리는 그냥 별로 없다고 생각이 된 (물론 이건 이미 그의 다른 작품들을 다 읽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지만은, 구성의 효율성도 작품에서는 중요한 요소다) 내게 폴 오스터의 이 책을 읽는 것은 거의 고난의 길이었다. 그리고 이 책이 이렇게 된 건 작가가 쉽게 쓰는 길을 택하다보니 그랬을 거라는 혐의까지 품으면서 (물론 본인은 힘들었다고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었다.

폴 오스터는 한 번 읽어볼 만한 작가다. 하지만 내게 이 책은 실망이었다. 다른 분들이 별을 많이 주셨으니까 나는 과감하게 두 개만 떨군다. 그의 작품 한 두 개를 추천한다면, 나는 오직 <뉴욕 삼부작>과 <고독의 발명>만을 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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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5-06-05 0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폴 오스터 너무 좋아하는데요, 이 책은 참 별로였어요 동어 반복이라고 해야 할까, 소재의 고갈이라고 해야 할까... 전 달의 궁전이 너무 좋았어요 거기 나오는 에핑 같은 은둔자, 혹은 환상의 책에 나오는 헥터 만 등이 막연하게 꿈꾸던 이상향이었거든요 책 읽는 것만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자들,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려운 이런 캐릭터들이 너무 멋지더라구요 특히 굶기의 예술이라는 문구에도 완전히 맛이 가 버렸죠 정신의 명료함을 위해 극단적인 굶기를 감행하는 치열함에 소름이 돋더라구요 그런데 저도 신탁의 밤 부터는 매력이 감소해서 잘 안 읽습니다 그래도 폴 오스터, 문장력도 좋고 대단한 이야기꾼이지 않나요? 고전을 정말 많이 읽는 것 같아요 전 가끔 이문열이 생각나더라구요

검둥개 2005-06-05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말고도 이 책에 실망한 분이 있었군요. 나나님도 별로였다고 하시니까요. 다른 분들이 워낙 호평을 하셨길래 원래 조금 쫄았었답니다. ^^;;
 

토요일 오후 (이수명)

살아간다는 것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토요일 오후처럼 하릴없어지는 것이다. 꽃다발을 든 신부여, 가던 차에서 내려 욕설을 퍼붓고 그대는 억울하도록 상스러워지는 것이다. 골목마다 막히기만 하는 것이다. 쉬워지고 우스워지는 것이다. 보지 않을 수 있지만 듣지 않을 수 없는 것, 먼지로 뒤덮인 한 꺼풀의 귀지를 죽을 때까지 껴입는 것이다. 익어가는 열매처럼, 세상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몸을 던지는 것이다. 하품 끝에 눈물이 어리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토요일 오후처럼 마지막에 오는 것, 마지막에 찾아오는 공황 같은 것이다. 꽃다발을 버린 신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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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명은 94년에 등단한 시인이지만, 나는 최근까지 이 시인의 시를 알지 못했다. 이수명은 난해시를 쓰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경향은 최근 시집으로 갈 수록 강화되는 모양이다. (c.f. 이수명의 가장 최근시집인 <고양이 비디오를 보다>에 대한 브리즈님의 서평을 볼 것!)  하지만 그 즉물시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이수명은 인상적이고 특징적인 서정성을 지닌 시인이다. 나는 이 시인의 재기발랄하며 가볍고 동시에 서정적인 시들을 무척 좋아한다.

"토요일 오후"라는 이 짤막한 산문시 속에는 막 자신의 결혼식으로 향하는 신부의 그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멋져야 마땅할 순간이  순식간에 우습고 황당하고 심지어 약간 서글프기까지 한 것으로 전락하는 모습이 스냅사진처럼 잘 포착되어 있다. (이 신부는 급한 마음에 걸리적거리는 꽃다발도 던져버리고 결혼식장으로 달려가는 것일까? 아니면 막판에 상대와의 언쟁 끝에 결혼을 포기하는 것일까? ) 

어린 아이가 무심결에 손을 놓아버린 풍선처럼, 폼이라던가 형식이라거나 악랄스럽게 강력한 사회적 관습과 그에 동반되는 엄숙주의가 멀리멀리 날아가버리는 어느 나른한 토요일 오후.  산다는 것은 마지막에 오는 것, 산다는 것은  공황 같은 것이라고 시인이 말한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진짜로 공황 같던 삶에 배여 있던 치기어린 비극성도 사이다 거품처럼 쉬이 휘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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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기형도)

이튿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간유리 같은 밤을 지났다.

그날 우리들의 언덕에는 몇백 개 칼자국을 그으며 미친 바람이 불었다. 구부러진 핀처럼 웃으며 누이는 긴 팽이모자를 쓰고 언덕을 넘어갔다. 어디에서 바람은 불어오는 걸까? 어머니 왜 나는 왼손잡이여요. 부엌은 거대한 한 개 스푼이다. 하루종일 나는 문지방 위에 앉아서 지붕 위에서 가파른 예각으로 울고 있는 유지 소리를 구깃구깃 삼켜넣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아버지가 끊어뜨린 한 가닥 실정맥이야. 조용히 골동품 속으로 낙하하는 폭풍의 하오. 나는 빨랫줄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러닝 셔츠가 흙투성이가 되어 어디만큼 날아가는가를 두 눈 부릅뜨고 헤아려보았다. 공중에서 휙휙 솟구치는 수천 개 주삿바늘. 그러고 나서 저녁 무렵 땅거미 한 겹의 무게를 데리고 누이는 보쁠린 치마 가득 삘기의 푸른 즙약을 물들인 채 절룩거리며 돌아오는 것이다.

아으, 칼국수처럼 풀어지는 어둠! 암흑 속에서 하얗게 드러나는 집. 이 불끈거리는 예감은 무엇일까. 나는 헝겊 같은 배를 접으며 이 악물고 언덕에 섰다. 그리하여 풀더미의 칼집 속에 하체를 담그고 자정 가까이 걸어갔을 때 나는 성냥개비 같은 내 오른팔 끝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무서운 섬광을 보았다. 바람이여, 언덕 가득 이 수천 장 손수건을 찢어 날리는 광포한 바람이여. 이제야 나는 어디에서 네가 불어오는지 알 것 같으다. 오, 그리하여 수염투성이의 바람에 피투성이가 되어 내려오는 언덕에서 보았던 나의 어머니가 왜 그토록 가늘은 유리막대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는지를.

다음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폭풍의 밤마다 언덕에 오르는 일을 그만두었다. 무수한 변증의 비명을 지르는 풀잎을 사납게 베어 넘어뜨리며 이제는 내가 떠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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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형도를 내가 속한 세대의 시인으로, 내가 젊음을 보냈던 시대의 시인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사실은 지금은 이미 중년이 된 소설가 공지영보다도 나이가 많은 시인, 89년에 딱 서른의 나이로 심야영화관에서 사망한 시인이다. 89년에 나는 중학생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그를 내 세대의 시인으로 생각하기를 멈출 수 없다. 나보다 젊은 세대의 사람들도 이 시인을 자신들의 세대의 시인으로 간주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그건 확실히, 단순히 기형도가 요절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를 젊은 시절의 우상으로 만드는 그보다 깊은 그 무언가가 그의 시들 안엔 존재한다.

기형도의 시는 탁월한 비주얼을 자랑한다. '아으, 칼국수처럼 풀어지는 어둠!' 이라고 그가 말하면 정말로 어둠이 칼국수처럼 풀어지는 환영이 보인다. 그러면서 그 지긋지긋한 밀가루 냄새라던가 맛이라고는 도통 없는 그저 배불리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밀가루 덩어리가 갖는 다른 의미들까지가 순식간에 시 전체에 확 퍼지는 느낌이랄까.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을 완벽하게 만드는 심상들이 이 시 전체를 지배한다. 미친 광포한 바람, 펄럭이며 떨어지는 러닝 셔츠, 솟구치는 주사바늘, 절룩이며 돌아오는 누이, 풀어지는 어둠.

그러면서도 또한 그의 시어들은 아름다운 청각적 리듬을 자랑한다. '가파른 예각으로 울고 있는 유지 소리' 같은 구절은 두운이 잘 잡혀 있다. 산문시이지만 입으로 소리를 내어 읽어보면 3-4조 혹은 4-4조의 전통적 우리말 리듬이 살아 있다. 그의 시를 읽으면 눈으로 시를 보는 것 같고, 그의 시를 읽으면 시인의 나직한 목소리로 계곡물 소리처럼 낱말들이 귀 속으로 쏟아드는 것 같다. 

시집을 몇 권씩 사던 시절이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사춘기에 시인들은 유일하게 세상을 볼 줄 알고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무뎌진 나에게는, 시인들이란 나이를 먹고 먹어도 피를 토하는 듯이 그렇게 시를 쓰며 사는 얼마나 비극적인 인물들인가 하는 생각이 앞선다.

물론 시인도 나이를 먹는다. 세계관도 바뀐다. 시에도 여유가 들어가고 소재도 넓어지고. 그래도 나는 젊은 작가들의 젊은 시가 좋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세상, 지금 아니면 뭐든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고, 그런데 아무리 기다리고 노력해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위기감과 무력감. 이런 감정들이 잔뜩 장전된 젊은 시인들의 잘 쓰여진 시는, 무슨 말인지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정확히 모르겠는데도 (알 수 있으면 시가 아니지만) 순식간에 마음을 후려치며 우리 마음 속에서 수류탄처럼 폭발한다.

기형도의 시는 다 좋다. 다 좋은 시만 남길 수 있던 시인은 정말로 행복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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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틱낫한 스님 대표 컬렉션 3
틱낫한 지음, 최수민 옮김 / 명진출판사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완독하는 데 한 달 반쯤 걸렸으니까 읽는 데 시간이 꽤 많이 걸린 편이다. 첫 두 장은 재빨리 읽어내려갔지만 세상의 진리가 다 그렇듯 범상한 내용이라 별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또 스님의 제안이 좀 낯간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좀 더 읽어나가니까 비슷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는 것 같아서, 아 좋은 내용이라도 자꾸 들으면 지겨우니 요점만 간추려서 쓰시지, 이런 생각까지 하고 덮어두었다.

이 책에 이제 별 다섯을 주는 까닭은, 바로 이 책의 완만한 흐름 덕분에 실제로 이 책을 천천히 읽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옳고 맞은 참말이라도 그 말을 기꺼이 이해할 마음자세를 갖추기 전에는 그 말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기가 어렵다. 게다가 우리 마음 속에는 화가 이미 너무 많아서 화에 대한 내용을 읽는 것조차 때때로 화나고 짜증스런 일이 된다. 그래서 별로 어렵지도 글자가 빡빡하지도 않은 이 책을 읽는 데 두 달이 걸렸던 것이다.

어쩌다가 이 책을 책상 위에 두어서, 누구와 대판 싸우고 씩씩거릴 때마다 나는 이 책을 집어들고 몇 페이지씩 읽게 되었다. 물론 겨우 책 몇 페이지 읽었다고 돌연 부처가 되어서 다 용서해주마, 이런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최소한 나 자신의 마음은 가라앉힐 수가 있었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화를 낼 때 화를 내는 사람은 그게 나이건 타인이건 고통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는 스스로에게 고통이기 때문에 화를 내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도 맛보게 하려는 경향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는 그 자체로 행동의 힘이어서는 안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나는 했다. 어떤 분노(火)는 정당하고 또 아름답기까지 할 수도 있고 깨달음의 촉매가 될 수도 있지만, 오래 지속되면 본인에게나 타인에게나 화(禍) 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또 화를 표출해서 없앤답시고 괜히 베게를 때리고 전화를 집어던지고 그릇을 깨거나 하면서 다른 사물에 분통을 터트리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화는 사람을 폭력적으로 만들다. 왜나하면 사람은 상처를 입을 때 화를 내기 때문이고, 상처를 입으면 그 상처를 되갚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사 애꿎은 무생물에 혹은 집 강아지에게 화풀이를 한대도, 화가 길러내는 폭력성은 그런 방식으로 강화가 되기 때문이다. 험한 말도 쓰지 않는 것이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베게를 친다고 해봤자 진짜 복수는 되지 않으니까 더 화가 날 위험도 있다.]

화내고 열받는 일은 일상에 흔해빠진 일이라서 그에 관해 알아야 할 것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특히 습관의 힘이란 무서운 것이라고, 스님이 지적할 때, 나는 가슴을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왜 그런 경험이 누구나에게나 있을 것이다. 습관적 분노. 예를 들어, 엄마와 늘 싸우는 자식이 있다고 하자. 자식은 언제부터인가 부모와의 관계에서 언제나 일정한 행동패턴을 따라 반응하고 행동한다. 엄마가 이러이러한 말을 하면 항상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해석이 되고 그래서 이러이러한 반응을 보이면, 그러면 또 엄마는 저러저러한 방식으로 그 반응을 이해하고, 해서 맨날 그래왔듯이 언쟁이 터지고 싸움이 일어난다. 게다가 이런 일정 행동패턴을 이 모자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반복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어느 순간 동일 행동 패턴을 따라 반응하고 화를 내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되며, 심지어 후회를 하고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 후에도 비슷한 순간이 오면 동일한 우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나서 왜 그랬나 생각해보면, 종종 예전에 하던 식으로 습관대로 성을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사람과는 예를 들어 나의 자식 혹은 어머니와 나와의 관계처럼 복잡다단한 (서로 화로 상처주고 상처입힌) 과거가 없는데 왜 비슷하게 행동을 했을까, 하고 의아해하게 된다.

스님은 화를 다정함과 연민으로 다루라고 한다. 열받아 죽겠는데 무슨 얼어죽을 다정이냐고 하겠지만, 화가 고통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연민과 다정함이 그에 제일 효과적인 약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제 이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스님의 충고대로 내가 낯가지런 사랑의 편지를 써서 몇 년 내내 원수진 사람들에게 돌리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누가 나에게 화를 내거나 내가 넘치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이 될 때 나는 스스로에게 덜 고통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만 해도 상당한 수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마도 도서관에 반납한 후에는 이 책을 한 권 사서 책상 위에 늘 놓아두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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