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를 앞두고 있는 여름아.

 주말에 집에 와서는 선배들의 수시 입시 결과가 하나둘 씩 발표나던 지난 주 많이 힘들었다 했지. 성적이 상향 곡선이면 학생부종합전형을 쓰고, 성적이 정규분포곡선이면 논술전형을 써야한다는 선배들의 경험담이 머리에 콕 박히더라고. 

 

 성적이 오르락내리락했던 1학년 때와는 달리 약간은 상향 곡선을 그린 2학년인데다 지난 2학기 중간고사는 고등학교 시절에서는 가장 좋은 성적을 낸 너로서는 이번 기말이 얼마나 부담스럽겠니. 그러나 네 말대로 상향 곡선이면 학생부종합전형을 선택하면 되고, 정규분포곡선이거나 하향 곡선이되면 논술전형을 쓰면 되는 것일뿐 다른 의미는 더 없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 편하지 않겠느냐.

 

 대학에서 학생을 평가하는 기준을 도무지 모르겠다고. 서울대 수시에는 합격했는데 연고대는 떨어진 선배도 있다고 했지. 나도 모르겠다. 입학 사정관들이 너의 지난 12년을 어찌 생기부와 자소서 몇 장으로 평가할 수 있겠느냐. 인생을 판단하실 분 앞에 서기 전에 우리가 사람들에게 받는 평가들은 다 부질없더라. 지금은 대학 입시가 너무나 큰 산처럼 네 앞에 버티고 서 있지만, 긴 인생길에서 돌아보면 작은 언덕에 지나지 않을 것이야. 그러니 네 마음이 여유를 찾았으면 좋겠다.

 

 네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우리가 겪었던 다양한 일들이 문득 생각나는구나. 엄마는 그 때 부스러기라도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낮은 마음을 배우기 원하셨음을 깨달았단다. 네 학교를 거쳐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 그 과정 없었다면 엄마는 여기서 네가 겪는 훈련들을 덤덤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힘드었을 거야.  처음 보는 등수와 등급들 앞에서 네가 속상해할 때 '무슨 소고기도 아니고 아이들을 등급으로 나누냐?' 웃으며  농담할 수 있는 여유도 배웠지.

 

 내년에는 또 어떤 일들이 우리 앞에 펼쳐질 지 모르겠지만, 우리 가는 길은 항상 가장 선했고, 가장 최선이었음을 기억하자꾸나. 아직 봄이의 입시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말 하기는 뭣하다만 입시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지 않더냐.

 

 두려워하지 말거라. 네가 어려우면 남도 어렵다. 그까짓 점수 몇 점에 네 인생이 큰 차이 날 리 없다. 오히려 인생에서 큰 차이를 만드는 건 인사를 잘 하는지,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는지, 뭐 이런 거더라. 그러니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먼저할 줄 아는 아이가 되거라.

 

비오는 월요일 마음 차분해진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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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봄이의 수시 합격자 발표를 확인했다. 예비순위(7). 4명 모집인데 앞에 선 아이 7명이 포기를 해야 아이에게 기회가 온다는 뜻이다.(이럴 땐 숫자 7이 전혀 행운을 담은 숫자가 아니다.)

 입시 결과와 상관없이 여행을 떠나기로 했고, 어떤 결과에는 담담하려고 했었다. 다음 주 내내 충원합격자를 살펴봐야하는 상황이 좀 갑갑할 뿐 생각보다 나는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수능 시험 결과를 받았던 지난 2일 기가막힌 등급에도 웃어가며 맛있는 게장 정식을 먹으러 갔었고, 검역소에 가서 황열병 예방 접종을 했으며, 여행에 필요한 선그라스를 만들러갔었던 우리가 아니더냐. 다음 한 주도 그리 살자꾸나.

 

 인턴십을 하면서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원하던 과를 선택했으며, 소신 지원만 했던 결과가 이런 것이라면 받아들여야하지 않겠느냐. 공부가 부족했던 것은 우리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남은 일은 진인사대천명!

 기다림은 나보다 봄이에게 힘든 일일 것이다. 고등학교 입시도 마음 졸였는데 그보다 더한 일 앞에 선 아이의 마음 헤아려보면 내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음에 마음 아프다.

 

친구 관계에서 큰 산을 하나 넘고 있는 아이인데 늘 자기가 양보하고 참고 손해보며 자기를 잃고 살았던 아이 드디어 제 목소리를 내는 요즘인데 입시 결과로 다시 마음이 쪼그라들고 용기가 사라질까 걱정이다. 네 인생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

이 여행이 너와 나에게 그동안 털어내지 못했던 우리 발목 잡는 일들을 다 털어내고 돌아오는 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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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는 그동안 왜 네가 보낸 문자만 내 전화기가 놓쳐버리는지 알지 못했다. 혹시나 싶어서 고객센터에 물어봤는데 내가 너의 번호를 스팸등록해 두었기 때문이었다는 이유를 알고 나니 잠시 부끄럽더라. 나처럼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상담사는 스마트폰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실수로 이런 일을 겪는 사람들이 제법있다고 위로해 주었다.

 아빠가 겪은 일은 또 어떻고. 전원 버튼이 잘 눌러지지 않아 A/S를 받으러 갔다가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던 사진과 자료들을 다 날려버렸다. 역시 우리 가족은 아날로그형으로 살아야 하는데 수준에 맞지 않는 디지털형으로 살려고 하니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는구나.

 

 어쨌든 이젠  문자는 마음대로 주고 받을 수 있고, 시간만 잘 맞추면 통화도 할 수 있지만 우리의 대화가 이 디지털 세상에서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아쉬움이 마음에 남더구나. 그래서 사실은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허나 네가 편지를 받을 수는 있지만 부치지는 못한다는 사실에 또 직면하면서 어느쯤에선가 절충을 해야했고 그래서 찾아낸 것이 오래 묵은 알라딘의 이 서재였다.

 

 선배들이 수능이 끝나던 12일 저녁부터 벌써 고3 대접을 받았다며 (학교 식당에서 가장 먼저 저녁밥을 먹었다며 신나했었지.) 즐거워하던 아이야. 고3이 쓰던 자습실로 옮기고, 주말 기숙사 귀가 시간도 앞당겨졌고, 집에도 한 달에 한 번 의무외박일에만 올 수 있다고 했지.(그래서 주말마다 너를 데리러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니 기뻐해야 하는건가). 본관 앞 디데이 표시판도 너희들의 입시 날짜를 기준으로 바뀌었더구나.

 

 어쩌면 지금이 가장 긴장되겠구나. 너의 시간들이 아직은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순간,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때가 오기 전이니.

 여름아. 우리가 여기까지 오면서 겪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자. 네가 지금 여기 서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니. 고등학교 입시 방법을 거의 다 경험했던 파란만장했던 이 년 전이 떠오르는구나. 고등학교 입시 컨설턴트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 일들이 우리에게 의미없는 시간들이 아니었음을 너도 나도 기억하고 있지?

 

 걸어온 길이 걸어갈 길을 만들더구나. 너무 멀리 꿈꾸지 말고 그저 오늘 하루를 살자. 하루치 걸음을 내딛고 난 다음에는 후회하지도 말고. 그렇게 가다보면 어느 순간 그 날이 우리 앞에 와 있을 거다.

 

어제 내린 눈이 한 낮의 햇볕에 다 녹아버렸더라. 바람은 차갑지만 햇살이 바람을 이기는 걸 보면서 너에게도 이 햇살 한 조각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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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틈틈이 눈발이 날린다. 아이들은 창 밖을 한 번 보다가 내 얼굴 한 번 보다가, 도무지 수업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 하긴 나 역시 집중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제대로 펑펑 내렸다면 나는 그까짓 수업 한 시간, 없는 셈 치고 운동장에 뛰어나가 아이들과 함께 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 눈이 굵어지기도 했지만 이내 햇살이 비치고 눈은 녹아 운동장만 축축해졌다.

 

그러니까 40일 남았다.

한 일은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에 계약금을 140만원 넣은 것 밖에 없다.

아직 남은 일은 산더미다.

 

그 중에 가장 큰 일은 봄이의 대학 수시 합격자 발표겠다. 결과와는 상관없이 우린 여행을 떠나겠다는 마음으로 에약했지만, 솔직히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떠나고 싶다. 수능 점수를 기대할 것 없는 우리로서는 정시는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기에 수시 발표가 나는 12월 8일이 모든 것을 결정 짓는다. 아니, 3차 추가합격자 발표가 나는 18일까지 마음을 졸여야 하나?

 

수시 여섯 군데를 지원했던 지난 9월, 자소서를 다섯 개 썼다. 질문 세 개는 모든 대학이 같았으나, 네번 째 질문은 학교마다 달랐고, 앞 쪽 질문 세 개도 학교마다 조금씩 고쳐써야 했으니 나는 머리가 아팠다. 새벽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 씨름을 했다. 아이가 대충 쓴 글을 내가 다시 다듬었으니 그건 '자소서'가 아니라, '엄마소서' 쯤 되는 글이었다.

그런데 다섯 군데 자소서를 냈던 학교는 모두 1차도 통과하지 못하고 불합격 소식을 들어야했다. 어이없게도 면접까지 보고 온 학교는 오직 생활기록부만 제출했던 학교였다. 심지어 과도 약간은 보험처럼 마지막에 부랴부랴 선정해서 지원했던 거였다. 사람 일은 모를 일이다. 이젠 그거라도 합격해주면 감사하겠다는 간사한 마음이라니...

 

알라딘은 봄이의 첫 그림책 '무지개 물고기'를 구입한 곳이다. '무지개 물고기'를 읽던 아이는 시를 쓰고, 자서전을 졸업 작품으로 내며 고등학교 삼 년을 마무리하겠다는 아이로 자랐다. '무지개 물고기'는 조카의 책장으로 이사를 한 지 오래다.

 

남미 여행은 갑작스런 결정이었다. 입시가 끝나면 여행 가자 했고, 겨울이라 추우니 따뜻한 곳이 좋겠다 했고, 호주나 뉴질랜드 항공권을 알아보려고 지난 영국 여행 항공권을 구입했던 여행사를 기웃거리다 남미 단체 배낭 상품이 새로 나옸다는 것을 알았고, 아이와 내 바램의 공통 분모가 많길래 덥석 계약했다.

우리는 밤하늘 쏟아지는 별이 보고 싶고, 추운 건 싫고, 자연이 아름다왔으면 좋겠고, 그다지 위험하지 않았으면 했고(그건 파리 IS테러가 일어나기 전 계약한 것이라 온 세상이 불안정한 지금의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건이긴 하다...), 그런 사소한 꿈을 다 이룰 수 있는 여행이 있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까지 열두 시간, 거기서 페루의 리마까지 다시 열다섯 시간 비행을 견뎌낼 수 있을까. 두렵지만 닥치면 어떻게 되겠지. 작년 런던까지 열두 시간 비행도 어찌어찌 견뎠는데.

이번에는 비행시간만 두 배가 넘는다. 환승 시간도 여덟 시간이나 되고. 그래도 우리 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된다.

 

어쨌든 우리는 남미로 떠난다. 2016년 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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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눈이 내렸다. 겨울 아침 눈뜨고 창 밖에서 제대로 된 눈을 본 것이 얼마만인가? 부산과 이곳은 위도가 비슷하지 싶은데 그래도 큰 산이 가깝다고 눈에 인색했던 부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어제 저녁 산책 길 여름이가 눈발이 한 둘 날린다고 좋아할 때 ‘기대하면 실망이 더 크다. 그러다 말거야.’ 이랬는데. 여름이는 아침에 나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눈이 왔다네~ 눈이 왔다네~’이러면서 집안을 돌아다녔다.

 

눈이 온 건 기쁘다. 그것도 아주 조금만 쌓인 것은 더 기쁘다. 운전해서 출근해야 하는 가을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눈 온 기념으로 도시락 싸서 봄이와 여름이를 데리고 도서관에 왔다. 간간이 눈발 날리는 하루를 따뜻하고 편안하게 보내기에는 도서관만한 곳이 없다.

 

도서관! 이 도시의 도서관은 심히 사랑스럽다. 깨끗하고 널찍한데 조용하기까지 하다. 책상마다 친절하게 콘센트가 달려있어 노트북을 펴기도 좋다. 와이파이 인심도 넉넉하다. 인구가 적어서 그런지 대학교 바로 앞에 있는 도서관인데도 빈자리가 군데군데 보인다.

 

도서관에 오기 전 은행에 들렀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당한 일 나도 똑같이 겪었다. 카드번호와 비밀번호 빼고는 모든 정보가 다 새어나갔다는데 안심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침 9시부터 갔는데도 대기 번호가 27번이었다. 지점장이 나와서 귤이랑, 사탕을 돌리고는 인사를 꾸벅했다. 그래도 자기네 은행은 다른 곳과는 달리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정보는 새어나가지 않았다고, 그러니 비밀번호 변경이나 카드 해지하지 말고 안심하고 돌아가셔도 된다고, 문제가 생기면 자기가 다 책임지겠다고 그랬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말 한 마디가 빠졌다.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바쁜 고객들 아침부터 은행에 나오게 해서 죄송하다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었나? 변명만 줄줄이 늘어놓고, 그래도 우린 다른 두 곳보다 낫다니, 그게 책임자가 할 말인가? 잘못을 했을 때는 그저 솔직 담백하게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최선이다. 창구 직원이 차라리 나았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했고, 최대한 빨리 일처리를 해주겠다고 했다. 말이라도 그리하고 고개를 숙이는데 뭐라 하겠는가. 웃으며 당신 잘못도 아닌데 이번 일로 수고가 많다고 한마디 했더니 고마워하더라.

 

 

봄이와 떠날 여행 항공권 결재는 지난 목요일에 했다. 이곳저곳 비교하다 ‘ㅌㅇㅇ’에서 결재했다.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결재하는 건 다 비슷한데 그 곳만은 좀 달랐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ㅌㅇㅇ’가 마음에 있었다. 단체배낭여행으로 유명한 곳이어서 그걸로 가 볼까 했는데, 날짜가 맞지 않아 호텔팩을 고민하다, 내친김에 자유 여행이 되어 버렸다.

 

두 곳에서 내가 원하는 날짜의 항공권을 예약해 두었는데, 한 곳에서는 ‘언제까지 결재하지 않으면 예약이 자동 취소된다’는 협박 비스무리한 문자만 달랑 왔다. 출발 공항을 바꿀 수 있나 싶어서 전화로 물어봤더니 그런 건 인터넷에서 내가 알아봐야 하는 일이지 자기들이 해주는 거 아니란다. 인터넷으로만 영업해서 항공권이 싼 거라면서.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항공권이 가장 싸니 어쩔 수 없이 그걸 사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ㅌㅇㅇ’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예약한 항공권을 곧 결재해야 한다며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다. 다른 곳에서 더 싼 항공권을 찾았노라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내가 다른 곳에서 예약한 것과 똑같은 조건의 항공권을 찾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출발지와 도착지를 서로 다른 공항으로 바꿔주기까지 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경유하는 공항에서 무료로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 이용권도 대신 신청해서 받아주겠단다. 그러니 내 선택은 당연히 ‘ㅌㅇㅇ’였다.

 

은행에서도, 항공권을 결재하면서도 적절한 말 한 마디의 중요성, 마음 깊이 새겼다. 내 입에서 흘러나가는 말은 어떤 말일까 오늘 내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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