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덜린의 그집은 삼층이다  (오규원)
--튀빙겐에서--

그집은 넥카강변에 있다
그집은 지상의 삼층이다
일층은 땅에
삼층은 뾰죽하게 하늘에
속해 있다 그 사이에
사각의 창이 많은
이층이 있다
방안의 어둠은 창을 피해
서 있다
회랑의 창은 모두
햇빛에 닿아 있다
그집은 지상의 삼층이다
일층은 흙 속에
삼층은 둥글게 공기 속에 있다
이층에는 인간의 집답게
창이 많다
넥카강변의 담쟁이 넝쿨 가운데에
몇몇은
그집 삼층까지 간다



시인 황인숙의 산문집을 읽고 있는데 이런 시가 나왔다.
오규원은 시인의 은사라고 했다. 선생과 학생으로 처음 강의실에서 만났던 때의 일화가 재미있다.

당시 마흔 하나이던 오규원 선생은 강의실을 채운 학생들에게 앞으로 뭘 어떻게 쓰고 싶은지 돌아가며 이야기해보라고 했단다. 차례가 되어 젊은 황인숙이 여차여차하다고 대답을 하자, 선생은 "여기 왜 이렇게 겉멋 든 사람이 많아!"라고 고함을 쳤다고.  하필 자기 순서 직후에 그런 말을 듣고 불끈한 시인은 자기도 모르게 "뭐라고!"라고 맞고함을 쳤단다. 선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레 강의로 돌아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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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5-28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일화가 너무 재미있네요. ^^

검둥개 2006-05-28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감사합니다. ^^
서재 이미지 멋진데요. (특히 헤어스탈이!)
철학자 누구신가요? ^^

balmas 2006-05-28 0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힛!
스피노자 캐리커처랍니다.
그럴 듯한가요? ^^

잉크냄새 2006-05-28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오랫만이네요.
참 부러운 사진을 가지고 오셨군요.

검둥개 2006-05-28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아주 그럴 듯 합니다. ^^

잉크냄새님 ㅎㅎ 저두 부러운 사진이야요. 구글에서 횔덜린 집 이렇게 이미지 서치해서 찾아봤답니다. 시를 읽고보니 어떤 집인지 참을 수 없이 궁금하야. ^^

진주 2006-05-28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기속에 둥글게 떠있는 삼층방을 제게 준다면,
창가에 마른꽃가지를 자잘하게 걸고 둥그런 벽을 따라 맞춤제작한 침대만큼 넉넉한 둥그런 소파를 들여놓을 거에요. 햇빛이 들어오면 속옷같이 얇다란 옷에 맨발로 뒹굴어야죠. 조금 떨어진 곳엔 둥근 티데이블도 하나 놓고요. 한쪽에는 책상을 놓고 책꽂이를 놓아야죠. 반그늘 식물들도 적당히 들여놓고요. 그러니까 여긴 아무나 들여놓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서재로 만들고 싶네요. 횔덜린씨, 3층만 세 좀 놓지요? ㅋㄷㅋㄷ

검둥개 2006-05-28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주님! 계획이 너무 멋지십니다. 이참에 그럼 저랑 같이 임대하시죠. ^.^
저도 삼층방에 그렇지 않아도 눈독을 들이구 있던 참이었걸랑요.

어머 올리브님, 이게 얼마만여요!!! (와락, 부비부비)
잘 지내셨지요? 정말 2006년도 반이 지났다니 믿기지 않어요.
ㅎㅎ 저는 올리브님과 진주님이 함께 하얀 린넨 원피스를 입고 맨발 차림으로 독서하시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너무 멋있어요 헤헤.

로드무비 2006-05-29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껌정 박스티에 회색 추리닝이야요.^^

검둥개 2006-06-05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브님 로드무비님, 저와 선호도가 비슷하시군요.
전 회색 추리닝 반바지에 낡은 티셔츠요 ^.^
 

파란여우님의 서재에 가서 "구글은 알라딘을 총애해"라는 글을 읽었다.
과연? 정말로 많은 분들이 네티즌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계셨다.
(웹서치엔진의 정렬순은 대개 광고 빼면 인기순이다.)

심심한 김에 마지막으로 "검둥개"를 쳐 봤다.
다음과 같은 결과가 첫 화면의 마지막 줄에 등장했다.

CYBER HAKWON24-Millennium Power Education(유머게시판) - [ Translate this page ]

첫 번째 검둥개가 좋아하며 말했다. "전 백견이 되고 싶어요." 두 번째 검둥개도 입 이 귀까지 찢어지며 말했다. "전 하얗게요~." 그렇게 99 마리의 검둥개들이 소원을 ...
www.im4u.co.kr/h_board/h_gen_2/h_gen2_view. php?id=3988&p_hakwon_cd=im4u000120&code=h_gen_005&... - 7k - Cached - Similar pages

궁금해서 클릭해봤다.

 

검둥개 100마리가 우르르 길을 가다가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발견하게 되었다.

램프는 동화에서처럼 문지르자마자 "펑!" 하고 소리가 났고 이어서 지니가 나왔다.

지니가 말했다.

"너희들의 소원을 한 가지씩 들어주겠다."

첫 번째 검둥개가 좋아하며 말했다.

"전 백견이 되고 싶어요."

두 번째 검둥개도 입이 귀까지 찢어지며 말했다.

"전 하얗게요~."

그렇게 99 마리의 검둥개들이 소원을 말했다.

"전 흰 개요."

"백견."

"하얗게."

"백색 강아지요."

그렇게 드디어 100번째 검둥개가 소원을 빌 차례가 되었다. 지니가 말했다.

"그래, 넌 뭘 원하느냐?"

그러자 100번째 검둥개는 성질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것들 모두 검둥개로 되돌려 주세요!"

재밌다. 오호호.
심심한 김에 "검정개"도 쳐봤다.

동물구조관리협회 - [ Translate this page ]

검정개 보호중 입니다. 대형견이구요.여긴 서울시 강남구 개포동 입니다. ... 찾고 계시다면 큰검정개 라는 말만 봐도 연락주실꺼에요.연락 빨리 주세요. ...
www.karama.or.kr/bbs/update_miss.asp?BbsNo=2& No=20384&page=5&SearchField=&SearchkindName=... - 38k - Cached - Similar pages

 

아이고. 그 멍멍이 주인 찾아갔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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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06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둥실둥실 검둥개 헌책방 **알라딘 나의서재**
둥실둥실 검둥개 헌책방 http://my.aladdin.co.kr/blackdog ... 장어를 처음 먹은건 누구냐? / 계란을 처음 먹은건 누구냐? / 어쨌든 아주 배가 고팠던 모양이구나 --이 상, "장어를 처음 먹은건 누구냐? " - 검둥개 ...
www.aladdin.co.kr/blog/ mylibrary/wmyroom.aspx?CNO=765787154 - 36k -

검둥개 2006-05-06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가 검색하면 절대 안 나와요. >.<
만두님은 바로 나오는데!

파란여우 2006-05-0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도 1위!!^^

2006-05-06 2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6-05-06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1위...휴...
이름을 바꿔볼까 진지하게 고민중이어요.

파란여우 2006-05-06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안돼요!
우리 ㅍ씨의 가문에 든든한 빽이신..^^
바꾸려면 제가 바꿔야죠.

마태우스 2006-05-06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마지막 검둥개 참....^^ 근데 1위라는 게 가장 먼저 뜬단 얘기죠?

검둥개 2006-05-07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네, 1위가 가장 먼저 뜨는 거죠. ^ .^ 잘 지내셨죠?
형제 기생충학자의 실험에 대한 글 감명 깊게 읽었어요.

아니 여우님 이름 바꾸지 마셔용.
제가 저 마스코트를 얼매나 좋아하는데용!

플레져님 ㅎㅎㅎ 1위 등극을 축하드립니다.
이름 바꾸셔도 여전히 1위를 하실테니 별 효험이 없을 것 같아요. :-)

속삭님 함 해보세요.
해리는 잘 지낸답니다. ^. ^

2006-05-07 0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6-05-07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제가 희한하게 그 글을 놓쳤더라고요. 신기하죠?
제 일상이 좀 두서가 없어요. >,<
그런데 님은 또 어째 그리 뜸하셔요?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흔적을 남겨주세요.
 

아는 사람 중에 가끔씩 자신의 근황을 이메일로 알리는 이가 있다. 그 사람과 나는 한 때 가까운 친구였으나 개인적 연락이 없이 지낸지 오래되었다. 가끔씩 그의 근황이 이런 이메일로 출현한다. 그 이메일은 그런데 나에게만 오는 이메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인들에게 한꺼번에 보내진 집단 이메일이다. 주소를 보아하니 그 이메일들은 나를 포함 5-10사람에게 수신된다. 다른 수신자들은 모두 내가 모르는 이들이다. 그들도 물론 나를 모른다. 언제부터 이런 집단 이메일이 근황을 알리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나 기억을 더듬어본다. 한 때는 가까웠으나 언제부턴가 소식이 감감해진 사람들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인연을 유지하는 것이 아마도 이런 집단 이메일의 목적일게다.

이런 집단 이메일을 받을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그 이메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나는 이러이러하게 지내고 있다, 이런이런 변화가 있었다, 라는 보고 혹은 선언? 다수에게 보내진 그 메세지 안에는 특정개인인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니, 라는 안부인사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사려깊은 이라면 메세지 안에  "모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같은 두루뭉수리한 한 줄 인사를 쳐넣을지도 모른다. 그 이메일을 받은 사람들은 전부 그 '모두' 안에 들어간다. 이 이메일 덕분에 수신자의 정체성은 졸지에 발신자 X의 지인으로 규정되고, 수신자들은 엉겁결에 발신자 X의 지인 그룹 멤버가 된다. 나와 X의 관계는 더이상 개인과 개인의 관계라기보다는, 차라리 다수 팬그룹과 한 명의 인기인, 다수 유권자와 한 명의 정치인 사이의 관계와 유사해진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이메일을 보내는 것일까? 불특정 다수에게 발송되는 집단광고메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한 개인을 향해 보내진 것도 아닌 애매모호하고 아리송한 메세지. "딱 너에게만 알리는 것은 아니지만 발신자 X의 근황은 이러이러하다"라고 말하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이렇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줘"라고 간청하는 모순. 고압적 태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애정을 갈구하는 상태. "너는 어떻게 지내니" 라고 묻는 대신에 "나는 이렇게 지내는데"라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내게 연락하렴"이라고 숨어서 속삭이는 메세지.

이런 집단 이메일의 진짜 목적은 효율성이 아니라 과시다. 자신은 정말로 개인적 이메일을 보낼 시간이 없는, 너무 바쁜 (고로 중요한 인물이라는) 메세지. 그러나 정말 그렇게 바쁘다면 어떻게 그런 이메일을 보낼 시간은 생겼는지? 한편으로는 과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집단 이메일의 半익명성 뒤로 숨으려는 심약함. "딱 너에게만은 아니지만"이라고 명시했으므로, 답장의 부재는 내 침묵의 초대에 대한 뚜렷한 거절이 될 수 없다는 이 해석의 편리함. "딱 너에게만은 아니지만"이라는 거만한 선언의 뒷면에 박음질된  "누구든지 내게 관심이 있다면"하는 막막함.

집단 이메일은 나를 헛갈리게 한다. 발신인은 나의 답신을 원하는가? 아니면 나의 주소는 그저 그의 많은 수신인들 중에 하나로 끼워져 있을 뿐인가? 집단 이메일이 내게 배분하는 앎은 언제나 한 가지다: 나는 발신인을 더이상 모르고 그도 그렇다는 사실. 정 궁금하면 그냥 전화나 한 통 할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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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5-05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 기미연이라는 친구가 복사한 편지를 제게 줬어요.
자기는 친구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를 모두 간직한다면서.
전 그런 '자기애'가 좀 징그럽게 느껴졌던 것 같네요.
어린 나이에도......
검둥개님의 오랜만의 글, 역시나 재밌습니다.
날카로우셔.^^

검둥개 2006-05-05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라, 로드무비님은 역시 그 때부터도 팬이 많으셨군요. ^.^
원래 하이틴 시절에 이상한 짓 많이 하잖아요. (ㅎㅎ 전 지금도 그 나이 또래 애들이 징그러워요. 볏은 안 돋았지만 털갈이는 다 한 중닭 같다고나 할까 ㅎㅎ)
정말 재밌게 읽으셨어요? 사실 전 쓰고 나서 좀 오바했군, 이렇게 생각했어요.
전 자기애를 좀 키워야되는데 헤헤헤. :)

paviana 2006-05-05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그사람의 성의문제네여.설령 그렇게 보내고 싶더라도 숨은 참조라는 좋은 기능이 있는데.....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이멜주소까지 노출된다는것 자체가 전 기분이 별로 일거 같아요...
잘 지내시죠? ㅎㅎ

검둥개 2006-05-06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 잘 지내셨죠? 저는 기말이라 허덕허덕. ^.^ "일용잡급"이라 직장에서도 허덕허덕이어요. 그런데 숨은참조 기능이 있다는 것을 저는 몰랐나이다. 아마 메일을 보내는 그 사람도 혹시 모르는 것이 아닐까요? (저 컴맹이죠? :-)

2006-05-06 2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6-05-07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제가 시**한 것은 아니겠지요? ^^;;;
저두 스팸 싫어요. 참치캔이 훨 좋아요.
근데 이왕이면 멍멍, 하시지? =3=3=3=
 

도저히 리뷰를 쓸 것 같지 않다는 건전한 판단에 입각해서 독서의 기록이라도 남긴다는 취지에서 쓴다.

지금 읽고 있는 책들은 둘 다 한양대에서 서양사를 가르치는 임지현 교수의 것이다.


<이념의 속살> : 현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속에서 작동하는 민족주의와 전체주의를 날카롭게 가격하는 그의 문제의식은 읽기에 신선하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다보면 반복되는 예화와 주장이 지루함을 준다. 그가 박사 학위 딸 때까지 한 공부로 평생을 우려먹는 교수들 중의 한 명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만과 편견> : 학자들은 역시 대화를 해야 된다. 코넬대 동아시아학 교수인 사카이 나오키와 임지현 교수와의 대담을 묶은 책이다. 비슷한 학문적 관심사를 지녔으나 연구분야가 조금 다르고 (역사와 문학) 서로를 경원시하는 두 나라, 한국과 일본, 국적을 지닌 두 학자의 대화가 생생하고 긴장감이 넘친다. "민족, 인종, 국가, 성, 계급이라는 근대의 다섯가지 장벽에 대한 지식인의 예리한 통찰"이라는 좀 낯간지러운 광고문구가 박혀 있기는 하지만 ---지식인이 꼭 예리한 통찰만 하란 법이 있나?---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 대담집은 뒤늦게 읽었지만 그래서 읽는 재미가 더 배가되었던 것 같다.

 


 

 이 네 권의 산문집들은 함께 읽어서 흥미로웠다. 금방 보면 알 수 있듯이, 배열은 나이 순이다.

  

 

 

 

 

김병익의 산문집은 도대체 왜 골라들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이 책은 90년대 중반에 그가 여기 저기 언론에 개재한 쪽글들의 모음집이다. 그런데 도대체 출전을 알 수 없다. 쪽글들을 모아서 펴낼 때는 출전을 좀 밝혀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을 다 읽은 것은 순전히 저 길게 늘어지고 주어와 술어 간의 관계가 종종 불분명해지는 오래된 문체가 주는 친숙함에 혹해서였다. (좋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김훈의 책을 읽은 것은 거의 개안의 경험이었다. 왜 이 명석한 기자 /작가의 글이 내게 늘 매혹과 찜찜함을 함께 안겨주었나를 확실히 발견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김훈의 개별자의 생존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므로 (그가 말하기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거나 주접을 떨지 마라. 돈을 벌어라. 돈과 밥은 지엄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존의 기본조건이므로") 기존 사회의 부조리한 질서에 대한 비판은 그에 따르면 "코흘리개 장난"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에서 먹고사는 일의 지난함을 강조하다가 그에 그만 짓눌려버린 그의 지배적 정서는, 그래서 속되게 표현하자면, "내가 이 x같은 세상에서 니들을 먹여살리려고 영혼까지 팔아먹으며 얼마나 뼈빠지게 일하는데"를 뇌까리는 가장(=사내)의 비장함과 우월함이다. 이 비장함과 우월함의 정서 속에서 사회의 부조리는 비관과 탄식의 대상은 될지언정 비판과 반성의 과녁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글 속에서 세상 사는 일의 복잡함과 머리 아픔이란 낡은 주제는 비장함을 불러일으키는 찬란한 수사로 채색되고, 글의 끝은 시적이지만 텅빈 문장으로 마감된다. 먹고사는 일의 구체성을  강조하다 못해 과장하는 사람의 글이 감정의 과부하로 종결되는 이 아이러니!

그래서 진중권이 "그런데 이 정도의 꿈도 꾸어서는 안 된단 말인가? 왜 우리에게서 꿈꿀 자유마저 앗아가려 하는 걸까?"(250쪽)라고 말할 때, 그는 나의 영웅이다. 생각하는 자의 꿈처럼 해방적인 것은 없다.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다른 한편으로는 크고 작은 집단주의. 이 둘의 기괴한 결합이 평균적 한국인의 '정체성'이다. ...... 한국인의 정체성은 패거리의 정체성이다. '에고'는 있어도 '주체'는 없다. 그리하여 제 조그만 이익을 지키는 데에는 남에게 질세라 악착같이 달려들어도, 정작 자기의 견해를 얘기해보라고 하면 변변히 제 생각을 말로 풀어낼 줄 모른다. 우리 사회에는 '집단'은 있어도 '사회성'은 없다. 한국사람들이 갖고 있다는 그 친절함은 정확하게 자기가 속하여 친분이 있는 집단의 동그라미에서 멈춘다.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당하든, 평균적인 한국인은 그들에게 아무 연대의식도 느끼지 못한다. 슬프지만 그게 우리의 자화상이다. ...... 근대적 주체가 되려면 먼저 쓸데 없이 자신을 원소로 포함시키려 달려드는 크고 작은 집단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야 한다. ...... 이런 개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가능하다. 다만 인간관계의 점성이 높은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사는 게 좀 피곤할 뿐이다." (250-251쪽)

진중권은 너무 세다 싶은 사람은 고종석을 읽으면 된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문체의 그 건조함이 나는 너무나 마음에 든다. (김훈의 웅장한 감상주의와 비교해볼 때 특히!) 합리적인 사람은 건조할 줄 알아야 한다. 진중권이 위에서 잘 설명해놓은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더. 그런데 그렇다보니 어째 그의 소설은 지루할 듯 싶어 손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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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0 0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4-10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웅장한 감상주의
-생각하는 자의 꿈처럼 해방스러운 것은 없다

멋집니다. 검둥개님!^^

2006-04-10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paviana 2006-04-10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그동안 많이 읽으셨네요.ㅎㅎ 잘 계신거지요?

2006-04-10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터라겐 2006-04-10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한권도 안 봤어요.. 흐흐 검둥개님.. 잘 지내고 계시는거죠? 아 이젠 점점 책이 멀어지고 있답니다.. 올해 목표치는 위대했으나 이루지 못할 계획으로 끝날것 같아요

검둥개 2006-04-11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 오랜만여요. ^^ 잘 지내셨죠?
바쁜 와중에 책 읽기 참 힘들어요. 저두 몇 달간 책들을 들었다 놨다 했다지요.

속삭님 읽다가 말다가 하기를 너무 오래 반복하다보니 그랬답니다. :)

파비아나님, 시험 때문에 죽겠어요. ㅠ.ㅠ
그동안 잘 계셨죠? ^^

속삭님 으흐흐 김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아요. ^ .^
전 김훈을 흠모하다가 정이 똑 떨어진 케이스!

로드무비님, 감사합니다.
제가 원래 좀 멋지잖아요. 헤헤 >.< =3=3=3

속삭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읽었어요.
그냥 심심하게 읽었어요. ^ .^ 고종석의 문장은 정확하다는 님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건조하다고 말할 때 의미한 바가 그거예요. 그리고 저는 그게 좋다고 생각해요. 한국인의 문체치고는 드문 문체죠. 과장이 없고 단순하면서 정확한 문장을 쓰려면 연습과 수련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고종석의 소설이 좋은가요? 기회가 닿으면 꼭 읽어보겠습니다. 맛난 것은 많이 드셨나요?
 

남편이 주말에 어디를 멀리 갔다.
혼자 있는 시간의 이 고즈넉함!
평소엔 연기처럼 날아가버리던 주말이 써도 써도 한이 없게 넉넉하다.
불평 없이 무거운 쓰레기도 내다 버리고,
청소도 하고,
세탁기도 벌써 세 번이나 돌렸으며,
심지어 꼬질한 멍멍이 목욕까지 시켰다.
아무도 없으므로 내가 나를 챙긴다는 이 당연함!
인간은 배반하는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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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4-10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오랜만이어요.
주말 멋지게 보내셨군요.
전 청개구리과라 누가 뭐 하라고 하면 안해요.
내가 하고 싶을 때.
ㅎㅎ 하고 싶을 때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요.^^

진주 2006-04-10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 년수가 길어질 수록..
혼자만의 고즈넉함이 좋아진다는 게 문제가 되는 거 같아요.^^;
검둥개님, 너무 오랫만이에요. 검둥개가 이젠 흰둥개가 되었나요? 히히

검둥개 2006-04-11 0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멋지게 보냈다구요? 사실은 시험이 월요일인데 준비도 안 하고 청개구리처럼 집안 청소하다가 다 망쳤다구요. ㅠ.ㅠ 근데 그 과목은 정말 관심이 안 가더라고요. 게다가 뭘 달달 외우라고 하니까 발끈하는 마음에 그만! ^^;;; 시험을 망치고도 그런데 이젠 반성이 안 되는구만요.

진주님 히히 전 혼자만의 고즈넉함을 좋아하기엔 년수가 넘 짧은디 어쩌믄 좋아요?
진주님도 잘 계셨죠? 요즘 책을 많이 못 읽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