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리뷰를 쓸 것 같지 않다는 건전한 판단에 입각해서 독서의 기록이라도 남긴다는 취지에서 쓴다.
지금 읽고 있는 책들은 둘 다 한양대에서 서양사를 가르치는 임지현 교수의 것이다.
<이념의 속살> : 현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속에서 작동하는 민족주의와 전체주의를 날카롭게 가격하는 그의 문제의식은 읽기에 신선하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다보면 반복되는 예화와 주장이 지루함을 준다. 그가 박사 학위 딸 때까지 한 공부로 평생을 우려먹는 교수들 중의 한 명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만과 편견> : 학자들은 역시 대화를 해야 된다. 코넬대 동아시아학 교수인 사카이 나오키와 임지현 교수와의 대담을 묶은 책이다. 비슷한 학문적 관심사를 지녔으나 연구분야가 조금 다르고 (역사와 문학) 서로를 경원시하는 두 나라, 한국과 일본, 국적을 지닌 두 학자의 대화가 생생하고 긴장감이 넘친다. "민족, 인종, 국가, 성, 계급이라는 근대의 다섯가지 장벽에 대한 지식인의 예리한 통찰"이라는 좀 낯간지러운 광고문구가 박혀 있기는 하지만 ---지식인이 꼭 예리한 통찰만 하란 법이 있나?---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 대담집은 뒤늦게 읽었지만 그래서 읽는 재미가 더 배가되었던 것 같다.
이 네 권의 산문집들은 함께 읽어서 흥미로웠다. 금방 보면 알 수 있듯이, 배열은 나이 순이다.
김병익의 산문집은 도대체 왜 골라들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이 책은 90년대 중반에 그가 여기 저기 언론에 개재한 쪽글들의 모음집이다. 그런데 도대체 출전을 알 수 없다. 쪽글들을 모아서 펴낼 때는 출전을 좀 밝혀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을 다 읽은 것은 순전히 저 길게 늘어지고 주어와 술어 간의 관계가 종종 불분명해지는 오래된 문체가 주는 친숙함에 혹해서였다. (좋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김훈의 책을 읽은 것은 거의 개안의 경험이었다. 왜 이 명석한 기자 /작가의 글이 내게 늘 매혹과 찜찜함을 함께 안겨주었나를 확실히 발견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김훈의 개별자의 생존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므로 (그가 말하기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거나 주접을 떨지 마라. 돈을 벌어라. 돈과 밥은 지엄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존의 기본조건이므로") 기존 사회의 부조리한 질서에 대한 비판은 그에 따르면 "코흘리개 장난"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에서 먹고사는 일의 지난함을 강조하다가 그에 그만 짓눌려버린 그의 지배적 정서는, 그래서 속되게 표현하자면, "내가 이 x같은 세상에서 니들을 먹여살리려고 영혼까지 팔아먹으며 얼마나 뼈빠지게 일하는데"를 뇌까리는 가장(=사내)의 비장함과 우월함이다. 이 비장함과 우월함의 정서 속에서 사회의 부조리는 비관과 탄식의 대상은 될지언정 비판과 반성의 과녁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글 속에서 세상 사는 일의 복잡함과 머리 아픔이란 낡은 주제는 비장함을 불러일으키는 찬란한 수사로 채색되고, 글의 끝은 시적이지만 텅빈 문장으로 마감된다. 먹고사는 일의 구체성을 강조하다 못해 과장하는 사람의 글이 감정의 과부하로 종결되는 이 아이러니!
그래서 진중권이 "그런데 이 정도의 꿈도 꾸어서는 안 된단 말인가? 왜 우리에게서 꿈꿀 자유마저 앗아가려 하는 걸까?"(250쪽)라고 말할 때, 그는 나의 영웅이다. 생각하는 자의 꿈처럼 해방적인 것은 없다.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다른 한편으로는 크고 작은 집단주의. 이 둘의 기괴한 결합이 평균적 한국인의 '정체성'이다. ...... 한국인의 정체성은 패거리의 정체성이다. '에고'는 있어도 '주체'는 없다. 그리하여 제 조그만 이익을 지키는 데에는 남에게 질세라 악착같이 달려들어도, 정작 자기의 견해를 얘기해보라고 하면 변변히 제 생각을 말로 풀어낼 줄 모른다. 우리 사회에는 '집단'은 있어도 '사회성'은 없다. 한국사람들이 갖고 있다는 그 친절함은 정확하게 자기가 속하여 친분이 있는 집단의 동그라미에서 멈춘다.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당하든, 평균적인 한국인은 그들에게 아무 연대의식도 느끼지 못한다. 슬프지만 그게 우리의 자화상이다. ...... 근대적 주체가 되려면 먼저 쓸데 없이 자신을 원소로 포함시키려 달려드는 크고 작은 집단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야 한다. ...... 이런 개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가능하다. 다만 인간관계의 점성이 높은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사는 게 좀 피곤할 뿐이다." (250-251쪽)
진중권은 너무 세다 싶은 사람은 고종석을 읽으면 된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문체의 그 건조함이 나는 너무나 마음에 든다. (김훈의 웅장한 감상주의와 비교해볼 때 특히!) 합리적인 사람은 건조할 줄 알아야 한다. 진중권이 위에서 잘 설명해놓은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더. 그런데 그렇다보니 어째 그의 소설은 지루할 듯 싶어 손이 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