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 중에 가끔씩 자신의 근황을 이메일로 알리는 이가 있다. 그 사람과 나는 한 때 가까운 친구였으나 개인적 연락이 없이 지낸지 오래되었다. 가끔씩 그의 근황이 이런 이메일로 출현한다. 그 이메일은 그런데 나에게만 오는 이메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인들에게 한꺼번에 보내진 집단 이메일이다. 주소를 보아하니 그 이메일들은 나를 포함 5-10사람에게 수신된다. 다른 수신자들은 모두 내가 모르는 이들이다. 그들도 물론 나를 모른다. 언제부터 이런 집단 이메일이 근황을 알리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나 기억을 더듬어본다. 한 때는 가까웠으나 언제부턴가 소식이 감감해진 사람들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인연을 유지하는 것이 아마도 이런 집단 이메일의 목적일게다.

이런 집단 이메일을 받을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그 이메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나는 이러이러하게 지내고 있다, 이런이런 변화가 있었다, 라는 보고 혹은 선언? 다수에게 보내진 그 메세지 안에는 특정개인인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니, 라는 안부인사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사려깊은 이라면 메세지 안에  "모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같은 두루뭉수리한 한 줄 인사를 쳐넣을지도 모른다. 그 이메일을 받은 사람들은 전부 그 '모두' 안에 들어간다. 이 이메일 덕분에 수신자의 정체성은 졸지에 발신자 X의 지인으로 규정되고, 수신자들은 엉겁결에 발신자 X의 지인 그룹 멤버가 된다. 나와 X의 관계는 더이상 개인과 개인의 관계라기보다는, 차라리 다수 팬그룹과 한 명의 인기인, 다수 유권자와 한 명의 정치인 사이의 관계와 유사해진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이메일을 보내는 것일까? 불특정 다수에게 발송되는 집단광고메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한 개인을 향해 보내진 것도 아닌 애매모호하고 아리송한 메세지. "딱 너에게만 알리는 것은 아니지만 발신자 X의 근황은 이러이러하다"라고 말하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이렇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줘"라고 간청하는 모순. 고압적 태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애정을 갈구하는 상태. "너는 어떻게 지내니" 라고 묻는 대신에 "나는 이렇게 지내는데"라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내게 연락하렴"이라고 숨어서 속삭이는 메세지.

이런 집단 이메일의 진짜 목적은 효율성이 아니라 과시다. 자신은 정말로 개인적 이메일을 보낼 시간이 없는, 너무 바쁜 (고로 중요한 인물이라는) 메세지. 그러나 정말 그렇게 바쁘다면 어떻게 그런 이메일을 보낼 시간은 생겼는지? 한편으로는 과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집단 이메일의 半익명성 뒤로 숨으려는 심약함. "딱 너에게만은 아니지만"이라고 명시했으므로, 답장의 부재는 내 침묵의 초대에 대한 뚜렷한 거절이 될 수 없다는 이 해석의 편리함. "딱 너에게만은 아니지만"이라는 거만한 선언의 뒷면에 박음질된  "누구든지 내게 관심이 있다면"하는 막막함.

집단 이메일은 나를 헛갈리게 한다. 발신인은 나의 답신을 원하는가? 아니면 나의 주소는 그저 그의 많은 수신인들 중에 하나로 끼워져 있을 뿐인가? 집단 이메일이 내게 배분하는 앎은 언제나 한 가지다: 나는 발신인을 더이상 모르고 그도 그렇다는 사실. 정 궁금하면 그냥 전화나 한 통 할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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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5-05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 기미연이라는 친구가 복사한 편지를 제게 줬어요.
자기는 친구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를 모두 간직한다면서.
전 그런 '자기애'가 좀 징그럽게 느껴졌던 것 같네요.
어린 나이에도......
검둥개님의 오랜만의 글, 역시나 재밌습니다.
날카로우셔.^^

검둥개 2006-05-05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라, 로드무비님은 역시 그 때부터도 팬이 많으셨군요. ^.^
원래 하이틴 시절에 이상한 짓 많이 하잖아요. (ㅎㅎ 전 지금도 그 나이 또래 애들이 징그러워요. 볏은 안 돋았지만 털갈이는 다 한 중닭 같다고나 할까 ㅎㅎ)
정말 재밌게 읽으셨어요? 사실 전 쓰고 나서 좀 오바했군, 이렇게 생각했어요.
전 자기애를 좀 키워야되는데 헤헤헤. :)

paviana 2006-05-05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그사람의 성의문제네여.설령 그렇게 보내고 싶더라도 숨은 참조라는 좋은 기능이 있는데.....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이멜주소까지 노출된다는것 자체가 전 기분이 별로 일거 같아요...
잘 지내시죠? ㅎㅎ

검둥개 2006-05-06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 잘 지내셨죠? 저는 기말이라 허덕허덕. ^.^ "일용잡급"이라 직장에서도 허덕허덕이어요. 그런데 숨은참조 기능이 있다는 것을 저는 몰랐나이다. 아마 메일을 보내는 그 사람도 혹시 모르는 것이 아닐까요? (저 컴맹이죠? :-)

2006-05-06 2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6-05-07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제가 시**한 것은 아니겠지요? ^^;;;
저두 스팸 싫어요. 참치캔이 훨 좋아요.
근데 이왕이면 멍멍, 하시지? =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