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표지의 파일 - 임현정


그에 대한 기억들은 스테이플러로 모서리가 찍혀

얌전히 스크랩된다

그녀를 향한 사소한 인사말도 파일에 담겨 있다

검은 표지의 파일은 사무적인 표정으로 묵묵히 일한다

어두운 표정의 것들이 그렇듯

그녀는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들은 때론 모나미 볼펜 같다고 생각한다

볼펜 자국 같은 일상이 지나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스르르 넘어가는 비닐의 장정들

오늘은 그가 나를 보고 웃 - 었 - 다

웃는 모습을 가위로 오린다

기억은 꼼짝없이 갇힌다

그녀는 두터운 파일을 말끔히 정리했다

언젠가 검은 파일은 정리된 내용들을 펼칠 것이다

그는 잘 말려들어가 종이 몇 장으로 추억된다

갑자기 두터운 파일 안에 놓인 그는

한 장을 넘길 때마다 과장된 기억들과 마주친다

나날이 그녀는 두터워진다

하지만 파일은 지나간 것만 실을 뿐

그는 소리 내어 말할 것이다

당신의 기억 속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과장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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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서울에서 한국책을 산더미로 부쳐왔다.

작은 소포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커다란 상자 속에 수년간 구경도 못한 신간들이 가득 차 있다.


갑자기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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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거울은 빛나건만 - 황인숙


문득 튀어 일어나

아무에게고 전화를 걸고 싶네.

아무 번호나 눌러

아아아아아 끔찍해요!

그 목소리 외침일지, 속삭임일지

입을 열기도 지긋지긋해

짐승 같은 흐느낌일지.


살아갈 날들이 두렵지도 않아.

오직 '살아 있음'이

나를 꽁꽁 염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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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모르겠는데 나는 스트레스를 받아서 속에서 끓어야 글이 써지니 이상한 성격이다.

어제 너무 열을 받아서 잠까지 설쳤다. 나이는 중년인데 민감하긴 아주 사춘기가 울고 가겠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뭐든지 완전 틀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내 생각에는 완전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질문을 초면에 얼굴색하나  안 변하고 속사포처럼 쏟아대는.


대학은 나왔어요?

결혼은 했어요?

애는 있어요? 

거기선 몇 년이나 일했어요?

어떻게 댁을 한 번도 못 봤지?


오분만 더 이야기했으면 연소득은 얼마냐고 물을 판이다.


'어머 질문 많은 아줌마, 누구야?'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답할 수 있어야 했는데... 못했다... 


나는 갑자기 인생의 패배자가 된 것 같은 열패감에 사로잡혔다. 분명히 과민반응이다. 대학도 나왔고 결혼도 했으며 애는 없지만 (근데 있든 없든 그게 댁이랑 뭔 상관이냐) 나름대로는 이 직종에서는 알아주는 사람들도 있는데, 엉뚱하게 구멍 난 남비처럼 갑자기 형사법정에서 무죄를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은 듯 당황했던 건 왜일까? 트위터에서 무식한 소리하는 당사자는 뻔뻔하기만 한데 읽는 내가 속이 상해서 혼자 쩔쩔매는 것과 비슷한 이유일까. 내가 아무리 궁리해도 말로 정리가 안 되는 그 이유란 도대체 뭘까? 


이런 사람들하고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섞여 살아야 하는 거겠지. 그런가?

난 섞이는 건 바라지도 않고 그냥 폭발하지 않고 조용히 물과 기름처럼 떠가며 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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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2-04-20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반가워요

속사포 질문을 받은건 아니지만 저도 자기소개를 하는데 갑자기
-그런데 미스?
이래서 맥이 탁 풀어진적이 있어요. 그게 왜 중요해? 왜왜? 막 혼자 이랬는데.
어리니까 조장말고 총무하라고 지가 뭔데 막 정하는 것도 그렇고. 여자가 무슨 총무 유전자를 타고난 것도 아닌데 총무 시키는 것도 그랬고. ㅡ,.ㅜ;;
그렇지만 저는 오만간데 적을 두는 사람이니 좋은 낯으로 대해보려구요.
물에 술 탄 듯 알코올 도수 낮추면서...

속사포 질문에는 맥락 벗어나는 얘기하거나 그냥 웃는게 방법 같아요.
어떤 유형이 있다면 그런 유형의 분들은 어떤 의욕 같은거요,
그런걸 오래 기억하지 않는 편이어서 금세 까먹거든요.

검둥개 2012-04-20 11:49   좋아요 0 | URL
Arch님 전 그 아줌마 다시 볼 일 없을 것 같아 다행이지만, 너무 자기중심적인 그런 사람들 넘 싫어요. 근데 화는 늘 자신한테 내는 바람에 울화가 나는 거 같네요. 대범하게 이런 건 남 탓 해도 되는데 ^^
 

요새는 좋아하는 작가가 쿤데라라고 하면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표를 내는 거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다. 왠지 가슴이 아팠다. 대학 때 눈이 유난히 빛나는 한 학번 선배 언니가 생일선물로 사줬던 책이 세 번도 더 읽은 쿤데라의 불멸인데...


삼십이 넘어갈 때는 황당해서 기절할 것 같았다. 어영부영 보내니까 정말 삽십이 되는 날이 오는구나, 싶어서 표는 안 냈지만 그 때 충격도 많이 받았는데, 이제 삼십은 한 세기 전이고(!), 조금 있으면 사십이 될 테세. 


왜 이렇게 나이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강박을 부리는 것일까? 누가 나이값 하라고 윽박지르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유령을 불러대 놓고 스트레스를 받는 격이다.


얼굴 뒤에 - 최승자


얼굴 뒤에

나는 감춘다.

너의 고통과

너의 고통의 피맺힘에 관한

나의 지식을.


얼굴 뒤에

나는 감춘다.

내 자포자기의

내 패배주의의

그러나 무모한 힘을

그러나 무한한 근원을


정작 나이든 어르신네들은 아주 여유만만하건만은.

오십년 후에도 이를 갈고, 육십이 가까워져도 팔랑팔랑하며, 배부른 마음으로 이를 쑤시는 어르신네들 흉내 좀 내봐야겠다.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 천상병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에게 편지를 쓴다네.

참 우습다 - 최승자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늘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2 - 권정생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2학년인 도모꼬가
1학년인 나한테
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어느 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도모꼬가 나중에 정생이한테
시집 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서 싫어요."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이가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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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4-18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아직도, 영원히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하자구요.^^

검둥개 2012-04-18 10:19   좋아요 0 | URL
소녀 때는 분명 애늙은이였는데 이제 나이를 먹으니까 포르르포르르 - 세상사가 희한하지요 ^^

치니 2012-04-18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 님이다! 저번에도 한 줄 쓰셨을 때 반가웠는데. 헤 -
정생이가 이가 갈릴 만하네요. 풉.
사십은 애당초 지난 지 오래, 나이에 대해 무감각해진 지도 오래, 이런 저에 대해 주책이라고 하겠지만 아무 생각 없어요. 나잇값은 별개의 문제지만요. ㅎ

검둥개 2012-04-18 12:44   좋아요 0 | URL
주책이 다 여유와 자신이거든요. 멋지신 치니님!
이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나이값을 반성하는 것은 사실 평소 백퍼센트 무반성 생활을 한다는 반증이죠. 갑자기 업적 좀 쌓아둘 걸 하는 엉뚱한 회한이 들지를 않나 ^^

잉크냄새 2012-04-18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서 유령을 불러대 놓고 스트레스를 받는 격이다> - 뜨끔한 구절이군요.

검둥개 2012-04-19 12:17   좋아요 0 | URL
제 발이 찔려서 그러는 거겠지요?